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무겁고 격식 있는 다른 파티와 달리, 오늘 열린 것과 같은 자선 모금이나 친지들간의 교류만을 목적으로 한 파티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부인들이 진행을 책임진다. 때문에 손님들에게 인사만 마친 빌름 남작이 사라졌어도 남작 부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그 사실을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춤을 추는 것이 중요한 일정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실제로 첫 곡이 시작되자마자 춤을 추러 나선 이들은 대부분 기운 넘치는 젊은이들뿐이었다. 나이가 든 이들은 대부분 점잖게 대화를 나누거나 홀 곳곳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예술품들을 감상하는 일에 더욱 열중했다.
하지만 노는 것을 밥 먹기보다 좋아하기로 소문난 펠레타 공작이라면 어떨까.
“좋은 음악이 나오니 몸이 근질거리는군.”
키시아르가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입을 열자마자 주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유더에게 쏠렸다. 춤 따위는 모를 평민 놈이 과연 여기서까지 공작에게 달라붙어 있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눈빛들이 몸을 찌르는 듯했다.
유더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일부러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저는… 잠시 저쪽에 가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게.”
키시아르가 선뜻 허락하자 귀족들의 시선 속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웃음이 섞였다. 유더는 주변을 둘러보던 키시아르가 이내 홀로 있는 빌름 남작부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며 등을 돌렸다. 그러자마자 여태 키시아르의 곁에 있던 이들 중 몇몇이 다가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오 이보게. 유데… 알 경이라 했었나? 대삼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내가 조금 듣고 싶은 것이 있는데…….”
유더 아일이다, 멍청한 놈아.
유더는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차가운 욕을 하며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어렵겠습니다.” 하는 말만을 남기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어 그를 붙잡은 다른 이들의 용건도 마찬가지로 뿌리치고 홀이 보이지 않는 구역까지 빠져나가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자격지심 가득한 평민의 도망처럼 보였다.
제깟 놈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들어와 보았자 결국 저 정도가 한계라 소근대는 목소리가 즐겁게도 흘러나왔다. 유더는 그 목소리들을 뒤로하고서 파티 도중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둔 작고 아름다운 음식들이 가득 쌓인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한껏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둔 음식들이건만,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이곳까지 거의 오지 않았다. 주변에 드나드는 이들이라고는 아무도 먹지 않는 음식을 나르기 위해 바삐 오가는 하인들 뿐이었다.
유더는 네모나게 구운 얇은 과자 위에 생크림과 과일을 올려 만든 한입 크기의 음식이 담긴 3단 접시 앞에 서서 밝은 금빛 술잔 하나를 집어 들어 입술을 축였다. 때마침 그 접시에 새로운 음식을 추가하기 위해 온 하녀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유더의 곁에 섰다.
“아는 음식이 하나도 없군요.”
잔으로 입술을 가린 채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유더의 목소리에 하녀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긴 머리칼을 틀어 올려 모자 안에 넣은 하녀는 제국에서 흔히 보기 힘든 밝은 잿빛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그 하녀는 다름 아닌, 기억을 잃고서 떠돌다 마병단에게 구해졌던 나그란의 별 마을 출신 비각성자 마티였다.
“다들 그렇죠.”
마티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속삭였다. 유더는 시선을 여전히 테이블 위에 고정한 상태로 주변을 따라 걸음을 조금씩 옮겼다.
“이 불쌍한 음식들을 만들도록 명하셨을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실지.”
“이곳에 올라오기 전, 집사가 망토를 두른 누군가를 공손히 모시고 후원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죠.”
싸늘히 대답하는 동안에도 마티는 계속해서 음식을 놓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정리하기를 반복했다. 멀리서 보아서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터였다.
“이 테이블의 접시가 하나라도 비워지는 게 빠를지, 바깥에 세워진 마차들이 사라지는 게 빠를지 궁금하군요.”
“안타깝게도 벌써 3대가 사라졌으니 내기하실 일은 없겠네요.”
“3대나.”
“날개가 넷 달린 새, 끝이 갈라진 검, 잎이 붉은 새싹.”
말을 마침과 동시에 새로운 하녀가 또 다른 접시를 들고서 나타났다. 마티는 유더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태연하게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갔다.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하녀 따위에게 눈길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더는 잔을 들고서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춤을 추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자 또다시 저열한 눈빛들이 재미있는 유희거리라도 기대하듯 달려들었다.
어느덧 하나의 곡이 끝나고, 키시아르가 남작 부인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대어 인사하는 중이었다.
“이리도 멋지게 춤을 즐기는 분을 두고서, 남작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다음 춤은 남작과 추어야 하지 않겠나?”
