414화
칸나의 말대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에 유더의 목적지가 있었다.
다른 저택들과 조금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 위에 위치한 희고 고풍스러운 저택.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 아래의 정문 앞에서 소란이 이는 중이었다.
“들어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죄송합니다만 오늘 열리는 타이누 상단 연합 경매에 참석하시는 귀빈들께는 이미 사전에 초대장을 모두 발송해 드렸습니다. 초대장이 없으시다면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나올 때는 있었는데 잃어버렸다고 말하지 않아!”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비하기 위하여 초대장이 없는 경우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장하실 수 없다고…….”
“작년에도 왔던 이 몸이 입장을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야! 그깟 물건 좀 판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느냐? 내가 빌름 남작과 얼마나 잘 아는 사이인지 모르나 본데, 당장 책임자를 데려오거라!”
경매에 입장하려다 저지당한 귀족이 문 앞에 선 경비병과 싸우고 있었다. 그는 초대장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입장할 수 없다는 건 불공평하다며 화를 냈으나, 경비병들은 완강하게 그를 저지했다.
‘빌름 남작이 여기서 경매를 연다고 아주 온 제국에 악을 쓰고 퍼트릴 기세군.’
이게 누가 여는 경매인지 알음알음 다 알고 있겠지만, 공식적으로는 어쨌든 타인 공작은 물론이요, 빌름 남작 또한 이 경매와 전혀 상관없는 이였다.
“죄송합니다만 돌아가 주십시오. 계속 소란을 피우시면…….”
“남작이 여기 있지 않느냐? 남작을 뵈면 해결될 일이다! 그러고 나면 네놈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
병사들의 얼굴 위로 난감하고도 겁에 질린 기색이 번졌다. 그저 시키는 일을 하고 있을 뿐, 귀족에게 해코지를 당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어쩔 수 없을 터였다.
결국 난장을 피우던 귀족이 마차를 강제로 움직여 위로 올라가 버리자, 병사들이 그를 뒤쫓아 뛰어갔다. 덕분에 정문은 아무도 없이 텅 비고 말았다.
“유더. 우린 저기로 넘어가면 안 돼?”
“마차로 다닐 수 있는 길 이외에는 주변 곳곳에 보호 마법이 걸려 있다고 들었어. 다른 단원들과 합류하려면 여기가 아닌 다른 문으로 가야 해.”
경매가 열리는 저택에는 손님도, 일꾼들도 모르는 비밀 입구가 하나 존재했다. 그것을 알아낸 건 프루엘레가 정보를 캐내는 동안 얻은 가장 큰 수확이기도 했다.
정문에서 조금 더 이동하면 나오는 작은 수로 아래 숨겨져 있다는 탈출용 문. 그곳을 이용하면 경매가 열리는 장소로 들키지 않고 곧장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음… 그러면 잠깐 정보만 읽고 가는 건?”
그 정도는 괜찮을 듯했다. 유더는 아무도 없는 정문 앞에 소리 없이 착지했다. 그의 등에서 내린 칸나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서둘러 정문 조각과 벽을 어루만졌다.
“흠. 이 문을 지나간 사람들의 생각과 정보가 굉장히 많이 읽히네. 강렬한 일들이 많았나 봐.”
칸나가 눈을 감고 정보를 읽는 데 집중하는 동안, 유더는 주변을 경계했다. 멀리 보이는 건물 근처에 세워진 마차의 행렬을 보니 그사이 벌써 많은 수의 손님이 도착한 듯했다.
‘빌름 남작이 오지 않아도 예정대로 시작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보다 앞서 이곳으로 왔을 남국인 상인과 나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건을 옮기기로 한 남국인 상인 쪽이 할 일이야 뻔했다. 일이 틀어졌으니 바로 물건을 빼내 내뺄 생각일 터였다.
‘어디와 관련된 자인지 이미 알게 되었으니, 그쪽은 놓친다 해도 급하지는 않아.’
유더는 치안관리단으로 오는 동안 보고 나서 태워 처리한 핀 엘더의 쪽지 속 정보를 떠올렸다. 핀은 별것 아닌 정보라고 말했지만, 그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어쩌면 이후에 더 유용하게 쓰일 만한 정보를 알아냈다.
‘그자들이 여관 밖에 나가 있는 있는 동안, 내 능력으로 살짝 방을 살피고 왔어. 대부분의 소지품은 평범했지만 그중에 이런 문장이 그려진 물건이 하나 있었어.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그릴게.’
몇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별똥별과 지평선, 그 위를 가르는 검 문장.
그건 이전 생에 오르 제국을 비롯한 사막 이북 국가들과 가장 많은 교류를 했던, 남국에서 제일 큰 부족의 문장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그쪽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뒤에 무엇이 있는지 분명해진 남국인 상인과 달리, 나한은 현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상세히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본래 예상했던 바와 크게 다르진 않겠지. 에르시가 없을 뿐, 그녀의 복수를 대행한다는 입장은 변치 않았을 테니까.’
