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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04화 (404/805)

404화

분노도, 무엇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들려온 말에 놀라기도 전에, 키시아르가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렇기에 미안하네.”

“무엇이…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변수를 감안하고도, 보좌가 그런 확신을 지닌 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결국 그곳으로 이끈 건 나니까.”

유더는 그를 탓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하여 입을 열려 했다. 모든 건 저 때문이었고, 키시아르가 그의 속내를 짚어 낸 말은 단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유더는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몇 번이고 사죄할 수 있었지만 키시아르를 보다 지치지 않게 하고 어둠 속에서 안전하게 내보내기 위해서라면 마찬가지로 몇 번이고 몸을 태우는 약을 마셨을 것이었다.

키시아르의 눈에 깊숙이 남겨진 상흔을 보았을 때는 잠시 후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도 했다. 그러나 오래전의 꿈을 꾸고 다시 일어난 지금, 그런 감상적인 생각은 이미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게 저였다. 유더 아일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눈빛을 마주하자 그 모든 것을 입 밖에 내기가 어려워졌다. 유더의 머뭇거리는 얼굴을 보며 키시아르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올라갔다.

“이곳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내내 생각해 보았지. 보좌가 옳다 여기는 판단에 따라 약을 마시고 끝내 원하는 바를 쟁취해 냈듯이, 나 또한 몇 번을 같은 처지에 놓이더라도 결국 자네를 그곳에 동행시켰으리라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더군.”

결국 그것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느릿하게 내뱉는 목소리가 열기를 지니고 귓속으로 뜨겁게 파고들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나. 자네에게 했던 말은 곧 나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이기도 한 것을.”

“…….”

“아마 우리가 함께하는 한은 앞으로도 같은 아픔이 계속 반복되겠지. 하지만, 그 사실에 좌절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할 거라면 애초에 무엇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유더는 키시아르가 손안에서 천천히 문지르고 있는 투명한 약병을 내려다보며 그 말을 들었다. 알 듯 말 듯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천천히 소용돌이쳤다.

“그러니 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된다 해도 내게 사과하지 말게. 그게 자네의 다정함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춘 키시아르가 두 눈을 들어 유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용감하게 스스로와 맞서 싸워 이겨낸 이가 고작 나의 아픔 따위를 위로하기 위하여 무릎 꿇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

“자네가 옳다고 여겼던 판단을 그런 식으로 퇴색시키지 말게. 나도 내 아픔을 알아서 내 몫으로 잘 갈무리할 테니.”

“하지만…….”

“내가 가는 길을 언제까지고 함께 가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유더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키시아르에게 약속했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만들어낼 마병단의 미래. 쓸모없고 배척받는 각성자들이 언젠가는 세상에 당연한 존재로 자리 잡는 날. 그 먼 길의 끝까지 함께 가겠노라고.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충분해.”

키시아르의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붉은 눈동자 위로 쉴 새 없이 튀어 오르는 오색 불빛의 그림자가 마치 새해 전야제 때마다 수도에서 열리는 불꽃놀이를 연상케 했다. 그 안타깝고도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움에 유더는 잠시 넋을 잃었다.

달랐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새벽의 그림자가 잠시나마 ‘그날’의 키시아르와 비슷하다 착각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모든 것이 달랐다…….

“왜 그런 얼굴을 하나. 혼나지 않아서 오히려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아이라는 비유를 들을 나이는 지났습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사실은 키시아르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음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키시아르가 화를 내더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에 깊이 새겨진 상흔을 조금이라도 지워 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는데, 예상과 반대의 상황이 닥치자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간단하게 생각하게.”

키시아르가 손을 내밀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고 끌어당기는 대로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결국 살아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살아 있어야 나아갈 수 있다는 것.’

키시아르의 말에 뒤섞여, 같은 목소리이지만 조금 다른 말이 가슴 속 어딘가에서 수면에 일어난 파문처럼 퍼졌다.

‘뭐였지?’

유더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런 말을 키시아르에게 들은 적이 있었던가? 언제였지?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려 했지만 작은 돌이 던진 파문은 금세 찾을 수 없이 가라앉은 뒤였다. 그 흐릿한 흔적을 찾느라 미간을 찌푸린 그의 머리 위에서 키시아르가 손을 잡아 올리며 질문을 건넸다.

“손은 아프지 않나? 루산의 말로는 신성력도 이제는 변화를 거의 주지 못한다던데.”

“아……. 네. 아프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힘을 쓸 때마다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렇군. 아직도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아. 힘이 핏줄 안으로 파고든 건가?”

유더의 손을 잡아 올린 키시아르가 팔 위로 그어진 거무죽죽한 선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손등 위로 숨결이 닿아 움찔한 유더는 반사적으로 사과할 뻔했다가, 제 아픔은 제 몫으로 놓아두라던 말을 떠올리고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그것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눈은?”

“눈도 괜찮습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내 마력이 흘러나온다는 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나?”

