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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11화 (411/805)

411화

유더는 아무도 없는 서쪽 담장을 밟고서 높이 뛰었다가, 바람을 한 번 더 딛고서 목표 지점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창을 넘어 순식간에 2층 높이의 복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모습을 본 에버가 순수한 감탄사를 토해 내며 눈가를 흥분으로 물들였다.

“와. 너무 빨라서 뭐가 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네요. 마병단 오기 전에 혹시 밤손님 경력 좀 있었어요?”

농담이라는 건 알지만 실제로 밤손님이나 다를 바 없는 암살 임무를 수도 없이 수행하면서 잠입 능력을 키운 것은 맞았기에 유더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 침묵의 의미를 모를 에버가 밝게 웃으며 그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힘을 쓰는 걸 보니 이제야 유더가 정말 회복되었다는 게 느껴져요. 오는 동안 문제는 없었죠?”

“없었습니다.”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요. 아, 그리고 혹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칸나가 지금 여기 와 있는데…….”

“그건 핀에게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여기로 온 이유는 따로 설명 안 해도 되겠네요.”

깔끔하게 답한 에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예상치 못한 귀환이긴 하지만 이것도 우리에게 기회라면 기회잖아요? 저는 칸나도 오늘 임무에 참여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막 돌아온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게 너무한가 싶은 생각도 좀 들어서요. …유더는 어떻게 생각해요?”

유더는 신중한 기색을 띤 청보라색 눈동자를 향해 희미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사실 칸나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가 먼저 그 말을 하려 했습니다.”

유더의 답에 에버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그죠? 사실 칸나에게 이미 오늘 임무에 대한 설명은 다 해 둔 상태였어요. 유더도 좋다고 하니 이제 문제없겠네요! 다행이다!”

이쪽이야말로 칸나에게 재차 설명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에버가 서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판단력과 지휘력이 훌쩍 상승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기껍기 그지없었다.

유더는 웃음 띤 눈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걷고 있는 에버를 향해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이전 생의 에버와도 이런 식으로 마병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걸은 적이 많았다. 그때는 단장과 부단장의 입장이었고, 사이에 웃음이 오간 적도 없었지만 지금은 아주 중요한 임무를 앞두고도 두 사람 모두 가벼운 기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문득 신기하게 여겨졌다.

에버 벡을 아주 오랫동안 보아 왔다 생각했음에도 낯선 기분이었다.

그는 그 묘한 감각을 갈무리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만은 아니었다.

“다 왔네요, 들어가죠.”

에버가 치안관리단 내에 위치한 마병단 본부의 문을 열었다. 안에 모여 있던 익숙한 이들의 눈빛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유더가 왔다!”

다양하게 반가워하는 얼굴들 속에서 유더는 오랜만에 보는 칸나를 찾았다. 단복이 아닌 평범한 옷을 걸친 칸나가 놀라고도 감동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유더! 정말 눈이 다 나았구나! 세상에! 너무 다행이야. 이걸 가케인도, 지미도 봤어야 했는데…….”

유더는 그녀와 포옹을 나누기 위해 몸을 굽혔다. 따뜻하고도 매운 손길이 등을 몇 번 철썩철썩 때리고는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보낸 귀환 편지가 전서조의 엇갈림으로 뒤늦게 저택 쪽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 할 말이 많다며 몹시 분노했다.

“아무리 편지가 나보다 늦게 도착했어도 그렇지, 마병단원이라는 표식까지 꺼내 보여 줬는데 마중을 나온 이가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내쫓는 건 뭐야? 그러면 나 대신 안쪽에 연락을 해 달라니까 바빠서 그럴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 정보를 읽어 보니까 그냥 나를 물 먹이고 싶어 하는 것뿐이었으면서.”

정문을 지키고 있던 타이누 기사와의 접촉을 통해 못된 속마음을 읽어낸 칸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울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나중에 두고 보자는 말만 남기고 차갑게 마차를 돌려 치안 관리대 쪽으로 왔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에버가 잘했다며 칭찬을 했다.

“빌름 남작 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래. 유더는 감옥까지 갔다 왔는걸. 그래도 그 이후로는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오늘 일이 끝나면 대가를 몇 배로 치르게 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문 앞에 거꾸로 매달아 소원대로 들어오는 손님들 확인만 실컷 하게 해 줄 테니까.”

유더의 싸늘한 대꾸에 칸나를 위로하던 단원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잠시 후, 모든 단원들의 얼굴 위로 수상한 속내를 공유하는 웃음이 씩 떠올랐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 마병단이 자랑하는 단장보좌의 성질이지.”

“과연 마병단의 정신다운 대답이다.”

마병단이 자랑하는 성질?… 마병단의 정신?…….

처음 듣는 낯선 말의 뜻과 출처가 짐작되지 않아 유더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에문 필랑이 뛰쳐 들어왔다.

“다들 이제 준비해! 감옥 후문 쪽에 수상한 놈들이 나타났고, 감옥 쪽에서 열매 냄새가 강해졌대. 남작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아!……. 어, 그런데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유더와 칸나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모습에 모두 와글대며 웃었다.