“나한이란 사람 말야. 제대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또다시 동료를 그렇게 버리고 갈 줄은 몰랐어.”
손안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뿜어내며 정보를 읽던 칸나가 문득 조용히 중얼거렸다.
“가일과 두일처럼 자신을 돕기 위해 따라와 준 동료도 버리고 가더니, 이번에는 복수를 돕겠다던 동료를 두고 간 거잖아. 설마 이대로 이번 일은 그만두고 나머지 동료들을 데리고서 또 멀리 도망쳐 버리려는 걸까?”
“아니.”
유더는 확신을 담아 답했다.
“그놈은 에르시가 없어도 에르시의 복수를 계속할 생각일 거야.”
“이해할 수가 없어. 복수를 해야 할 사람이 없는 복수를 남이 계속 진행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냥 그것 자체가 목적인 자라고 생각해.”
눈앞의 빌름 남작을 죽이고 싶어 동료들의 만류까지 뿌리치던 에르시를 두고 간 건 그리 의외는 아니었다.
나한이 자신만의 기준과 안위를 우선하여 동료나 작은 목적쯤은 얼마든지 버리고 갈 수 있는 자라는 건 이미 몇 번을 보아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가일과 두일 형제가 그렇게 버려졌고, 이번에는 에르시가 그리되었을 뿐이었다.
에르시의 복수를 돕기 위해 하는 일이라 밝힌 이번 사건도 그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결국 나한에게 중요했던 건 ‘에르시’의 복수가 아니라, 에르시의 ‘복수’였을 테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남의 부탁으로 한다는 듯이 명분을 세우고, 그를 위해 움직인다는 이유로 동료들을 끌어모아 그들의 증오를 돋운다. 에르시가 여기에서 죽더라도 그건 나한의 책임이 아니라 마병단의 책임이 될 테고, 남은 동료들은 그로 인해 나한의 더욱 충실한 동료가 되어 줄 테니 참으로 영악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기분 나쁜 미친놈이었다.
“동료가 아니라, 결국 그냥 수단일 뿐이었구나.”
칸나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듯 중얼거렸다.
“가일과 두일이 그렇게 믿던 ‘현자’는 대체 나한을 왜 계속 묵인하는 걸까? 나한이 대삼림에 있던 각성자들의 마을을 완전히 망쳐 버렸단 걸 알고는 있을까?”
“온건파라 생각했던 게 가면일 가능성도 있겠지. 대외적으로 선역을 맡은 지도자가 반대 의견의 사람들까지 제 지배하에 두기 위해 아랫사람을 시켜 저와 반대되는 입장의 일을 몰래 맡기는 경우는 흔하니까.”
유더는 카치안 황제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순간, 계속해서 주변에 능력을 사용 중이던 칸나가 문득 묘한 얼굴로 유더를 바라보았다.
“와, 유더. 방금 좀 단장님 같았어.”
“……내가?”
뜬금없는 말에 모든 상념이 깨져 나갔다.
“말하는 게……. 아니, 아무튼 이제 읽을 건 다 읽은 것 같으니까 가자.”
칸나를 다시 업고 비밀 입구로 향하면서, 유더는 나한과 함께 있을 호산라의 이동 능력이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인지를 새삼 생각했다.
이동 능력에 특화되어 있지 않은 핀 엘더의 능력만으로도 저택 하나쯤 소리소문 없이 빠져나오는 건 간단하기 그지없었는데, 하물며 호산라는 자신을 포함해 다인원을 동시에 장거리 이동시킬 수 있는 자였다. 나한을 아직 때려잡지 못한 건 그자가 함께 있는 탓이 절반은 되었다.
“방금 우리가 봤던 병사들은 빌름 남작이 아직 안 왔다는 사실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었어. 그리고… 나한과 관련된 이들의 정보도 어쩌면 조금 읽어낸 것 같아.”
유더에게 업힌 칸나가 짧게 자신이 읽어낸 정보를 언급했다.
“나한과 관련된 이들?”
“아침에 이곳에 들어온 일꾼들 중에 변동이 있었어. 본래 오기로 했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몇 명 끼어서 병사가 화를 냈는데… 이후에는 자기가 잘못 봤다고 생각하고 통과시켰더라구. 이상하지 않아?”
“환상 능력이군.”
“역시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지. 부자연스러운 인식이었거든.”
“대단해, 칸나.”
유더가 솔직하게 칭찬을 건네자 칸나가 기분 좋게 웃었다.
“나도 대삼림에서 놀고만 있었던 게 아니라구!”
그때, 비밀 문이 위치한 수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기척을 죽이고 접근하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모여 있던 낯익은 마병단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유더, 늦어서 걱정했어. 칸나도 왔구나.”
“오는 동안 다른 일은 없었어?”
“응. 우린 네가 신호를 보내자마자 바로 여기로 왔으니까.”
단원들 속에는 아침부터 이곳에 와 있던 또 다른 동료도 있었다. 바로 나그란의 별 출신 각성자, 로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