“아……. 아닙니다. 남편은 잠시 딸아이들을 보러 자리를 비운 터라…….”
남편의 이야기가 나오자 춤을 추는 동안 반쯤 몽롱해져 있었던 남작 부인의 눈빛에 미약한 불안과 경계가 겨우 떠올랐다.
“그런가? 나중에 돌아오면 부인과의 첫 춤을 즐길 기회를 빼앗아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어.”
키시아르가 유쾌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유더는 거기까지 본 뒤 몸을 돌려 멀지 않은 곳에 마련된 빈 휴게실로 향했다. 이 상황이 너무나 흥미진진해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뒤통수로 따라붙었다.
들어서자마자 큰 창문이 보이는 어둑한 휴게실 안에는 커튼을 칠 수 있는 침대와 유독 푹신한 소파가 있어 작은 침실 같은 인상을 짙게 풍겼다. 바깥보다 불을 훨씬 어둡게 밝힌 이유는 휴식을 취할 손님들의 편안함을 위해서라지만, 실제로는 파티 도중 밀회를 즐기는 이들이 정체를 숨길 때 더욱 유용하게 쓰인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유더는 달빛이 밝게 내리쬐는 창을 바라보며 소파에 걸터앉아 손에 든 술을 홀짝였다. 그에게는 물이나 다름없는 술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도수가 높았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느리지만 규칙적인 속도를 지키며 세 번째로 입에 머금은 술을 목 안으로 넘기자마자 문이 열리고 익숙한 향이 훅 풍겼다. 유더를 덮치듯 다가온 그림자가 소파를 푹 꺼뜨리며 입을 맞춤과 동시에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조그만 틈새를 타고 흘러 들어오던 온갖 경악 어린 탄성과 익숙한 수군거림도 드디어 모두 사라졌다.
“……하아.”
강렬하게 파고든 침입자는 술로 젖은 혀를 깊숙이 얽어 빨아들인 뒤 떨어졌다. 고작 몇 초나 될까 싶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몰아쉬는 호흡 속에 스민 열기는 어느 때보다도 뜨겁기 그지없었다.
유더는 단 한 번도 감지 않고 있던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제게서 떨어져 나가는 키시아르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불꽃 같은 열기가 타오르던 두 쌍의 눈동자 사이로 문득 부드러운 웃음이 툭 터졌다.
“바깥은 어떻다고 하던가.”
“현재까지 이곳에 나그란의 별이 침입한 기색은 없다고 합니다. 빌름 남작은 예상대로 치안 관리단으로 향했고, 참석한 이들 중 체어스, 벨프란트, 케텔 세 가문이 벌써 마차를 빼고 빠져나갔습니다.”
“작년 명단에 있던 자들부터 잘 빠져나가는군.”
“예.”
키시아르의 젖은 입술 위로 차가운 미소가 맴돌다 사라졌다.
“당일에 와서 혹 갑작스레 일하는 이들의 정체를 의심할까 조금 염려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어.”
“마티와 다른 이들을 의심한다면 프루엘레 공자님을 의심하는 꼴이 될 테니 그럴 수 없겠지요.”
오늘 빌름 가에서 열린 파티에는 마티를 비롯하여 기억을 잃었다 되찾은 비각성자들이 다수 임시 일손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나한과 나그란의 별이 몰래 침입할 경우 정체를 알아보고, 또 경매를 위해 빠져나가는 이들과 빌름 가 사람들의 동태를 소리 없이 감시하는 역을 기꺼이 자처하여 맡아 주었다.
프루엘레와 그가 신세를 진 정보 제공자들의 이름을 팔자 빌름 남작은 조금도 그들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인으로 잠입하여 기억 잃은 이들을 찾으려 했던 로벨의 사건 때문에 경계가 거세리라 짐작했던 유더조차 맥이 빠질 만큼 손쉽게도 말이다.
‘마티가 기억력이 무척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었어.’
한번 기억을 전부 잃었다가도 제일 먼저 되찾았을 만큼 강한 의지력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티는 누구보다 빠르게 빌름 가에 방문하는 가문들의 문장을 외우고 자신이 할 일을 철저히 암기했다. 얼굴이 이미 팔린 덕에 그녀처럼 저택 쪽에 잠입하지 못하고 경매장 대비 쪽으로 빠진 로벨이 몹시 불안해하며 걱정했다는 말을 루산에게 전해 들었으나, 아까 마주쳐 대화를 나눌 때의 모습을 보아서는 역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러면 이제… 보좌의 차례군.”
유더가 들고 있던 잔을 건네받은 키시아르가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의 망토를 벗겨 주었다. 그것은 거꾸로 뒤집으면 재질과 생김새가 바뀌는 특수한 망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