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02화 (402/805)

402화

단박에 유더의 말허리를 자른 이논이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좋아하는 레몬을 닮은 눈동자가 유더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정확히는 왼쪽 눈동자를 향해서였다.

“그건 그렇고 이제 확실해졌네.”

“뭐가.”

“네 눈 말이야.”

이논이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장식용 거울을 들어 건네주었다.

“단장에게 듣기로는 네 왼쪽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이 났다고 했는데, 내가 와서 눈꺼풀을 뒤집어 봤을 땐 아니었거든. 그런데 깨어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인 걸 보면 본래의 색으로 회복된 게 확실한 거지.”

그 말에 거울을 받아 본 유더는 정말로 제 두 눈동자가 모두 똑같은 색을 띠고 있음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자신도 보았었던 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건 부상을 입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뿐이었다.

‘색이… 도로 돌아왔잖아.’

그는 동공의 윤곽조차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짙어 공포스럽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 온 눈동자를 남의 것처럼 낯설게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 속에 존재하는 다른 색이라고는 평소처럼 빛을 반사한 부분에 언뜻 비치는 희미한 자색이 전부였다. 지나치게 진한 색에 빛을 비출 때 으레 보이는 평범하고도 익숙한 현상이었다.

“나도 내 눈에서 금빛이 나는 걸 봤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뭐, 짐작되는 건 하나뿐이긴 해. 증폭진의 흔적을 없애는 마법을 겪었을 때 흡수한 마력이 그 안에 흡착된 채 계속 남아 있다가 드디어 독성이 사라지면서 함께 흘러나온 거겠지.”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건가?”

“원래 눈이란 심장만큼이나 마력이 머물기 좋은 공간이야. 옛 대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는 자신의 마력 색으로 눈동자 색이 변한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없어?”

“……있는 것 같아.”

“마력의 혜안이라고 부르는 현상이야. 그 비슷한 게 네게도 일어난 거지.”

이논이 무어라 마법에 대한 설명을 길게 내뱉었지만 요점은 간결했다. 몸에 남아 있던 독성과 마력 때문에 유더의 왼쪽 눈에 마력이 통하는 길과 비슷한 무언가가 뚫렸다는 듯했다.

“그동안은 독 얼룩 때문에 보이지 않았겠지만 사라지고 나니 마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거야. 넌 어쩌다 보니 한쪽만 뚫렸겠지만 보통은 대마법사쯤 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딱히 이전과 다른 게 보이지는 않는데.”

“눈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그렇지.”

이논은 유더의 왼쪽 눈이 이전과 달리 마력이나 다른 기운에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되지 않는 힘이었다.

‘…뭐, 내가 마법사가 될 것도 아니니 그냥 눈이 회복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지.’

이논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입을 다문 동안 유더는 거울을 내렸다. 그러자 장갑을 끼지 않은 맨 손등이 새삼 눈에 들어오며 전과 다른 광경이 또 하나 보였다. 검은 얼룩이 사라진 자리에 대신 나타난 낯선 무언가. 손등의 혈관을 타고 거미줄처럼 번진 자줏빛 반점이었다.

“이건…….”

“아, 그래 맞아. 그것도 있었지.”

이논이 유더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거기 반점 번진 건 기절하기 전에 못 봤어?”

“…몰랐어.”

전투로 정신이 없던 상황이라 눈에서 빛이 나는 줄도 몰랐는데, 장갑을 낀 손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예전에는 그저 피부 아래 번진 점처럼 보였던 형태였던 것이 지금은 혈관처럼 보이는 형태가 된 것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유더는 서부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옅어졌었던 반점이 어느새 처음 생겼던 무렵만큼 다시 진해진 모습을 떨떠름하게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소매를 걷어 보니 옷자락에 가린 팔 부분에도 핏줄처럼 보이는 반점이 제법 번져 있었지만 다행히도 팔꿈치를 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유더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 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징그러워진 형태와 달리 통증은 없었다.

“아프지는 않은데.”

“아프진 않아? 반응이 그걸로 끝이냐? 어? 내가 그 약은 정말 신중하게 생각하고 먹으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어?”

이논이 속이 터진다는 얼굴로 대꾸한 뒤 주먹을 쥐었다. 응징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풀린다면야 그의 주먹 정도는 얼마든지 맞아 줄 의향이 있었기에 머리라도 숙여 주어야 하나 고민했으나, 이논은 결국 몇 번 고쳐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그래… 마음이 약해 약을 줘 버린 내 탓이지. 내 탓이야. 네놈을 탓할 게 아니라 나를 욕해야지.”

“그러지 마, 이논. 그 약이 아니었다면 거기서 그렇게 잘 빠져나올 수 없었을 거야. 화가 난다면 네 탓을 하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해도 돼.”

