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제가 거기에 다녀왔다는 게요.”
아침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온 에버는 간밤에 유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때문에 검은 얼룩이 사라지고 깨끗이 나은 눈을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흔쾌한 얼굴로 축하해 주었다.
그 뒤 이어진 것은 어젯밤 그녀가 프루엘레와 함께 찾아낸 치안관리단 지하 감옥 4층의 진상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프루엘레 공자께서 그리 적극적으로 나서 주실 줄 생각지도 못해서, 단장님과 유더가 오고 나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에버는 앞서 치안 관리단에 몰래 방문한 빌름 남작을 미행하여 지하 4층이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곳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피의 보호’라는 오래된 고대 마법을 뚫어야 했다.
그곳에 마법을 건 마법사의 혈육만이 문을 열 수 있는 고대 마법의 출입 장치는 유더가 발견했던 감옥 3층 벽, 타인 가의 문장이 새겨진 곳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에버는 빌름 남작이 그곳에서 빠져나온 뒤 문장 근처에 미처 닦지 못한 피가 묻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프루엘레에게 피를 내어 줄 수 있느냐고 곧장 요청하기에는 그의 신분이 여러모로 껄끄러웠다.
아무리 그녀에게 대단히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마병단 입단을 꿈이라 말하는 예의 바른 청년이라지만 그래도 프루엘레 반 타인은 타고난 귀족이었고 타인 가의 핏줄이었다. 때문에 에버는 신중을 기하여 키시아르가 창고 쪽 일을 끝내고 합류하고 나서 일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점점 사라져 가는 여유 시간 속에서 고민하는 그녀를 설득한 이는 놀랍게도 프루엘레였다.
‘벡 부단장님께 아무래도 제 각오의 크기를 보여 드려야겠군요.’
그는 몸소 손바닥을 단검으로 그었다. 흐르는 피를 벽에 새겨진 타인 가의 문장에 서슴없이 문지르고 주변에 피를 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의 땅이 움직이며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숨겨진 계단이 드러났다.
“감옥 4층의 옥에는 정말로 사람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갇힌 이를 강제로 잠들게 만드는 마법진이 있어 처음에는 시체가 쌓여 있는 줄 알고 정말 놀랐지만… 유일하게 깨어 있던 사람을 만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죠.”
그는 형제와 함께 잡혀 온 이로, 운 좋게도 마법진이 조금 훼손된 구역에 묶여 있었기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에버와 프루엘레는 그에게서 그 감옥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비밀 감옥은 열쇠가 아닌 특수한 방법으로만 열고 닫을 수 있었으며, 에버가 전력을 다해 힘을 쓴 주먹으로도 깰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린 상태였다.
“그곳에 잠들어 있는 이들은 며칠에 한 번 찾아오는 빌름 남작에 의해서만 잠시 깨어나 음식을 섭취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기하게도 그 안에 있으면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낄 수 없다는 듯했어요.”
“잠든 동안에는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고 시끄럽게 굴지도 않으며 탈출을 모색할 틈도 없으니 사람을 숨기기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장소였겠군.”
“대체 그렇게 무섭고 역겨운 비밀 감옥을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요.”
유더는 지하 감옥 4층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고 보고를 이어 나가는 에버에게 물었다.
“에버. 정보를 주었다는 그 사람이 계속 소리를 내어 4층의 존재를 알린 각성자입니까?”
“맞아요. 예상대로 소리를 다룰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더군요.”
탈출에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능력이었지만 내보낸 구조의 요청을 쉽사리 귀신 소리라 여기지 않은 유더가 있었기에 그는 마병단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감옥과 관련된 사항 이외에도 그동안 빌름 남작에게서 주워들은 정보를 에버와 프루엘레에게 아낌없이 알려 주었고, 탈출을 위해 마병단의 계획에 절대적으로 협조할 것임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단장님께서 주신 열매를 삼키게 했습니다.”
키시아르가 이번 임무를 대비하여 핀 엘더를 통해 에버에게 건네준 열매는 먹은 이의 추적을 용이하게 하는 물건이었다. 본래는 개를 풀어 추적하는 용도이나 치안 관리단에 있는 마병단원들 중에는 때마침 개보다도 뛰어난 후각 능력을 지닌 단원이 몇 명 존재했다.
‘경매를 앞두고 빌름 남작은 반드시 거기 갇힌 이들을 빼내러 오겠지. 마병단이 나서는 것도 바로 그때다.’
