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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03화 (403/805)

403화

뚱한 얼굴의 이논과 달리 루산은 솔직하게 유더의 손을 잡고 기쁨의 기도부터 해 주었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오랫동안 끌어온 부상이 나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기도 내용을 듣는 동안 어색한 고마움이 조금씩 차올랐다. 이전보다 훨씬 흉하게 변한 손이지만 루산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기도가 끝나고 나서 이논에게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뒤, 그는 크게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 손도 전과 달리 그리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군요. 정말 다행이네요. 밤중에 갑자기 이곳으로 불려왔을 땐 처음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논 님과 달리 저는 별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오히려 제가 죄송했지요.”

“뭘 그렇게 좋게 말해 줘. 나는 자다 말고 갑자기 납치당해 심문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다고. 너도 자다가 끌려왔잖아.”

피를 토한 데다 기절까지 했으니 키시아르가 정말 엄청나게 놀랐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루산과 이논이 자다 말고 끌려왔다는 말을 들으니 역시 상상 이상의 반응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를 내려다보던 붉은 눈동자 속에 그어져 있던 깊은 상흔을 떠올린 유더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루산이 재빨리 자신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단장님과 함께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오셨다니 다른 이들 몰래 저흴 부른 것도 당연하잖아요. 이논 님이야말로 아까는 유더 님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단장님께 그런 말까지 하셨으면서 왜 심술궂은 말씀을 하세요…….”

“내가 언제? 난 그런 적 없어. 아무튼 그 약초나 내놔.”

“네네, 가져가세요.”

이논이 격렬히 반발했다. 그러나 유더는 이미 루산의 말을 들어버린 뒤였다. 이논이 저를 걱정하여 키시아르에게 ‘그런 말까지’ 했다니. 그런 말이 대체 뭐란 말인가?

“……이논. 혹시 단장님이 그냥 나간 게 아니었어?”

“…난 이거 우리러 간다.”

“그런 말이 뭔지는 말하고……. 이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논은 황급히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산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참 대단한 분이에요. 단장님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으실 분이란 건 알았지만 아까는 정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논이 나가버린 이상 이제 말해줄 이는 루산뿐이었다. 유더의 시선을 본 루산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 순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부름을 받고 일어나 이곳에 왔을 때, 이논 님께서는 이미 여기에 와 계셨어요. 그때는 단장님이 이쪽에 앉아서 유더 님을 지켜보고 계셨는데…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았죠. 제 인사도 듣지 못하신 것 같았거든요.”

키시아르는 피와 먼지로 얼룩진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논과 루산이 유더의 몸을 살피고 신력을 불어넣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면서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하고 어두웠다.

그러는 동안 밖에서는 끊임없이 누군가가 그를 찾았다. 타이누의 어딘가에서 달려온 펠레타 기사단원이, 치안 관리단에 있는 마병단의 전령이, 본관에서 온 프루엘레의 하인이 모두 그를 불렀으나 키시아르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런 그에게 나단 주커만이 무어라 말을 했겠지만, 이상하게도 남국인 기사 또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주군을 바라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밖에서 계속되는 부름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논이 폭발했다. 그는 키시아르를 돌아보며 매서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

‘이 녀석은 보기와 달리 몹시 괜찮습니다.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아주 놀랍게도 말입니다. 그러니 곧 죽을 사람처럼 보실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루산의 간담이 서늘해지든 말든 이논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바깥이 시끄러운 상황만큼 환자에게 독이 되는 환경도 없습니다. 저에게 화를 내고 싶으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런 식으로 방해하시는 건 대단히 불쾌합니다.’

‘이논 님!…….’

루산이 기겁했지만 키시아르는 그 말에 오히려 작게 웃었다. 오랜 상념에서 깨어나 피가 말라붙은 손을 들어 눈가를 쓸어내린 남자는 잠시 후 평소와 같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렇지. 보기와는 달리 괜찮다니 다행이군. 그러면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부탁하지.’

