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아.’
유더는 홀연히 사라져 가는 키시아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나눈 대화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다.
오래된 꿈.
그것을 자각함과 동시에 익숙한 단장실의 풍경도, 키시아르의 뒷모습도 모두 사라지고 유더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내려다보자 키시아르가 쥐어 주고 간 종이 조각만은 아직 남아 있었다. 과거의 유더가 그것을 보며 느꼈던 차가움과 분노, 정체를 몰랐던 감정들이 아지랑이처럼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다가는 이내 힘없이 사그라졌다.
‘그래. 그때 내가… 이걸 빼내 키시아르에게 보여 주었었지.’
그것은 잊은 줄도 몰랐던 어떤 기억들과는 달리, 아직도 머릿속에 비교적 선명히 남아 있는 대화 중 하나였다. 다만 대화가 인상적으로 남았을 뿐이지 그날 느꼈던 스스로의 심경이나 생각이 어땠는지까지는 세월 속에 무뎌지며 흐리게 변한 상태였기에 어떤 부분들은 몹시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제기된 적 없는 펠레타 공작의 반역 의혹.
그러나 당시 물밑에서는 쉴 새 없이 태양궁으로 전서구가 바쁘게 오갔다. 카치안 황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펠레타를 향한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경계와 경고의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얼굴로 담을 넘어 단장실에 들어오는 사내를 이해할 수 없어 그 종이를 내던졌다.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는 정말 반역할 의도로 제 본거지에 틀어박힌 것인가?
은밀히 궁을 떠돌아다니는 흉흉한 소문들은 모두 사실인가?
…그는 정말 반역의 뜻을 지닐 수 있는 자인가?
가장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마 세 번째였을 것이다. 사실 키시아르의 반역 의혹과 관련된 소문을 처음 접했을 때 유더가 제일 먼저 했던 생각은 ‘그 같은 이에게 무슨 반역의 뜻이 있을까?’ 쪽에 가까웠다. 반역이라니. 그런 걸 저지르기에 그 사내는 지나치게 가벼웠고 모든 것에 아무 뜻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제 손으로 만든 마병단도 미련 없이 떠나 버리고, 하나 남은 혈육이 죽었음에도 슬픈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사내. 기껏 돌아간 펠레타에서는 게임 상대가 없다는 이유로 탈출하여 마병단 담장을 넘어 들어오고, 대체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 짐작할 수 없는 자.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듯 구는 이가 과연 반역의 뜻을 품을 수 있을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새로운 황제는 적법한 절차를 따라 전대 황제의 양자가 되었으며 황태자의 자리를 거쳐 황위에 올랐다. 전대 황제의 사망 요인은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병이었다. 비록 재위 초기라 상황이 다소 어지럽기는 하다지만, 한편으로는 젊고 의욕 넘치며 건강한 황제의 등장을 환영하는 제국민들도 많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다면 그의 자리는 무어라 할 수 없을 만큼 공고해질 것이 경험 없는 신임 마병단장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리 쉽게 감시의 눈을 피해 순식간에 수도로 달려올 수 있는 이라면, 황제의 시야를 벗어난 곳에서 일을 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가 지닌 기묘하고도 비밀스러운 벽 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가?
어쩌면 반역의 뜻을 지닐 리 없다는 생각이 키시아르의 말마따나 ‘오랫동안 침대를 함께 덥힌’ 탓에 내린 끔찍하게 잘못된 판단이 아닐까?
유더는 그 사내와 오랫동안 몸을 섞었음에도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으므로, 답을 알기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유더의 안에서 모든 이름 모를 감정의 작은 조각을 산산이 깨부수고 차디찬 겨울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이후 키시아르는 단장실을 찾는 일이 없었다. 유더 또한 남자가 드나들던 창을 걸어 잠그고 다시 열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뒤, 유더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내버렸다. 어둠에 묻힌 종이 조각은 곧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그때 나는… 키시아르를 믿고 싶었던 거겠지.’
오랜 세월을 돌아 다시 한번 그 시절을 보니 그때는 느껴지지 않던 무언가가 보였다.
