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오늘은 날씨가 참 좋군요. 어제도 밤늦게까지 훈련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푹 쉬셨습니까?”
황궁기사단장 테오라도 반 타인은 제 앞에 앉아 싱글싱글 웃고 있는 프루엘레를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기별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그를 기사단장실 안에 들인 건 그저 지금이 휴식 시간이기 때문일 뿐,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우리가 살갑게 안부나 나누러 만날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구나. 곧 훈련을 참관하러 다시 나가야 하니 본론만 이야기해 주겠느냐.”
“제가 얼마 전까지 타이누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그곳에 왜 갔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본론만 이야기하라고 했다만. 수수께끼는 좋아하지 않아.”
“저는 아버지를 막을 방도를 찾으러 그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찾아냈지요.”
프루엘레의 답을 들은 테오라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빌름 남작을 만나러 간 줄 알았는데, 펠레타 공작 쪽이었나.”
“가문 내에서 아버지를 향한 불신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전까지는 저와 상관없는 문제라 생각했었음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이제는 아닙니다.”
프루엘레는 말을 끝낸 뒤 잠시 한 번 숨을 내쉴 정도의 시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상대에게 중요한 말을 한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서는 그만한 분위기 조성을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한 법이었다.
“혹, 아버지께서 진행 중인 서부 무역 투자사업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
“어느 정도는 아셨나 보군요. 그렇다면 곧 타이누에서 빌름 남작의 주도하에 자선 파티와, ‘경매’가 열릴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까?”
“…….”
“그 사실을 태양궁에 계신 분께서 이미 모두 파악하고 계시다는 것은요?”
무표정을 지키며 조금씩 가늘어지던 테오라도의 눈이 그 순간, 처음으로 멈칫했다.
여태껏 프루엘레를 길가의 돌멩이와 비슷한 눈으로 보던 이가 언제든 일어날 듯 보이던 자세를 바꾸어 천천히 제대로 앉자 프루엘레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 전하가 아직까지도 그곳에 계시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타이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고, 아버지가 선을 넘겼음을 확신했습니다.”
선을 넘었다는 말 속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테오라도는 그 뜻들을 모두 정확히 알아들었다.
“아페토 가의 비극이 고작 몇 달 전이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묻고 덮어 버리려 하거나, 이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를 계속 내버려 둔다면 결과는 아페토와 다름없이… 아니. 그때보다 더한 폭풍이 되어 모두를 덮칠 것입니다.”
담담하지만, 그래서 더욱 차가운 경고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테오라도는 침묵을 지키다 조용히 물었다.
“…폐하께서 모든 걸 알고 계시다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공작에게 보고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냐?”
“보고하실 때는 이미 늦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하지 않으시리라는 것 또한 잘 압니다.”
“어떻게?”
딱딱하게 흘러나온 물음에 프루엘레는 소리 없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당숙께는 가문이나 아버지보다 검이, 그리고 황궁기사단이 무엇보다 우선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테오라도 반 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어린 1공자가 어느새 제 앞에 서서 이런 얼굴을 할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저는 수도로 돌아온 뒤부터 계속해서 가문 내의 많은 분들을 만나 뵈었습니다. 오늘 당숙을 만나러 온 건 사실 모든 만남이 끝난 뒤의 마지막 순서였지요.”
프루엘레는 천천히 그간 만난 이들의 이름을 읊었다.
그중에는 타인 공작의 명 때문에 본디 가지고 있던 이권을 갑자기 빼앗기고 이를 갈던 자들의 이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간 테오라도처럼 가문의 일에 적당히 무관심한 태도를 취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타인 공작이 무역 투자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다는 것을 알아도, 남국인 상인들이 이권을 채가 원성이 높아져도 제가 하는 일에만 영향이 오지 않으면 상관없다고만 여겼던 자들이기도 했다.
“모두가 너의 의견에 동조했느냐?”
“가문이 그럭저럭 잘 유지되어야만 저희의 소중한 것들을 누리고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동의하시더군요. 책임을 다하지 않고서 가문의 힘만 제멋대로 이용하는 수장이 과연 저희에게 필요가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에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닐까요?”
