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07화 (407/805)

407화

드디어 많은 이들을 궁금하게 했던 이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미처 다 감추지 못한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서, 빛나는 금발을 지닌 사내가 당당히 걸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키시아르 라 오르가 훌륭한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그를 본 건 처음인 자가 대다수였다. 소문이란 본디 바람이 불면 불수록 커지는 황야의 회전초 덩어리와 같아 믿을 수 없다 여겼던 대부분의 이들은 실제 펠레타 공작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잠시 넋을 잃었다.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는 그를 보기 전 했던 어떤 상상과도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단 그는 병약하다는 정보를 떠올리기 힘들 만큼 대단한 장신이었다. 일견 오만해 보일 정도로 당긴 턱 아래, 누구에게도 숙일 필요가 없다는 듯 쭉 편 가슴을 감싼 조끼에 꽂힌 불꽃 문장 핀이 은빛 체인을 단 채 선명히 빛났다.

곧고 완벽한 몸을 감싼 예복 자락이 터질 듯 충만한 생명력을 단정하게 갈무리한 모습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가슴 뛰게 만들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비슷한 예복을 걸친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붙어 있었다. 공작의 팔을 잡고 함께 들어올 때 유더 아일 경이라는 이름도 함께 불렸지만, 키시아르에게 시선이 팔린 이들이 워낙 많아 그의 이름을 제대로 들은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이 고개를 돌려 제 팔을 잡고 있는 사내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머리를 옆으로 슬쩍 기대자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그 사내에게 옮겨 갔다. 그는 공작의 팔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자극적인 소문의 주인공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침착하고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펠레타 공작만큼 화려한 미모를 지니지도, 그렇다고 눈에 띄는 보석이나 옷을 걸친 것도 아님에도 그 사내가 지닌 그늘진 서늘함은 한번 인식한 순간부터 묘하게 줄곧 시선을 끌었다.

‘저자가 늘 펠레타 공작의 곁을 따라다닌다는 그 평민 애인인가?’

‘침실까지 함께 쓴다는 그……?’

소문과 달리 검은 머리 사내는 조금도 평민 출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상상과 다른 모습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마치 그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공작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때, 겨우 먼저 정신을 차린 빌름 남작이 앞으로 나서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펠레타 공작 전하. 태양신의 축복을 받은 분께서 뜻깊은 자선 파티에 참석하여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빌름 남작. 신검을 함께 본 이후 줄곧 바빠 보여서 걱정했다네. 건강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기쁘군.”

신검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분위기가 변했다. 펠레타 공작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스스로 신검 오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부 신전의 노사제들이 모두 신검의 기적을 보았다는 말이 정말이었나.’

‘빌름 남작도 아무 말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가능하면 그 소문의 진의를 숨기고자 했던 빌름 남작이 눈썹을 푸르르 떨었으나, 이내 억지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파티 준비로 워낙 정신이 없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검을 보고 감격하던 자네의 얼굴이 아직도 때때로 생각난다네. 신께서도 자네의 신앙심을 의심치 못할 거야. 내가 떠나기 전이라면 한 번 정도는 더 그때와 같은 시간을 가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지 뭔가.”

원한다면 언제든 말하라며 태연하게 웃는 키시아르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진 빌름 남작이 고개를 돌려 유더를 보았다. 유더는 시선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고개를 대충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으흠. 흠.”

그간의 사건들로 인해 빌름 남작의 안에서 유더 아일에 대한 평은 이제 ‘실력은 있으나 운 없이 펠레타 공작의 눈에 띄어 노리개가 된 평민 놈’에서 ‘아무래도 펠레타 공작의 장난감 노릇을 영광으로 아는 듯한 멍청한 평민 놈’ 정도로 바뀐 상태였다.

인사를 무시하고 대충 헛기침을 하며 돌아서려던 남작은 문득 유더의 눈이 뭔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눈이……?”

“오. 남작은 역시 관찰력이 좋군그래. 내 보좌의 왼쪽 눈에 남아 있던 부상의 흔적이 드디어 모두 나았지 뭔가. 대삼림의 영웅에게는 신께서도 자비로우시니 모두 함께 축하할 일이지.”

키시아르가 끼어들어 큰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기에 유더는 아무 답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순간 그들의 주변에 둘러서 있던 이들 사이로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술렁임이 번졌다. 대삼림의 영웅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모두 알았던 탓이었다.