프루엘레와 에버가 임무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고 나서도 빌름 남작은 아직까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내가 없었는데도 적절한 상황 판단으로 잘 해내었어. 덕분에 든든하군.”
“도와주신 프루엘레 공자님 덕분이지요.”
에버는 아무래도 이번 일로 인해 프루엘레의 인상을 몹시 좋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프루엘레가 들었다면 몹시 기뻐했을 말이지만 그는 불행히도 이곳에 없었다. 막바지에 이른 정보 수집을 마무리 짓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제는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치안 관리단으로 오지 못하신 건가요? 사정이 생겼다는 말만 들어서 몹시 걱정했습니다.”
“하하. 이쪽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제법 많았다네.”
키시아르에게서 어젯밤 창고에서 일어난 일을 들은 에버는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한편, 남국인 상인들의 정보에 몹시 심각하게 반응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은 모두 끝내고 나오셨다니 정말 다행이지만… 그런 실력을 지닌 각성자들이 타인 공작의 측근이라니 걱정이 되네요. 프루엘레 공자께서는 그들이 각성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시는 듯했는데요.”
“나는 프루엘레 공자뿐 아니라 빌름 남작과 타인 공작도 그들이 각성자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데 걸고 싶군. 알았다면 그러한 신뢰 관계를 결코 구축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 생각은 어제 유더 또한 했었다.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들이 한낱 상인이라는 건 쉬이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신경 쓰입니다.”
“다행히도 어제의 싸움을 통해 짚이는 부분이 생기기는 했지.”
유더의 중얼거림에 키시아르가 느긋이 대답했다.
“혹 어제 칼라네사 자루에 물을 뿌렸을 때, 그자가 자루를 보호하려 했던 모습을 보았나?”
“예.”
기억하지 못할 리 있겠는가. 나단과 키시아르를 연달아 상대하면서 주변의 물건들이 몇 개가 부서지든 신경조차 쓰지 않던 남국인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보호하려 한 게 바로 그때였다. 물론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은 선반을 제외하면 이미 모조리 바꿔치기당한 뒤였다지만 남국인 상인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은 사라인 대삼림을 거쳐 타인 공작이 비밀스럽게 가져온 것들이지. 그렇다면 그것들은 어디서 왔을까.”
“사라인 대삼림을 통해 교역하는 물건들은 대부분 대삼림과 국경이 걸쳐 있는 나라들에서 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건 그 물건들의 마지막 행선지가 서쪽의 타국들이었다는 것뿐, 첫 번째 출발지라는 뜻은 아니야.”
수수께끼를 내듯 대답한 키시아르가 유더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칼라네사의 원료는 칼라인이라는 꽃이라네. 그리고 그 꽃이 잘 자라는 기후는 뜨겁고 건조한 기후지.”
대륙에서 가장 뜨겁고 건조한 기후를 지닌 곳은 하나뿐이었다. 사막 이남에 존재하는 드넓고도 먼 나라, 남국이었다.
“제국은 물론이고 주변의 타국에서도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퍼지지 않은 약을 이토록 대량으로 들여오려면 당연히 원산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들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차가운 미소를 흘린 키시아르를 보며 유더의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그렇다면… 빌름 남작과 타인 공작이 어젯밤 일어난 소란을 모르는 듯 보였고, 술집의 반응도 내내 조용했다는 보고도 그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겠군요.”
“나는 그럴 것이라 생각하네.”
키시아르가 칭찬의 눈빛을 건네며 대답했다.
“어젯밤 일어난 사건을 아무도 모르도록 숨길 수 있고, 그럼으로써 뭔가를 얻을 수 있을 듯 보이는 세력은 현재 하나뿐 아닌가.”
부서진 물건들이 그토록 많았는데도 숨겨서 될 일이라 판단했다는 건, 물건을 가짜로 바꿔치기한 게 들통나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국인 상인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타인 공작의 물건을 옮기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사실상 중요히 여기는 것은 칼라네사 가루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걸 들여와 유통하여 얻는 이득이 타인 공작보다 그자들 쪽으로 많이 가도록 수를 써 두었거나, 혹은 타인 공작에게는 약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자신들이 크게 한탕 해먹을 셈으로 온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경우 쓸데없이 소란을 크게 떨어 공작의 신뢰를 잃고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정말 끔찍한 자들이네요. 그런 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국으로 들여와 팔아치우려 하다니…….”
