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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99화 (399/805)

399화

잡은 손 하나의 온기에 의지한 채 앞을 보고 달렸다.

들어왔던 통로로 다시 진입하자마자 유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땅을 움직였다. 어둠 따위는 더 이상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큰 소리와 함께 단단한 돌벽과 계단이 뭉그러지고 무너져내리며 통로가 막혔다. 그와 동시에 유더의 코를 타고 뜨거운 피가 또다시 폭발적으로 흘러내렸으나 그는 느끼지 못했다.

한참을 울리던 소음이 가라앉고 나서야 유더의 손을 잡고 있던 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는 뜻으로 손을 잡아당겼으나 그는 따라와 주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어둠에 묻힌 흰 얼굴이 처음 보는 표정으로 유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신음처럼 흘러나온 작은 속삭임과 함께 키시아르가 유더의 모자를 뒤로 밀어 벗겼다. 동시에 드러난 왼쪽의 금빛 눈동자를 본 손끝이 움찔 떨렸으나, 제 눈가에 손이 닿은 순간까지도 유더는 왼쪽 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이상을 알게 된 건 키시아르의 눈동자에 작게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본 순간이었다.

‘…저게 뭐지?’

여태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검은 얼룩으로 가득했던 왼쪽 눈은 그곳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황금빛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눈을 의심하며 들여다보아도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동자 안쪽에서 누군가 등불이라도 켠 듯 흘러나오는 빛은 환상도, 착각도 아니었다.

‘대체 이게 무슨…….’

금을 녹인 듯 찬란한 그 빛은 키시아르가 지닌 마력과 기묘하게도 똑같이 닮아 있었다. 마치 눈동자라는 작은 창 안쪽에서 키시아르의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빛을 내는 걸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피로 얼룩져 엉망이 된 얼굴이나 옷보다 그 눈이 더욱 이상하여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키시아르가 눈을 내리깔며 감아 버렸다. 유더가 들여다볼 수 있었던 유일한 거울 또한 그렇게 사라졌다.

유더는 그제야 들끓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 꼴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몸이 저릿저릿하게 고통을 호소하고 있기는 했으나, 아까까지만 해도 무언가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강렬했던 압박감은 어느샌가 사라진 상태였다. 물을 불러내어 쏘아내기 이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고통의 잔재 정도밖에는 남지 않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뭔가 터지긴… 터진 것 같은데.’

눈을 가리던 얼룩이 사라졌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뭐가 뭔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그 난리통에 몸에 번진 독성의 힘을 제어해 내기는 한 모양이었다. 헬렘과 믹의 연구를 토대로 이논이 만들어 낸 약이 드디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이다.

성공을 확신한 순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키시아르에게 대체 무슨 말로 설명을 시작해야 할지는 몹시 어렵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피가 많이 났을 줄은 몰랐는데……. 엄청나게 놀랐겠지. 일단 보이는 것처럼 별일은 아니라고 말해야겠군.’

“……단.”

단장님. 그렇게 부르려 입을 열었으나 아직도 입 안에 고여 있던 피가 눈치 없이 주르륵 흐르는 바람에 시도는 단숨에 불발되었다. 유더가 당혹을 가라앉히며 소매로 얼굴을 거칠게 닦아내는 사이 참담한 무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뻗어 나온 긴 손가락이 입술 아래 번진 피를 가만히 훔쳐내 주었다. 그 손이 평소보다 훨씬 차갑게 식은 상태임을 유더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입은 지금 열 필요 없네.”

지극히 침착하고 우아한, 그래서 듣는 이를 도리어 오싹하게 만드는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보고는 돌아가서 들을 테니.”

키시아르 라 오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

그는 위기를 게임 도중 일어난 뜻밖의 즐거움처럼, 실패는 별것 아닌 우스운 농담거리마냥 웃어넘기면서도 눈먼 분노 따위에 눈앞의 현실을 잊지 않고 냉정히 오래된 미래를 기약할 줄 아는 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유더는 일견 평정을 지키는 듯 보이는 사내의 눈빛 속에서 숨길 수 없이 깊은 상흔을 읽어냈다.

영혼이 뒤흔들리는 듯 충격적인 감각이 일순 유더의 전신을 싸늘히 훑고 지나갔다. 그는 다급히 입을 열어 설명을 하려 애썼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 피는… 부상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서 듣겠다고 말했네만.”

다가온 손이 눈 깜짝할 사이 몸을 들어 올려 안았다. 내려 달라고 할 틈도 없었다.

“…….”

