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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12화 (412/805)

412화

‘무언가 눈치챘나 싶었는데… 다행이군.’

빌름 남작이 피해자들을 데리고 나오면, 기회를 보아 치안관리단 내부 쪽의 마병단원들이 조력자에게 신호를 주기로 되어 있었다. 슬슬 시작할 모양이었던 듯한데 시도해 보기도 전에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잠시 후 평소보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바람이 치안관리단 쪽에서부터 불어닥쳤다. 나무가 일제히 흔들리며 홑옷을 입은 채 묶여 있던 이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맨 뒤에 있던 밀빛 머리의 조력자만은 어깨를 흠칫 굳히고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신호는 잘 전해졌다.’

그가 구조요청을 했을 때와 일부러 비슷한 방식을 이용한 보람이 있었다. 유더는 겁에 질려 있던 조력자의 눈빛 속에 긴장감과 굳센 의지가 들어차는 모습을 보았다.

“추워 죽겠군.”

빌름 남작이 욕을 중얼거리며 손을 휘젓자 묶여 있는 이들의 목줄 끝을 잡은 하인이 짐마차 쪽으로 바삐 움직였다. 발을 맞추어 움직이지 않으면 서로의 목을 조르게 되는 매듭으로 엮인 사람들이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뒤뚱뒤뚱 따라갔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맨 뒤에 있던 조력자가 별안간 발을 헛디디는 척하며 넘어졌다.

줄줄이 엮여 있던 다른 이들도 덩달아 엉켜 넘어지자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멍청한. 그런 일 하나 제대로 못 해? 당장 목줄을 끊고 일으켜 세워! 죽으면 안 되니까!”

여기까지 데려온 귀한 37마리의 ‘말’들이 마지막에 상하면 그간의 노력이 수포가 된다. 하인과 남국인 상인이 이끌고 온 이들이 바삐 달려들어 목줄을 풀어내려 하는 동안 빌름 남작은 멀찍이 떨어져 미친 듯 화를 냈다.

유더는 마차를 지키며 주변을 경계하던 나머지 사람들의 신경까지 모두 그쪽에 쏠렸음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가 막 손을 올려 지금 뛰어들라는 신호를 내리려 했을 때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 쪽에서 불꽃이 치솟고 비명이 들려왔다.

“억!”

“흐윽!”

여태까지 마차를 지키던 이들 중 몇 사람이 갑자기 동료를 찌르고 불을 터트렸다. 등 뒤에서 기습을 당한 이들은 한 번 대항해 보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피가 마차와 바닥을 적시며, 대경실색한 빌름 남작의 비명이 들려왔다.

“누구냐!”

“오랫동안 당신을 직접 보길 기다렸던 자들.”

어둠 속에서 베일을 벗듯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쪽 얼굴에 화상 자국이 가득한 사내와, 낯이 익은 그의 동료들이었다.

‘나한, 호산라, 그리고 에르시. 한 명은 잘 모르겠지만… 방금 불꽃을 터트린 게 저자겠군.’

나그란의 별이 타이누 곳곳을 시끄럽게 만들 때마다 항상 존재했던 불꽃 폭탄이 저자의 소행일 듯했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불꽃을 쏜 탓인지 숨을 몰아쉬고 있기는 했지만 다른 이들을 움츠러들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나타날 줄은 알았지만, 설마 지금일 줄이야. 어디서부터 저들 사이에 끼어 들어온 거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보자 유더와 싸웠던 남국인 상인의 표정이 몹시 싸늘했다. 아무래도 나한 쪽이 상호 합의하에 숨어든 게 아닌 건 확실해 보였다.

그사이 순식간에 마차를 지키던 이들을 모두 쓰러뜨린 에르시가 손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숨을 씨근거렸다. 드디어 진정한 복수대상을 마주한 자의 눈에서 광기와 원한이 진득하게 흘러넘쳤다.

“빌름 남작…….”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한 눈빛을 정통으로 마주한 빌름 남작은 거대한 맹수의 이빨이 목으로 파고드는 느낌에 헛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타이누에서 폭발 사건들을 일으킨 그 미친놈들이 너희들이구나!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도망? 우린 한 번도 여기서 도망간 적 없어. 그저 때를 기다렸을 뿐이지.”

에르시의 곁에 있던 나한이 낮게 웃으며 대꾸해 주었다.

“이제 그간 저지른 죄의 벌을 받을 시간이다. 겸사겸사, 우리의 형제들도 구해야겠고.”

“무슨…….”

덧붙인 말까지 들은 남작이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남국인 상인을 향해 고함을 쳤다.

“뭣들 하는 게야. 어서 저놈들을 처리하지 않고!”