펠레타 공작의 곁에 있던 사내가 그저 운 좋게 눈에 든 남첩이 아니라, 홀로 대삼림의 거대한 몬스터를 쓰러트렸다는 소문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이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묘한 눈빛이 오고 가며 이전과는 다른 시선이 유더에게 쏠렸다.

유더는 그 눈빛들을 무시하며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삼켰다.

‘전부 똑같은 수순이군.’

유더가 대삼림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의 반응은 모두 같았다. 처음에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굴다가, 그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쓸만하고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눈빛으로 변한다. 다음 순서는 제게 다가와 타인 공작 측에 붙을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던 빌름 남작의 수순을 그대로 밟을 것이라는 데에 돈이라도 걸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까지도 결국 빌름 남작처럼 되겠지.’

“아, 그…러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기쁘시겠…군요.”

“그렇다네.”

고민 따위는 없어 보이는 얼굴로 웃는 키시아르의 뒤편에서 바쁘게 다가온 하인 한 명이 빌름 남작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유더는 빌름 남작의 눈빛이 소리 없이 변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 저는 다른 손님들에게도 인사를 드려야 하니 이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이곳에 오신 분들은 모두 서부를 지탱하는 훌륭한 가문의 일원들이시며, 제국을 향한 넘치는 충심과 어려운 이들을 위한 동정심을 지닌 분들이시니 이야기를 나누시기에 모자람 없이 즐거우실 것입니다.”

빌름 남작은 마음에도 없는 축하를 건넨 뒤, 서둘러 멀어졌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참으로 바빠 보이는군.”

키시아르가 남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뼈가 담긴 말을 중얼거렸다.

빌름 남작이 떠난 자리는 하이에나 같은 눈빛을 감추지 않은 귀족들이 채웠다. 그들의 말은 언뜻 예의바른 질문처럼 들렸지만, 예쁘게 포장된 사교적 수식어들을 제거하고 보면 결국에는 정보가 될 만한 말들을 이끌어 내려 찔러 대는 무례한 칼날들일 뿐이었다.

키시아르와 유더를 둘러싼 소문의 허점을 알아내고 싶어 안달이 난 듯 보이는 자들의 웃음 띤 맹공에도 키시아르는 태연했다. 그는 상대가 노리는 바를 내주는 듯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화제를 매끄럽게 바꾸어 저열한 속내를 우스꽝스럽게 드러나게 만드는 화술이 탁월했다.

‘이 자리에 말로 키시아르를 이길 자가 있을 리 없지.’

한 번 죽고 돌아온 유더조차 키시아르를 말로 이길 자신이 없는데, 하물며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야 오죽할까.

처음에는 키시아르의 외모에 놀라 넋이 나갔던 이들은 남자 애인을 옆에 끼고서 예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재차 그를 만만히 본 모양이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 우스운 꼴이 되는 건 자신들임을 몰랐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꼴을 보였는지 뒤늦게 깨닫고 분노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그럼에도 마냥 악의가 없어 보이는 태도 때문에 직접적으로 항의하기에는 무엇하게 만드는 것도 키시아르의 남다른 재주였다.

‘마치 이 자리 전체가 거대한 전술 게임판이라도 된 것 같군.’

곁에서 지켜보니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여러 가지 말을 기상천외하게 사용하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치고 빠지기를 사용하던 그의 전술은 지금도 변함없이 같았다.

예전에는 이런 자리가 정말 싫었다. 할 일은 많은데 아까운 시간을 버리는 행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고, 악의 가득한 말들을 무시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제법 피로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같은 자리에 서서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귀족들을 물 먹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이런 식으로 파티에 참여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군.’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열렸던 작은 모임들이나 수확철 축제 때 열린 파티 때는 키시아르가 이런 식으로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은 키시아르 라 오르가 서부의 모든 이들 앞에서 그간 떠돌아다닌 모든 소문을 긍정하고, 그럼에도 쭉정이 공작이라는 인식은 그대로 유지하여 이번 일을 손쉽게 진행하게 할 필요가 있는 어려운 자리였다.

“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빌름 남작의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능숙한 모습으로 귀빈들 앞에 나서서 인사를 했고, 오늘 열릴 자선 파티의 의의를 설명했다. 훌륭한 식사와 의미 깊은 음악을 감상하고 나서 서부 지역의 발전을 위한 모금을 해 달라는 짧은 연설을 기품 있게 끝내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춤곡이 시작되는 순간, 유더는 빌름 남작이 어느새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나갔군.’

그렇다면 이제 이쪽도 나설 때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