칼라네사 가루가 어떤 위력을 지닌 마약인지 키시아르에게서 들은 에버가 그것이 퍼졌을지도 모를 상황을 상상했는지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그래. 걸리는 점은 좀 더 있지만 아직은 답을 확실히 알 수 없네. 때문에 가능하면 이번에 그자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면 좋겠군.”
“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낯선 하인이었지만, 그의 모습은 이내 프루엘레 반 타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에버가 아직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가는 이내 키시아르에게 작게 말린 종이 뭉치를 공손히 내밀었다.
“간밤 평온하셨습니까, 전하? 작년에 열린 파티 때 이곳에 온 이들의 명단을 드디어 모두 완성하여 가져왔습니다.”
“어제 치안관리단에 다녀오느라 바빴을 텐데 그 와중에 이것까지 완성했나?”
“이미 주변의 정보는 다 취합해 둔 상황이었고, 빌름 남작이 파티 날짜를 확정하여 초대장을 발송할 때 마지막 확인만 거치면 되었기에 그리 고생하지는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대답한 프루엘레는 빠르게 종이를 읽기 시작한 키시아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긴장한 눈빛을 지었다. 자신이 가져온 정보와 노력이 드디어 마지막 평가를 받을 때였다.
“……음.”
“어떠십니까.”
“훌륭하군.”
뒷장까지 빽빽이 적힌 글을 모두 읽은 키시아르가 종이를 내려놓으며 칭찬을 건넸다.
“작년 명단과 더불어 올해 초대장을 발송한 이들의 명단, 당시 방문한 남국인 상인들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완벽하게 정리했을 줄이야. 이것만 읽어도 어떤 이의 뒤가 구린지 알아보기 어렵지 않겠어. 일일이 확인하여 기입하느라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프루엘레의 주근깨 어린 콧잔등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면 이제 자네는 이대로 수도로 떠날 예정인가?”
“네. 일을 모두 끝냈고 하루도 더 지체할 수 없으니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떠날까 합니다. 제 동생 니폴렌은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제게 맡겨 주셔야죠.”
에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당당히 끼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프루엘레는 몹시 안심된다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네. 그러겠습니다.”
“듣자 하니 어제 손을 다쳤다던데, 아직 붕대를 감고 있군.”
키시아르의 말대로, 어젯밤 치안관리단 감옥에서 손바닥을 직접 그어 ‘피의 보호’를 용감하게 뚫었다던 프루엘레는 아직도 손수건을 붕대 대신 감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루산 사제를 만나고 가게.”
“아, 아뇨. 그 정도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손이 불편하면 말을 타고 가기 어려울 텐데.”
키시아르의 권유를 들은 붉은 머리칼의 청년은 난감한 듯 눈썹을 누그러뜨렸다가는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상처 자체는 제가 가져온 성수를 사용하여 이미 거의 다 나았고, 이건 그저… 으음, 완전히 치유될 때까지는 보호가 필요하다고 하여 계속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대답을 한 프루엘레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에버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이걸 돌려드리는 건 다음에 뵐 때로 미루어도 괜찮을까요, 벡 부단장님?”
“아, 네. 물론 괜찮고말고요. 먼 길을 가셔야 할 테니 부담 없이 버려 주셔도 괜찮은데…….”
“버리다니요.”
프루엘레가 힘주어 대답했다.
“어제 제게 베풀어 주신 따뜻한 온정의 상징을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꼭 돌려드릴 테니 기다려 주세요.”
에버는 그 목소리 속에 담긴 기이한 열의를 눈치채지 못한 채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 그러면 모두 한시가 바쁠 테니 이제 그만 각자의 일을 시작해 보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시아르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변동이 생기면 언제든 약속된 경로로 연락하도록.”
빌름 남작이 파티 날짜를 확정했다는 건, 곧 비밀 경매의 날짜도 정해졌음을 뜻했다.
‘분명 나한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겠지.’
타인 공작가에 복수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니, 분명 둘 중 어딘가에 나타나 큰 피해를 주고 인신매매를 당한 이들 중 각성자들을 찾아 데려가려 하리라.
하지만 조금도 걱정되거나 두렵지 않았다. 키시아르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모여 할 수 있는 대비를 모두 마쳤다 자신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든, 뜻대로 되지 않을 각오를 하고 와라.’
각오를 다지며, 유더는 지그시 장갑 낀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드디어 활짝 열린 빌름 가의 저택과 타이누 성문 안으로 수많은 마차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