“명령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버러지 같은 놈.”

그 말과 동시에 에르시가 손을 휘둘렀다. 팔을 감싼 보이지 않는 예기가 번득임과 동시에 유더와 싸웠던 남국인 상인이 검을 뽑아 허공을 내리쳤다. 보이지 않는 것과 부딪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폭발하고 먼지가 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차례의 공방이 오간 뒤, 남국인 사내와 에르시는 잠시 대치 상태에 들어섰다. 남국인 상인이 이끌고 온 다른 이들도 전부 무기를 뽑아 들자, 에르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났다.

‘능력을 바로 쓰지 않고 에르시를 상대한 건 남작의 앞이라서인가.’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능력을 쓰지 않고도 검만으로 에르시를 상대할 만큼 그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왜 멈춘 게냐. 당장 죽여 버리지 않고!”

빌름 남작이 뒤에서 날뛰었으나 대치 상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잠시 후 에르시와 나한, 호산라를 훑어보던 남국인 상인이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희가 타이누 곳곳에 침입한 그 각성자들이라고?”

“왜. 못 믿겠나?”

“여기 온 너희가 전부는 아닐 텐데. 나머지는 어디로 보냈지? 너희보다 더 강한 이들은 이미 경매장으로 간 건가?”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보는 남자를 보며 유더는 그가 누구를 찾는지 깨달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싸웠던 키시아르와 유더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알고 싶다면 직접 가서 알아보지 그래, 타인 가의 개들아.”

에르시와 함께 있던 불꽃 능력자가 크게 웃으며 손 위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물론 너는 그걸 알 수 없겠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기묘하게 대화는 통했다.

키시아르와 유더를 아직 나그란의 별의 일원으로 오해 중인 남국인 상인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나한 측의 오해가 잘 맞물린 결과였다.

‘상인의 말대로 저 인원이 전부는 아니니 경매장에 나머지 동료들을 숨겨 놓고 왔을 확률도 높을 테고.’

거기까지는 유더 또한 예상했던 바였다.

그사이 창고 내에서 만났던 강력한 각성자들이 벌써 경매장 쪽으로 이동했다고 확신한 남국인 사내가 검을 거두고 자신과 함께 온 이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놈들은 알아서 처리하도록. 나는 지금 바로 이동하겠다.”

“뭐? 이놈. 나를 지키지 않고 어디로 가는 거냐!”

“누가 보내 줄 생각이 있다고 했던가?”

빌름 남작과 불꽃 능력을 쓰는 자가 동시에 소리를 쳤지만 남국인 상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를 막기 위해 에르시와 불꽃을 쥔 자가 앞으로 나서고, 그에 대항하듯 남국인 상인 측 사람들도 무기를 내밀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했던 분위기가 깨지고 막 무언가 터질 듯 어수선해진 바로 그 순간, 유더는 비로소 멈추었던 손을 높이 올려 진격 수신호를 보냈다.

“거기 누구냐! 감히 타이누 치안관리대에 침입을 해? 모두 멈춰라!”

치안관리단 건물 위쪽에서 들려온 우렁찬 소리와 함께, 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창이 내리꽂혔다. 뒤이어 빛의 화살, 불과 물 덩어리가 거침없이 쏘아져 내려오며 나한 측과 빌름 남작 측, 그리고 방치된 채 버려져 있던 인신매매 피해자 측들을 갈라놓았다.

“마, 마병단?!”

부서지는 나무를 피하며 고개를 든 빌름 남작이 기겁한 얼굴로 외쳤다.

“마병단이 왜 여기에……!”

“에르시! 지금 가면 안 돼!”

“이제야 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또 도망치라고? 미친 소리 마!”

그 틈을 타 에르시가 고함을 지르며 남작에게로 달려들려다 불을 내뿜던 동료에게 제지당하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어지럽게 비산하는 먼지와 폭파음 속에서, 유더와 동료들은 얼굴을 가린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서 일제히 앞으로 뛰어나갔다.

“괜찮으세요?”

망설임 없이 가장 가까이에 쓰러져 있던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향해 나아간 에문과 칸나, 에버가 각자 소지하고 있던 단검을 들어 묶인 끈을 잘라 풀어 주었다.

“마병단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저, 정말로 구하러 와 주셨군요…….”

에버를 발견한 밀빛 머리칼의 조력자가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살려 주셔서…….”

에버가 말없이 그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그들의 곁에서는 칸나가 바쁘게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며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등을 두드려 주는 중이었다.

“일어서실 수 있으시겠어요? 좋아요. 무서워하지 마시고 저쪽 건물로 곧장 들어가세요!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켜드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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