유더는 어둠 속에서 저를 끌어안고 다급히 걸음을 옮기는 사내의 가쁜 심장 박동을 들었다. 표정과 목소리는 감정을 숨길 수 있어도 터질 것처럼 뛰어 대는 맥박만은 숨길 수 없었다.

간절하고도 절박하여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그 소리.

그 작고 가쁜 소리를 들은 순간, 고통이 가라앉아 간다고 느꼈던 몸 안쪽에서 구멍들이 일시에 입을 벌리고 뻐끔대기 시작했다.

대체 그 소리에 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약을 먹은 건 고민할 가치도 없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고요히 뻐끔대는 구멍들의 흐느낌은 유더 아일에게 익숙하고도 새로운 고통을 선사해 주었다.

그것들이 내내 소리 없이 외치던 문장을 어쩐지 지금, 알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가, 또 후회할 짓을 저지른 건가?’

유더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린 통증이 머리를 울렸다.

***

‘이건 뭐지?’

유더는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사내의 앞에 종이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무슨 내용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텐데도, 사내는 농담처럼 모른 척을 했다.

‘펠레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들에 대한 열세 번째 보고입니다.’

‘이런. 열세 번이나 그런 보고가 올라갔다니, 폐하께서도 확인하시느라 힘드시겠는데.’

‘이런 보고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모르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겠지요. 최근 들어 더욱 자주, 그리고 부정적인 보고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펠레타에 머무르는 황궁 기사단원들은 대체 왜 내쫓으신 겁니까?’

‘그자들이 내가 펠레타로 돌아간 이후부터 내내 성의 식객으로 머무르면서 얼마나 많은 밥을 축냈는지 아나?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더 이상의 밥은 줄 수 없다고 마가릿이 화를 냈다네. 해결해 주지 않으면 성주인 내 밥도 나오지 않을 판이었어.’

‘이런 상황에서까지 농담이십니까?’

‘진짜인데…… 그러면 뭐라고 답하길 바랐나? 오랫동안 침대를 함께 덥힌 정이 있으니 나와 함께 반역해 달라는 말?’

능글맞게 웃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유더는 숨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한 뒤 겨우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왜 부정하지 않으십니까?’

‘뭘 말이지?’

‘단장님이 자리를 넘기고 펠레타로 가신 건 결코 황제 폐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부정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펠레타 기사단이 항간의 불안을 사고 있다면 규모를 줄이겠다 말하시면 되고, 성으로 향했다는 물자들에 대한 해명도 하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나를 또 단장이라 부르는군.’

웃음 띤 목소리에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단장이 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도 그리 적응이 되지 않나? 황제는 새로운 마병단장의 힘에 제법 감탄했다고 들었는데.’

‘…….’

입에 붙은 말이 어찌 그리 순식간에 사라질까. 하지만 그리 답하기에는 억울한 마음이 샘솟았기에 유더는 아랫입술만 짓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시아르가 여유로운 손길로 제 앞에 놓인 종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것도 그렇지. 본래는 절대 반출되어서는 안 될 것을 당사자에게 가져오다니. 자네가 아직도 사고를 치면 누군가 수습해 줄 수 있는 단원이라 생각하나? 우리의 새로운 황제 폐하가 알았다면 이 건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했을 거야. 반역자로 목이 잘리는 건 아마 신임 마병단장의 몫이 되었겠지.’

‘……저는!’

유더 또한 당연히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 직접 올라간 보고서를, 그것도 반역과 관련된 사항을 몰래 빼낸 건 중죄 중의 중죄였다. 그것이 얼마나 수많은 고민 끝에 일어난 일인지 눈앞의 사내는 모른다. 아마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것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인 유더의 앞으로 소리 없는 발걸음이 다가왔다. 흰 장갑을 낀 손이 종이를 곱게 접어 유더에게 도로 건네주었다.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손끝을 스친 순간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종이는 유더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고 맥없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유드레인.’

그 종이를 바라보며 금빛 머리칼의 사내가 속삭였다.

‘너는 너무 겁이 없어서 문제야. 하지만 그 점이 나를 분명 흥미롭게 한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네.’

‘…….’

‘그러나 흥미만으로 봐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 아무리 어리다 해도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알 나이는 되지 않았나? 내가 반역하지 않았다고 부정한다면, 그걸 순순히 믿어 주기라도 할 셈이었나?’

아니겠지.

마음이 차가워졌다.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가 보아야겠군.’

허리를 숙인 키시아르가 다시 한 번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도록 손가락을 펴 몸소 건네주는 움직임은 어울리지 않게도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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