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에문은 풀려났음에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모아 부축하고, 어둠을 두른 채 치안 관리대 건물 쪽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에도 건물 위쪽에서는 마병단원들이 끊임없이 퍼붓는 여러 속성의 공격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잘못 맞은 담벼락이 무너지고 짐마차와 길이 뒤집어지는 혼란 속에서, 유더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장애물을 피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자욱한 먼지를 뚫은 그의 앞에, 바닥에 쓰러진 빌름 남작과 그를 향해 공격을 내지르는 에르시가 보였다.
그녀의 곁에 나한이나 다른 동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작의 근처에는 그를 따르던 하인이 이미 난자된 시체가 된 채 나뒹굴고 있었다. 남작의 저택 지하실에서 살해당한 그의 동생 부부와 다를 바 없는 방식이었다.
남작은 체면조차 잊고 땅을 기며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했다. 옷자락과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가득해 사냥당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꼴이었다.
“다, 다들 어디 있느냐. 저자가 날, 악!”
“죽어!”
“으아아악!”
빌름 남작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그가 예상했던 죽음은 닥쳐오지 않았다.
유더는 에르시가 내지른 손을 막아낸 검을 쥔 채 핏발 선 눈동자를 마주했다. 맨손과 검이 맞닿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충격이 손바닥을 타고 저릿하게 올라왔다.
“마, 병, 단원.”
그녀는 후드를 깊이 눌러쓴 남자가 자신과 구면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지만, 사실 얼굴을 내놓았더라도 복수에 미친 듯 보이는 현 상황에서 알아보았을지는 의문이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날 막는다면, 너도, 죽인다……!”
그녀가 다른 손을 들어 발광하듯 내리쳤다. 유더는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몸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자신과 빌름 남작에게로 향하려는 공격을 막아 냈다.
그때서야 겨우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빌름 남작이 눈을 뜨고는 상황을 파악했다. 저를 막아 주고 있는 이가 마병단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사, 살려 줘! 나는, 나는 귀족이다. 저자가 귀족을 암살하려 한다!”
당연히도 그 외침은 유더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화가 난 에르시의 힘만 더욱 강해졌을 뿐이었다. 유더는 그녀의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충격의 강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폭주하겠는데.’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각성자의 힘이 특정 상황에서 평소보다 훨씬 강해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흥분할수록 힘이 강해질지는 몰라도, 공격은 더욱 단순해지니 막아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뽑아낼 수 있는 힘의 양이 무한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급격히 힘을 뽑아낸 각성자들이 폭주하여 죽는 모습을, 이전 생의 유더는 수도 없이 보았다. 운이 좋으면 살아나 능력이 껑충 발전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운이 좋았을’ 경우였다.
그리고 에르시는 바로 그 전 단계에 진입한 듯 보였다.
폭주한 각성자를 상대하는 건 폭풍을 맨몸으로 막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힘을 최대한 적게 쓰고 제압하려던 계획을 무너뜨려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뒤쪽에서 지원군이 등장했다.
“여기 있었네요!”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버의 뒤를 따라 에문과 칸나가 나타났다. 적이 늘어나자 에르시는 더 이상 일대일로 싸우는 건 불리하다 판단한 듯 일단 뒤로 물러났지만, 원한에 찬 으르렁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유더는 동료들의 곁으로 다가가며 작게 속삭였다.
“상대의 힘이 심상치 않아. 폭주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조심해.”
“응? 폭주?”
“힘을 지나치게 발휘했을 때, 어떤 경우에는 발전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반대가 되지. …전에 본 적이 있어.”
“마병단 들어오기 전부터 다른 각성자를 만났다더니, 정말 별걸 다 아는구나.”
에문이 놀라는 사이 그들의 곁까지 기어온 빌름 남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를 구하지 않고 뭘 하는 거냐! 내가 누군지 알아!”
“누구신데요?”
칸나가 반문하자 빌름 남작이 순간 말을 잃었다.
“나, 나는…….”
“그자를, 내게 넘겨!”
에르시가 숨을 그르렁거리며 말을 걸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자의 목숨뿐이다. 넘겨 준다면,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약조하겠어. 같은 각성자 형제자매끼리 싸우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지 않나?”
에르시를 지그시 바라보던 칸나가 고개를 저었다.
“능력을 안 써도 알겠어. 거짓말이네.”
“…그래. 저 사람은 이미 증오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상관없게 된 사람이야.”