‘열매 냄새가 강하게 난다는 건 감옥에 갇혀 있던 조력자가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는 뜻. 여기서 빌름 남작의 역할은 그들을 감옥에서 빼내고 이동시킬 자들에게 넘기는 데까지일 테니, 높은 확률로 남국인 상인들이 와 있겠군.’

유더는 단복 위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단원들을 돌아보며 짤막하게 선언했다.

“가자.”

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몇 조로 나뉘어 이동했다. 몇몇은 탁 트인 곳에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건물 꼭대기로, 몇몇은 치안관리단 내부로, 또 누군가는 출입구 쪽으로, 그리고 유더와 함께하는 에문과 칸나, 에버, 그리고 예민한 후각 능력을 지닌 길버트라는 단원이 가장 위험한 지하 감옥 쪽을 향하여 가까이 다가갔다. 어둠 속에 숨는 능력을 아주 옅게 펼쳐 동료들에게 둘러 준 에문이 그들을 이끌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그늘로 향했다.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주변은 평소와 달리 사람이 없어 몹시 조용했다. 빌름 남작이 오늘 열릴 파티와 경매를 위하여 대부분의 치안 인원을 번화한 도시 내부로 이동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 또한 의심 없이 이곳에서 빠져나갔다고 알고 있겠지만, 사실은 그를 노리는 수많은 이들이 맹수처럼 주변에 도사린 상태였다.

“저기 봐. 저쪽 후문에 세워져 있는 마차들. 보여? 내 능력으로 최대한 가까이서 살폈는데,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놈들이 내부에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어.”

“짐마차네요. 감옥에서 빼낸 사람들을 진짜 짐짝처럼 싣고 갈 생각이군요. 사람을 말이라고 부르더니, 이건 말 취급보다도 못해요.”

에버가 어둠을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저기, 열매 냄새가 이제 거의 지척에 다다랐어. 곧 나올 것 같아.”

출입구에서 가까운 벽에 얼굴을 지그시 대고 있던 길버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겠어. 사람들이 나오면 그중에서 누가 열매 냄새가 나는 사람인지 알려 주고 바로 건물 쪽으로 돌아가. 에버도 그 사람이 당신이 만난 이가 맞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으응.”

“알겠어요.”

유더의 지시에 길버트와 에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 밧줄 끝을 감아쥔 하인 차림의 장정이, 그리고 그 줄에 엮여 생선처럼 목과 손이 꽁꽁 묶인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감옥에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신기하게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괜찮았다고 들었지만 빠져나온 이들의 몸은 뼈가 드러날 만큼 마른 상태였다. 반항조차 하지 못할 만큼 겁에 질린 표정들이 마치 시체처럼 보였다. 입에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렸고, 도망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인지 신발도 주지 않았다. 날이 쌀쌀한데 옷조차 한 겹짜리 홑옷이었다.

비참한 꼴을 본 마병단원들의 눈 속에서 일제히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

유더는 겨울 바람보다 차게 식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길버트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길버트가 천천히 손을 올려 누군가를 가리켰다. 에버도 뒤를 이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묶여 있는 이들 중 가장 끝에 선 밀빛 머리칼의 사내가 바로 열매를 삼킨 마병단의 조력자였다. 그는 누군가를 찾듯 벌벌 떨면서도 눈을 굴려 주변을 두리번댔다.

유더가 그를 보고 있는 동안, 검은 마차에서도 사람들이 내려 묶여 있는 이들을 향해 다가왔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가장 앞에 선 이들이 차례로 모자를 벗었다.

묶인 이들의 앞에 선 이는 당연히 빌름 남작이었고, 그를 마주하고 선 이는 이전에 지하 창고에서 싸웠던 남국인 상인이었다.

“…저자. 이전에 나와 단장님을 상대로 싸웠던 자야. 검기와 비슷하게 힘을 발해 싸우는 자니 근접전을 유의해. 기척 감지에도 능하니 조심하고.”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지만 그조차도 혹 남국인 상인이 눈치챌까 걱정이 되었다. 단원들이 숨을 참을 듯 작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모두 37명이니 확인하고 싣게. 창고의 물건들은 제대로 모두 가져다 두었겠지?”

“예.”

“같이 가서 확인하고, 약속된 시간까지는 경거망동하지 마. 미친 녀석들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니 경매가 끝날 때까지는 너희들이 철저히 지켜야 한다. 일이 잘못되면 공작 전하의 진노는 네놈들의 목을 다 바쳐도 씻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

말없이 빌름 남작의 역정을 듣던 남국인 상인이 문득 고개를 흠칫 돌렸다. 유더는 그의 시선이 치안관리단 쪽을 흐릿하게 향하는 것을 보고 미묘하게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왜 서 있기만 해? 시간 끌지 말고 어서 움직여!”

“…….”

그 순간 적절하게도 빌름 남작이 소리를 질러 준 덕에 남국인 상인의 시선은 이내 본래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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