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거추장스럽던 예복 상의까지 벗어던지고 빛을 반사하지 않는 재질로 뒤바뀐 망토를 그 위에 다시 걸치자, 본래는 핀으로 고정되어 장식용으로 자락을 잡아 둔 천처럼 보였던 부분이 펼쳐지며 후드가 드러났다.
위부터 아래까지 전부 검은 옷으로 감싸고 후드를 덮어 쓴 유더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좋아. 완벽하게 밤손님 같군. 누구도 파티장에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키시아르가 유더의 얼굴을 가린 후드 자락을 정돈해 주며 장난스레 웃었다. 유더는 창을 열고 주변을 순찰하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대로 훌쩍 창틀 위쪽을 붙잡고 몸을 날려 올라섰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게. 내가 여기서 얼마나 오래 놀아났는지에 대한 소문은 모두 보좌가 언제 돌아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잊지 말고.”
유더가 벗어놓은 예복 상의를 팔에 걸친 키시아르가 나긋하게 손가락을 흔들며 키스를 날렸다.
이야기 속의 공주님이라도 된 듯한 모습에 기껏 끌어올린 감각이 잠시 흐트러질 뻔했다. 유더는 고개만 잠자코 한 번 끄덕인 뒤 바람을 밟고서 지붕 위까지 높이 뛰어올랐다.
오늘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치안 관리단에 있는 이들이 경매장을, 별저에 남은 이들은 파티장을 담당하여 나그란의 별과 타인 공작의 비밀 무역 관련자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병력이 집중되어 있어 안전한 파티장과 달리, 경매장 쪽은 오로지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만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위험도가 몹시 높았다.
그 점을 감안하여 더 많은 인원을 치안 관리단에 보내 두기로 했다지만 남국인 상인들이라는 변수까지 끼어든 지금은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는 데에 키시아르를 포함한 모두가 동의했다.
때문에 가장 빠른 기동력과 믿을 만한 실력을 지닌 한 사람이 두 집단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언제 변할지 모를 상황 속에서 다른 이들의 이목을 어지럽히고 전력을 보태는 특수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강대한 힘을 되찾은 단장보좌 유더 아일이었다.
오늘의 모든 것은 일주일 전, 프루엘레가 명단을 완성하고 파티 일정을 빼내 건네준 순간부터 짜인 완벽한 한 편의 연극과 같았다.
유더는 우선 키시아르의 파트너가 되어 파티에 참석한 뒤, 춤을 추지 못하는 척을 하며 마티와 접선해 본저 주변의 정보를 파악했다. 그동안 키시아르는 남작부인과 춤을 추며 귀족들의 시선을 기가 막히게 붙잡아 두었다.
귀족들은 남작부인과 춤을 추는 키시아르를 외면하고 휴게실로 향하는 유더와 그를 뒤쫓아가는 펠레타 공작의 모습에서 흥미진진한 가십거리를 향한 저열한 흥분만을 느꼈을 뿐, 그들이 안에서 무얼 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쯤은 누구 할 것 없이 모여 작은 휴게실 안에서 얼마나 음탕한 행위가 벌어지고 있을지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유더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키시아르가 휴게실에서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별저에서 제 검을 회수하여 치안 관리단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게 다음 목표였다.
유더는 파티장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걸음 하나하나와 술을 마시는 속도까지 완벽히 알려주던 키시아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빌름 남작이 사라지고, 그에 맞추어 키시아르가 남작부인과 춤을 시작하고,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뒤에 둘이 함께 휴게실에 처박히는 모습을 보여주어 누구도 그가 부재했다는 사실을 의심치 못하도록 깊은 인상을 남긴 것까지, 무엇 하나 키시아르 라 오르가 사전에 예상한 부분과 다른 곳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그가 주무른 판 위의 말들이었다.
심지어 유더 아일이 최대한 말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 부분까지 사전에 지시한 부분임을 안다면 파티장의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겠지. 유더는 희미하게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새삼스럽지만 그런 곳까지 고려했다는 점에서 유더는 그 사내가 여태 살아왔을 궤적을 조금 엿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타인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곳까지 먼저 살펴야만 한다는 거겠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서 순식간에 별저가 위치한 곳까지 건너온 유더는 모습을 가리기 좋은 나무 위에 착지하여 가볍게 숨을 골랐다. 대부분의 경비 인력이 본저와 출입구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오기는 쉬웠다.
그가 손을 내뻗어 힘을 발하자,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는 바람이 정원 전체를 쓸고 지나가며 풀숲을 뒤흔들었다.
“유더?”
잠시 후 신호를 받은 누군가가 나타났다. 작고 사랑스럽지만 악동 같은 눈동자를 지닌 푸른 머리칼의 소년, 핀 엘더였다.