유더는 고개를 들어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는 이논에게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도 보고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사실 한쪽 눈이 금색이 되든, 붉은색이 되든 검은 얼룩에 뒤덮여 아예 보이지 않던 때와 비교하면 천국이라 할 만했다. 반쪽이나 줄어들었던 시야가 넓어졌고 거리감을 잃을 일도 사라졌다. 전투 도중에 쓸데없이 시선을 끌지만 않는다면 스스로는 색이 변하는 걸 느낄 수도 없으니 상관없었다.

“혹시… 보여 줄 수 있겠나?”

키시아르가 조심스럽게 청했다. 어려울 것 없었다. 유더가 묵묵히 손가락 하나를 들자마자 허공에서 생성된 물줄기가 손가락 사이를 나선형으로 부드럽게 훑었다. 그와 동시에 왼쪽 눈동자 안쪽에서부터 스르르 금빛이 솟아올랐다.

“되었습니까?”

“그래. 정말로 변했군. 하지만 그때와는 조금 달라.”

처음 눈 색이 변했을 때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할 만큼 환한 빛이 나왔지만 이제 그 정도는 아니었다. 유더는 눈 아래쪽을 향해 손을 뻗어 온 사내 때문에 반사적으로 눈가를 움찔 떨었으나, 얌전히 얼굴을 내어주었다. 서늘한 손끝은 왼쪽 눈 아래쪽에서 눈꼬리를 지나 귓가로, 그리고 다시 거꾸로 같은 길을 지나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제 없애겠습니다.”

“그래.”

유더는 힘을 거두었다. 동시에 금빛 눈동자 또한 사그라졌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시선은 계속해서 같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유더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기분이 묘하군.”

“지나치게 이상하다면 대책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게 있을 때는 그토록 까다롭게만 느껴지던 녀석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아름다워서 말이야.”

“예?”

키시아르는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화제를 돌려 유더가 잠든 동안 처리한 일들을 알려 주는 사이, 그는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이 합류하러 가지 않았음에도 프루엘레와 에버가 지하 4층 감옥으로 통하는 길을 여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 엉망이 되었을 지하창고에도 불구하고 술집은 비정상적으로 평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였으며, 빌름 남작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보였다는 이야기. 나단 주커만이 통로를 나가자마자 무한의 병을 파괴하여 그 안에 잠든 칼라네사 가루들을 영원히 없앴다는 소식.

본래대로라면 그 놀라운 말들에 집중했겠지만, 오늘의 유더는 저답지 않게도 입을 움직이는 키시아르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본래 이런 식으로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머금어 삼킨 듯한 눈 사이로 유일하게 숨기지 않고 드러낸 솔직함. 그것은 타고난 아름다움과 달리 그가 살아온 궤적이 깎아 내고 스스로 선택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그 상반된 매력이 그것을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이로 하여금 얼마나 특별한 기분을 들게 하는지, 저 사내는 과연 알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꿈에서 보았던 이전 생의 그가 짓던 미소가 그 위로 대비되듯 겹쳐졌다.

그때의 그가 제게 한 번이라도 지금과 같은 미소를 보여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무엇인가 달라졌을까.

…달라질 수 있었을까?

아직도 유더의 안에는 구멍이 많았다. 어떤 것들은 채워졌지만, 어떤 것들은 영원히 차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눈앞의 사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은 이제 분명히 확신할 수 있을 듯했다.

유더는 비밀 창고의 어둠 속에서 목격했던 가느다란 실과 같은 기운을 재차 떠올렸다. 그것이 키시아르가 대삼림에서 저를 찾을 때 보았다던 기운과 같다면, 대체 그 정체는 무엇일까.

입 안쪽과 혀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아릿하게 간질거렸다. 유더는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도 저를 놓아주지 않는 이의 무릎 위에 앉은 채 그의 손에 아직도 쥐어져 있는 작은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비밀 창고를 빠져나오고 나서도 내내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 아무리 소드마스터의 체력을 지닌 이라도 지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유더를 우선시하여 이곳에 있었다. 약조차 먹지 않고서.

불현듯 꾹 다문 입 안쪽으로 몇 번이고 작은 기침을 삼키던 꿈속의 사내가 떠올랐다.

끝없는 인내심을 지닌 듯한 지금의 키시아르조차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던 거의 유일한 고통. 그것은 바로 각성자가 되기 직전 겪었다던 그릇과 관련된 고통이었다.

수천 번을 담금질하며 벼려 낸 철처럼 강인한 이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쪽이 낫겠다 여겼을 정도의 고통을, 그 순간 그는 그런 식으로 삼키고 있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단장님. 그건 결국 드시지 않으실 겁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자 키시아르가 작게 웃었다.

“마시길 바라나?”

“제가 드린 것이라 불편하신 것만 아니라면… 드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지금.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시아르는 잠시 말없이 그 병을 만지작거리다 뚜껑을 열었다. 그의 목 안쪽으로 거침없이 흘러 들어가는 물약을 보고 나서야 유더는 비로소 꿈의 잔재에서 온전히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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