에버 또한 칸나와 같은 눈빛으로 에르시를 바라보았다.
에르시는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을 끔찍하게 죽이며 증오를 표출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마병단이나 이 일과 연관 없는 다른 사람들이 입은 피해 따위는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그녀의 분노는 타인의 죽음으로 줄어들기에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이 자리에서 빌름 남작이 아니라 진짜 원흉인 타인 공작을 죽인다 해도 복수는 끝나지 않을 테고, 증오에 침잠한 스스로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제 몸과 능력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해 가는 중이라는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는 이를 바라보던 에버가 문득 흐음 하고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여기 오기 전에 확인한 결과, 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나그란의 별과 당신과 싸웠다는 남국인 상인은 벌써 이곳을 떠났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눈에 띄는 대로 대부분 제압해 뒀지만… 그자들은 공격을 잘도 피해 빠져나갔더군요.”
어디로 갔을지는 뻔했다. 대담하게도 치안관리단 근처에 마련된 그들의 최종 목적지, 경매장일 터였다.
“아마 저 사람은 남작을 죽이기 전에는 여길 뜰 생각이 없겠죠. 폭주든 뭐든 당신이 여기 붙잡혀 있을 시간은 없으니 칸나와 함께 먼저 가요. 저 사람은 제가 상대할게요.”
“언니.”
칸나가 놀라 고개를 돌렸으나 에버는 담담한 얼굴로 장갑 끝을 잡아당겨 똑바로 착용했다.
“능력이 저와 비슷한 계열로 보이니 상대하기엔 어려움이 없을 것 같고, 곧 관리단 내부에 남은 동료들도 나올 거잖아요. 남작은 에문이 숨기면 되니까 문제없어요.”
“…….”
치안관리단에 대기 중이던 단원들 중 상당수는 유더의 신호가 떨어졌을 때 이미 경매장 쪽을 향하여 이동했을 터였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유더가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폭주를 앞둔 각성자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는 에버가 혼자서 잘할 수 있을까.
에버가 에르시에게 밀리리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변수란 어디에서든 나올 수 있는 법이었다.
유더의 침묵 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듯, 에버가 픽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렇게 봐요? 우리 그동안 같이 새벽 훈련했던 것 잊었어요? 나한테 힘 조절을 정말 잘한다고 칭찬까지 해 놓고, 그건 사실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아뇨.”
“잡아넣는 대로 따라갈 테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신과 부단장씩이나 되어서 저런 사람한테 질 생각 없으니까.”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처리하는 대로 오십시오.”
“간만에 제대로 힘 좀 써 봐야겠네요.”
“에버. 방금까지 때려잡았던 사람들에겐 제대로 힘을 쓴 게 아니었어요?”
에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소리가 들렸으나 에버는 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빌름 남작 쪽을 가리켜 보였을 뿐이었다. 눈이 마주친 남작이 겁에 질린 얼굴로 또다시 물러났다.
“뭐, 뭘 하려고. 이놈들. 감히 내게 손대지 마!”
“그자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에르시가 무어라 소리치며 달려드는 순간, 에버가 주먹을 꽉 쥔 채 폭발하듯 땅을 박찼다. 두 사람의 손이 맞부딪치자마자 거대한 압력이 뿜어져 나오며 강철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유더는 그 틈을 타 빠르게 칸나를 향해 눈짓을 했다.
“가자.”
칸나 또한 굳게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나아가야 하니 등에 업혀.”
“어? 으응. 우왓.”
등에 업히자마자 훌쩍 뛰어오르는 유더 때문에 칸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악. 너무 높아!”
“미안.”
바람을 밟고 뛰는 데 익숙한 그는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고 다시 뛰어오르는 감각에 익숙했지만 칸나는 그렇지 못할 터였다. 사과를 건네자 몇 번 혀 씹는 소리를 내며 웅얼대던 칸나가 유더의 어깨를 꽉 붙잡고 달라붙었다.
“괘, 괜찮아. 지금은 급하니까 더 빨리 가도 돼! 가자!”
“…….”
“아 맞다. 그런데 경매장은 어디야? 이 근처는 전부 으리으리한 저택들 같은데?”
“작년에 경매에 참석했던 이들의 정보로는 그 저택들 중 하나를 개조해 경매장으로 사용한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가면 돼.”
유더는 높이 뛰어오른 뒤 착지한 어느 건물의 지붕 위에서 옆 건물 지붕을 향해 뛰는 동안 대답을 해 주었다.
“아, 저기인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