“…정말 의욕 없어지게 만든다, 너.”

이논이 완전히 맥빠진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방금 일어나서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할 말이야, 그게? 넌 대체 나이도 어린 놈이 무슨 인생을 살아왔길래…….”

“알잖아. 그렇게 안 어려.”

“…나하고 비교하면 누구든 다 어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답하는 이논의 표정은 어쩐지 이전보다 더욱 착잡해 보였다.

“아무튼 너, 깨어났으니까 하나 좀 시험해 보자. 아무거나 힘 좀 살짝 써 봐.”

유더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자줏빛 선들이 엉망으로 그린 그림처럼 번진 손을 들어 그 위로 가볍게 힘을 발하자, 곧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 하나가 타올랐다.

그 순간, 그의 손 위로 번져 있던 선들이 어지럽게 줄어들었다 늘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왼쪽 눈 색이 변화했다. 눈동자 안에서 빛이 환하게 타는 듯 보였던 이전과 달리 소리 없이 일어난 이변이었다. 이논은 놀라지 않고 미간만 찌푸린 채 그 모습을 관찰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도로 없애.”

불꽃이 사라지자 눈의 색은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손등의 반점은 그대로였으나 걷어 올린 소매 안쪽의 가장 옅은 부분들은 핏줄을 타고 여전히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이논은 몇 번이고 유더에게 같은 일을 반복하게 한 뒤 침음을 흘렸다. 이제 그만해도 좋다는 뜻을 눈치로 알아차린 유더는 아직 꿈틀대며 움직이는 손목 안쪽의 반점들을 무시하고 소매를 내렸다.

“통증은 없어?”

“없어.”

“없다니 다행이긴 한데, 아무래도 급하게 약을 먹고 계속 각성자의 힘을 사용하며 독성을 조정한 탓에 부작용이 생기기는 한 것 같다.”

이논은 간결하게 유더에게 힘을 써 보라고 시킨 이유와 제가 생각한 결과를 알려 주었다.

“네가 각성자의 힘을 사용할 때마다 네 손을 통해 아직 다 흡수되지 않은 붉은 힘과, 눈에 남은 마력이 함께 움직이는 것 같아. 더 지켜봐야겠지만… 어쩌면 네가 본래 지니고 있던 마력도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어.”

“…내 마력?”

“인간도 이 세계의 구성원이니 당연히 본래 생존하기 위해 지닌 마력이 있지. 마법사든 아니든 말이야.”

성질이 맞지 않는 타인의 피가 몸에 들어오면 거부반응을 일으키듯, 본래는 다른 이의 마력이 몸에 들어와도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 깃든 특정한 마법의 여파를 제거하기 위해 시전된 거대한 마법에서 유더가 흡수했던 키시아르의 마력은 어쩐지 그동안 사라지지 않고 완전히 적응하여 몸의 일부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듯했다.

‘매개체처럼 외부의 힘을 받아들여 흡수해 버리는 체질로 변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무튼 좀 더 살펴보기는 해야겠지만, 그 손은 아무래도 눈에 띄니 장갑을 계속 끼는 게 좋겠어.”

하긴, 누군가 이렇게 선이 꿈틀대는 손을 봤다가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십상일 터였다. 타인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서 좋을 건 없었으므로 유더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솔직히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아.”

이논이 몹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기절해 있는 동안 루산과 살펴본 결과 네가 토한 피는 내부에서 빠져나온 독성이었고, 불안정했던 혼도 훨씬 안정되었지. 힘을 쓸 때 어려움이나 통증도 없다면 약 자체는 제대로 효과를 다한 거야.”

그래. 그럴 것 같았다.

고통이 몸을 태우던 감각도, 토해냈던 피도 몸을 점점 처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뭔가 쌓인 것을 불태워 없애고 내보내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더의 몸속에 거의 흡수되어 있던 붉은 돌의 힘이 무언가 재차 자극을 받아 다시 크게 번졌다 해도, 힘을 쓰는 데 문제가 없다면 아무래도 좋을 따름이었다.

유더는 드디어 오랜 고민에서 벗어난 기분으로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의 앞길을 막아설 방해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논. 그래서… 단장님은?”

“…….”

정말 포기를 모른다는 얼굴로 유더를 바라보던 이논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와 루산을 여기 불러다 놓고 네 상태가 심각한 게 아니라는 확언을 들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갔어.”

“나갔다고? 그러면 루산 사제님은…….”

“그 녀석은… 아, 지금 오네.”

“이논 님! 말씀하셨던 걸 가져왔어요. 이것 맞죠?”

루산이 어디선가 갓 뽑아낸 풀잎 뭉치를 손 가득 들고 들어오다 유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걸음을 멈추었다.

“유더 님! 일어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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