유더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사내는 곧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나단 주커만 또한 그제야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막 문을 열기 직전, 키시아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그의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유더 아일이 최대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돕되, 깨어날 때까지는 누군가 반드시 그를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군. 혹 그때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말이네.’

루산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유더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간 몰랐던 감정들의 이름을 상당수 알게 되었다지만, 지금 스스로 느끼는 기분은 그것들과는 또 달라서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슴 안쪽이 막 꿈을 꾸고 일어났던 직후처럼 조금 쓰렸다.

“단장님이 유더 님을 아끼신다는 건 이전 일로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정말 새삼 놀랐어요. 유더 님은 앞으론 정말 손끝 하나라도 다치시면 안될 것 같아요. 물론 마병단의 그 누구라도 다치면 안 되겠지만요.”

루산이 농담과 진담이 반쯤 섞인 듯한 말을 장난스레 내뱉으며 입술 끝을 씩 올렸다. 유더는 그에게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이논이 가져온 아주 쓴 약초 우린 물을 각종 환약들과 함께 배가 터지도록 삼켰다. 그 안에 잠을 부르는 약이 있었는지 저도 모르게 깜빡 눈을 감았다 깨어났을 때, 두 사람의 기척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신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새벽 어스름 속에 앉아 있는 키시아르의 모습을 본 순간 처음에는 꿈이 다시 시작된 줄 알았다. 깍지를 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둔 자세나 그림자가 드리워져 평소보다 초췌해 보이는 눈빛 등이 순간적으로 그때와 놀랄 만큼 흡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타닥이며 오색 불빛을 내는 마석 난로가 아니었다면 일순 현실감각을 의심했을 것이다.

“……몸은 좀 어떤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순간적으로 동요했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 습니다. 언제 오셨습니까?”

“…….”

“새벽입니다. 잠은… 설마 주무시지 않은 겁니까.”

키시아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말조차 하기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만도 하지.’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서 내려가 땅을 딛자 부드러운 러그가 맨발을 감쌌다. 그는 키시아르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려 했으나, 상대는 무릎을 굽히기도 전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저어 그것을 막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앉아 있는 사내의 앞에 똑바로 선 채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

“제 미숙한 판단으로 인해 걱정과 심려를 끼쳤습니다. 이논이 준 약에 대해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상태가 나쁘지 않고 상황 해결이 급하다 판단하여 자세한 보고를 뒤로 미루었습니다. 갑자기 피를 토하고 기절까지 했으니 몹시 놀라셨겠지요.”

“…….”

“그럼에도 이곳까지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신경을 써 주셨다고… 이논과 루산 사제님께 들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마석 난로가 타오르는 소리만이 더욱 크게 울려퍼졌다. 너무나 조용해 자신의 맥이 뛰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드디어 키시아르가 천천히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양손의 힘을 풀었다.

두 개의 나무처럼 얽혀 있던 열 손가락이 스르르 풀려나간 자리에서 드러난 것은 유더가 그에게 주었던 작고 투명한 물약병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몸 안쪽이 고통스레 울렸다.

유더는 그가 무슨 심경으로 그것을 쥔 채 제가 누워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약사 이논에게 물으니, 이 물약은 네 질문과 요청에 의해 건네준 것이었다고 하더군. 그런가?”

“…….”

“자신을 위해서는 독약이나 다름없는 약을 품고서, 내게는 이것을 건네주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더군.”

정말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건 유더 쪽이었다. 그는 키시아르가 그런 마음을 느끼기를 바라 했던 일이 아니라는 뜻을 밝히기 위하여 입을 열려 했으나, 키시아르가 말을 하는 것이 더 빨랐다.

“그건…….”

“자네는 더 좋은 결과를 위하여 과정을 숨기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지.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어떻게 되더라도… 그건 보다 큰 목표를 위해서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죽을 정도는 아니리라 확신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판단했으니 내게 사과를 하더라도 지금의 결과 자체에는 만족하겠지.”

느리게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폐부를 찔렀다. 붉은 눈동자는 유더의 속내를 아주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

“그 확신이, 나는 너무나 아프군 유더 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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