핀은 나무 위에 선 유더를 올려다보고는 씩 웃으며 들고 있던 긴 검을 흔들었다. 유더의 숙소에서 가져온 그의 검이었다. 유더가 나무에서 뛰어내리려 하자 고개를 저은 핀이 작게 목소리를 냈다.
“안 돼. 거기 잠깐만 있어 봐. 능력으로 줄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핀의 손 안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며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이 사라졌다가는 유더의 손 안에서 다시 나타났다.
대삼림에서 검집이 부서진 이래 평범한 임시 검집 속에서 내내 잠들어 있던 그것을 오랜만에 손에 쥐자 피가 뜨겁게 도는 기분이 들었다. 유더는 검을 익숙하게 허리에 차며 입을 열었다.
“혼자서 쓰는 이동 능력인데도 둘이 쓸 때와 속도가 비슷한 것 같네. 연습을 많이 했구나.”
“역시 유더라면 알아줄 줄 알았어! 내가 그간 얼마나 노력했다고. 믿음이 막 솟지?”
핀이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런데… 아까 보낸 신호는 뭐였어?”
“아. 그동안 목표들 주변을 살피던 도중에 들은 이야기들을 알려주려고. 별 건 없지만 오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알려주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더라고.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할 테니까 말로 하기보다는 써서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검집 안에 슬쩍 넣어놨거든? 가면서 봐.”
그 말에 검집을 내려다보자, 손잡이에 묶인 이논의 붉은 끈 끄트머리에 조그마한 천조각이 하나 더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고마워.”
“고맙지? 응? 그러니까 그 안에 든 정보가 별 것 없다고 영입 제안 취소하면 안 돼? 그놈들, 각성자라더니 얼마나 철저한지 움직이는 것도 별로 못 봤단 말야.”
내심 그 부분을 가장 걱정했던 듯한 핀의 천진하고 태연자약한 모습에 저절로 희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앗! 그리고 알려줄 게 하나 더 있어.”
“뭔데?”
핀이 으음 하는 소리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칸나가 드디어 돌아왔는데… 지금은 여기 없어.”
“칸나가? 지금 없다는 건 무슨 뜻이야?”
“아까 파티 참석자들이 한창 마차를 타고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오려다 쫓겨난 마차가 하나 있었거든. 그런데 그 마차가 대삼림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온 거였다고 하더라고.”
칸나는 본래 대삼림에서 더 빨리 이곳으로 왔어야 했으나 마력의 샘 유적지 아래에서 마정석 광맥이 발견되며 상황이 예상과 다른 국면으로 변화하면서 일정이 늦어졌다. 그 일이 끝나는 대로 진짜 출발할 예정이라는 보고는 들었지만 걸리는 시간 때문에 이번 일이 끝나기까지 오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도착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가 뒤늦게 나갔지만 이미 그 마차가 치안 관리단 쪽으로 갔다는 말만 듣고 다시 돌아왔는데, 그때서야 칸나가 보냈던 전서조가 왔지 뭐야. 중간에 전서조가 오는 길이 조금 꼬여서 연락이 엇갈린 것 같아.”
‘이건… 반가운 변수군.’
“알려줘서 고마워.”
“이제 갈 거지?”
“응.”
“좋겠다. 나도 여기서 올지 안 올지 모를 놈들 기다리는 것보단 치안 관리단 쪽으로 더 가고 싶었는데.”
“대신 너는 너밖에 할 수 없는 능력으로 날 도와줄 거잖아.”
솔직하게 부러워하던 핀이 제 앞으로 뛰어내린 유더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소년의 얼굴 위로 쑥스러우면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악동다운 표정이 떠올랐다.
“응. 그렇지.”
핀 엘더가 유더에게 검을 건네주러 나온 건 단순한 친분 때문이 아니라 그가 혼자서도 이동 능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포함된 계획의 일부였다.
유더를 향해 팔을 벌린 핀이 눈을 감고 힘을 발했다.
“나만 믿어. 누구한테도 안 들키고 완벽하게 저택 밖으로 내보내줄 테니까!”
땀이 비오듯 솟아난 작은 얼굴 위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흘러나왔다. 그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지며 유더를 뒤덮은 순간, 보이지 않는 이끌림이 발생하며 무언가가 몸을 빨아들이는 감각이 찾아들었다.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뜬 유더는 자신이 어느새 정말로 빌름 가의 저택 밖에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저택 후문을 수도 없이 빽빽하게 감싼 기사들과 병사들은 누군가 안에서 불쑥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더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지붕 위로 몸을 날리는 그의 움직임에서 망설임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