그때의 유더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어쩌면 좀 더 키시아르를 믿으려 했다. 아직 세파에 닳지 않은 얼굴 속에 새파랗게 들여다보이던 기대와 두려움을 과연 그 사내라고 몰랐을까?
그때 키시아르가 남긴 ‘우선순위’란 말은 당시 유더의 어깨 위에 아직은 낯설게 얹혀 있던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는 첫 평민 출신 마병단장의 존재와 더불어 각성자의 취급을 두고 마병단 존속과 관련된 항의가 한창 시끄럽게 들끓던 시기였다.
좋든 싫든 마병단의 위상이 제국 전체에 존재하는 각성자들의 취급과 밀접히 관련되어 가고 있는 건 틀림없었고, 그 모든 이들을 지킬 수 있는 이는 저뿐이었다. 그건 여태 무언가를 책임져 본 적 없이 홀로 지내 왔던 이가 느끼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무거운 일이었지만, 그때 이후로는 그 무거움을 잊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남기고 간 분노와 실망이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그때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에 머릿속의 끄트머리에조차 떠올리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유더는 키시아르 라 오르가 손쉽게도 두고 간 마병단을 멀쩡히 존속시키고 싶었다.
자신이 더 이상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입장임을 깨달았던 순간으로부터.
스스로 발 딛을 곳을 지키고, 홀로 나아가기 위하여.
분하게도.
‘그렇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것도 역시…….’
키시아르는 유더가 빼낸 종이를 두 번이나 돌려주었다. 그가 그 사실을 이용하려 했다면 당시의 유더쯤은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언에 가까운 말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유더는 그가 언급한 대로 이후부터 ‘우선순위’를 염두에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또다시 그의 말을 따른 셈이나 다름없었다.
해묵은 몰이해의 뒤. 알 수 없는 이면에 숨겨져 있던 것들.
유더는 저를 바라보던 그늘진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움푹 들어가 차갑고도 음울한 분위기를 머금던 눈꺼풀, 윤기를 잃고 푸석해진 머리칼 끝, 피가 돌지 않는 이처럼 창백하기 그지없던 뺨. 그 사내였기에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었지만 건강한 모습의 그를 알게 된 지금 떠올리면 무엇 하나 이상하지 않은 점이 없었다.
‘일단 키시아르가 처해 있던 상황부터 그렇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어쩌면 마병단을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순간부터 이미 그릇에 큰 손상을 입었던 상태일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 상태임에도 제가 양팔이 잘릴 뻔한 부상을 입었을 때, 그가 몰래 신력을 써 준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연유로 상처가 나았다는 사실을 안다.
그가 자신과 두던 전술 게임을 핑계 삼아 담을 넘었다는 핑계를 대도 아무 말 없이 묵인할 만큼은 기대를 한 적이 있었다는 것도… 이제는 알았다.
과연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 반역을 저지를 이유가 정말로 존재했을까?
그때 제가 믿었던 것들은 진실이었나?
그는 어째서 질문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을까.
알고 싶다.
몰랐던 허기를 불현듯 눈치챈 순간처럼, 유더는 제가 그것을 몹시 간절히 알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고 싶어.’
짐작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
내부에 존재한 무언가를 잃고서 텅 빈 수많은 구멍 속에 있었을 그 무언가의 답을.
키시아르가 제게 감추었을, 혹은 알려 주었으나 잊은 줄도 모른 채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비밀들을.
그저 그 생각만을 강렬히 떠올림과 동시에,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이 일었다.
익숙하고도 강렬한 붉은 기운이 먼저 눈앞을 가리고 금빛 기운이 뒤섞인 아지랑이가 뒤이어 안개처럼 그것을 감싸며 피어났다. 몽환적이고도 아름다운 빛의 운무에 홀린 눈앞이 희게 변했다 다시 선명해졌을 때, 유더는 어느 날 보았던 과거의 꿈속에 또다시 서 있었다.
‘…이거 오랜만이군. 환상인가 했는데 진짜라니 놀랍기 그지없어.’
힘이 하나도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우아하게 들리는 낮은 목소리. 흐릿하게 번진 시야 너머로 책상 앞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가볍게 깍지를 낀 양손을 감싼 장갑. 단 한 번 본 펠레타 성 내부의 모습.
그날의 키시아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