타인 가의 피를 누구보다 짙게 물려받은 이 중 하나인 테오라도 반 타인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가 그동안 귀찮아하면서도 타인 공작의 부탁을 어느 정도 들어주거나 따른 이유는, 가문의 유지를 위해 수장을 돕는다는 최소한의 의무와 책임 정도는 행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 타인 공작이 선을 지나치게 넘었다면, 그건 여태까지처럼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문제로 변했다. 프루엘레의 말마따나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들 때문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기 짝이 없던 아페토 공작가가 순식간에 문을 닫고서 치욕스러운 재정비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던가? 가문 내에서 오랫동안 이루어진 용서받을 수 없을 죄업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죄업은 어떻게 세상에 낱낱이 드러났던가.
거기엔 분명 황제의 소리 없는 의지와, 그것을 대행했을 펠레타 공작의 손길이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황태자 책봉 이후 아무런 힘도 남지 않은 듯 보였던 그들이, 아페토 가의 내부인이자 누구도 중요히 여기지 않았던 인물인 3공자를 움직여 그야말로 순식간에 모든 일을 끝내 버린 것이다. 정정했던 아페토 공작은 몸져누운 채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었으며 위세를 잃은 자리는 병약한 1공자에게 넘어갔다.
테오라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다 안다는 듯, 프루엘레가 검붉은 눈동자 너머로 영리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아니라도, 황제 폐하께서 곧 당숙을 선택의 기로에 세우실 것입니다. 몰랐다는 말만으로는 참작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 제 손을 잡으신다면 그곳에서 제가 보고 들은 것들을 모두 알려드리겠습니다.”
테오라도의 머릿속에 타인 공작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공작은 자신의 아들 프루엘레가 갑작스레 타이누에 갔다는 사실을 듣고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게 자신의 무역 사업보다 중요하지는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루엘레는 아마 그것까지 모두 계산하고서 황제의 수족과 같은 펠레타 공작과 접선하고, 그곳에서 타인 공작을 칠 만한 증거를 모두 수집한 뒤 돌아온 것이리라. 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서는 그동안 본 적이 없던 승리의 자신감이 읽혔다.
대체 저 아이가 언제부터 황제 측과 접선하기 시작했을까. 테오라도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많은 생각이 흘러 지나갔다. 그는 타이누에서 이루어졌을 만남이 처음일 리 없다고 짐작했다.
‘황제 폐하와 펠레타 공작은 대체 언제부터 타인 가와 공작을 주시하고 있었나.’
황제가 이번 서부 몬스터 토벌 건을 통해 그저 마병단에게 힘을 실어 주려 하고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 우습게도, 프루엘레는 자신의 아버지 또한 아페토 공작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을 테오라도에게 똑똑히 일러 주었다.
황제의 수족처럼 움직이며 목숨을 다해 황족을 모셨다는 오랜 옛날의 황궁기사단과 달리, 평균적으로 하향된 실력만큼이나 많은 부분이 변질된 현재의 황궁기사단은 황제와 황족에게 모든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하지는 않는다. 그 역할은 다른 집단들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하지만 테오라도 반 타인에게는 어린 시절, 황자들과 같은 스승 아래서 검을 배우며 도움을 준 경험이 있었다.
그는 현재 태양궁 내에 칩거해 있는 황제의 이빨과 발톱이 본디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그의 형제 펠레타 공작은 또 얼마나 검에 재능이 넘쳤으며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자였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자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자신이 황궁기사단장에 임명되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안다고 생각했음에도… 코앞에 바로 검 끝이 들어오기 전까지 몰랐다니.’
단순히 무역 사업에 욕심을 내는 타인 공작 때문에 조금 귀찮다 여겼던 일이 설마 이런 식으로 눈덩이처럼 커져 돌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테오라도는 검처럼 예리한 미소로 자신을 보고 있는 프루엘레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다. 협력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나까지 손에 넣은 뒤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네가 다음 타인 공작이 될 셈인가?”
“아뇨.”
짧게 답하는 프루엘레의 얼굴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타인 공작은 프리실라가 될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질문을 들은 순간, 묘하게도 프루엘레의 긴장감 가득했던 미소가 처음으로 조금 누그러졌다.
“저는 다른 곳으로 갈 겁니다. 제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곳으로요.”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테오라도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심한 눈으로 프루엘레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럼 지금부터 내가 무엇을 하면 될지 말해 보거라.”
***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치안관리단을 발견하고 바람을 밟아 뛰는 움직임에 더욱 힘을 박찼다.
“유더!”
열린 창가에 서 있던 에버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