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이전의 유더 아일이었다면 그 말에 반박했을 것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 따위야 얼마든지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우선순위.
앞으로 해야 할 일들.
그리고 키시아르 본인의 몸 상태까지도.
하지만 유더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등을 감싼 손에서 느껴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힘이, 거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건 유더가 키시아르를 찾아 어둠을 헤매던 때와 정확히 같은 정도의 절박함이었다…….
“…….”
잠시 고통조차 잊고 거세게 뛰던 심장이 또다시 칼로 난자당하는 듯한 강렬한 아픔에 몸서리쳤다. 유더는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열기와 통증에 저절로 솟구친 구역질을 억누르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쭉 흘렀지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났다.
‘넋을 놓을 상황이 아니지.’
설득해 봤자 키시아르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단 주커만이라도 먼저 보내고, 그다음에 함께 탈출하는 쪽을 차선으로 잡아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주커만 경부터 먼저 내보낼 테니, 일단 놓아주십시오.”
“먼저 가야 할 건 네 쪽이야. 힘을 이토록 썼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나.”
“그 부분은 이논에게서 이런 상황을 대비해 받은 약을 먹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이라니.”
“그 부분은 추후 보고드리겠습니다.”
유더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적은 기척 감지에 무척 능하며, 무기 없이도 응축한 기운을 만들어 날려 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가 저희를 나그란의 별로 생각하는 듯하니 저는 그에 어긋나지 않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니 단장님께서도…….”
“각성자의 힘만으로 상대하지.”
유더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바로 읽어 냈을 사내가 원하던 답을 돌려주었다.
“혹 주커만 경이 먼저 몸을 피하는 대로 돌 조각상들이 많이 있던 오른쪽 끝의 선반까지 적을 유인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너뜨릴 생각인가?”
“네.”
키시아르가 짧은 순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으나……. 그곳보다는 칼라네사 가루가 있던 곳으로 밀어붙일 테니, 적이 그곳에 가까워져 내가 신호하면 바로 물을 쏟아붓게. 그다음 함께 출구로 향하면서 선반들을 무너뜨려 길목을 막는 쪽으로 하지.”
다른 물건들이 무너져도 상관하지 않고 달려드는 놈이 칼라네사 가루라고 신경을 쓸까?
하지만 키시아르의 표정에서 어떤 확신이 느껴졌기에 유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바람은 이제 그만 쓰게.”
유더는 그의 명에 따라 바람을 잦아들게 만들었다.
사용하던 힘을 끊었음에도 왼쪽 눈 안쪽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뜨거워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예 터질 것 같았다.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운 또한 땅을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지만, 힘을 쓰면 쓸수록 속에서 열이 더 올라와 산 채로 불타는 기분이 들었다.
2성을 각성하던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고통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감각은 오히려 더 예민해진 것 같고.’
소름 돋는 고통이 치솟을수록 유더의 감각은 그에 비례하여 더욱 날카로워졌다. 키시아르를 찾은 뒤 눈에 보이던 이상한 실 같은 기운은 사라졌지만, 한계까지 숫돌에 갈아 낸 칼처럼 예리해진 오감은 조금도 죽지 않았다.
유더는 어둠 속에서 사그라지는 바람과, 그 여파로 인해 쓰러지는 선반의 방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물건들의 생김새와 개수도, 적과 아군이 서 있는 장소도, 출구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뚫어야 하는지까지도 모든 것이 놀랄 만큼 선명히 느껴졌다.
‘위층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아래층에서 일어나는 소요가 동료의 행동 치고는 너무 길어진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앞서 나가겠습니다. 발밑을 조심하시며 따라오십시오.”
유더는 엉망이 된 창고를 빠르게 헤치며 나단 주커만과 남국인 상인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러 물건이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무너진 선반 사이에서 두 사내가 끊임없이 검과 힘을 부딪쳤다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번득이며 빛나는 검 위로 보이지 않는 응축된 힘이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며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얼마나 빠른지 눈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힘들었다.
나단 주커만은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검기를 쓰고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검을 응축한 힘만으로 저 정도로 상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더는 상당한 놀라움을 느꼈다.
‘저자……. 정말 상인이 맞긴 한 건가?’
소드마스터의 검을 상대할 만큼의 실력이 있는 검사의 정체가 단순한 상인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저자는 각성자가 되기 전부터 이미 뛰어난 검사였을 확률이 높았다.
‘대체 누구지.’
유더는 새삼스레 적의 정체를 반드시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을 깊이 굳히며 두 사람의 전투에서 얻어낸 긍정적인 정보를 정리했다.
‘그래도 본래 검사였던 자가 각성자가 된 거라면 상대하기는 한결 낫겠어.’
검은 사람의 몸을 통해 사용되는 도구다. 그것에 지나치게 익숙한 탓에, 저 남국인 상인은 사람의 손길이 없이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힘을 각성했음에도 그것을 응축하여 검처럼 쓰거나, 혹은 기사들이 오러를 날려 보내는 것과 비슷한 방식 이외의 공격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즉 그가 아직 본래의 검사라는 한계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였다.
‘육체가 지닌 사각지대 안에 힘을 가두고 있다는 게 저자의 한계다.’
모든 것을 파악한 뒤 유더는 나단 주커만과 남국인 상인 사이의 땅을 움직여 적의 발아래를 교묘하게 뒤흔들었다. 순식간에 불쑥 치솟거나 아래로 얕게 불쑥 꺼진 땅 때문에 적이 균형을 잃은 사이, 또다시 가볍게 불러일으킨 바람이 떨어진 물건들을 회오리처럼 쓸어모아 앞을 가로막았다. 극도로 곤두선 감각이 있기에 가능한 조절이었다.
내장이 진탕이 된 듯 입 안에서 비린 맛이 느껴졌지만 키시아르를 생각해 억눌러 참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의 앞으로 끼어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밀었다.
“먼저 가도록.”
등에 마도구가 든 자루를 묶은 끈을 가방처럼 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밝아진 유더의 시야 속에 비친 그의 얼굴은 온갖 깨진 조각과 힘의 여파에 쓸려 가느다란 자상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충직한 기사는 잠시 망설였으나, 유더가 앞에 작은 불꽃을 띄우자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물러났다.
“…….”
오간 말은 없었지만, 짧은 순간 마주친 시선은 걱정을 담고 있었다.
나단 주커만의 뒷모습이 불꽃의 인도와 함께 곧 멀어져 갔다.
“어딜!”
나단 주커만이 몸을 피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남국인 상인이 기운을 응축하여 다시 한 번 날렸으나, 그 공격은 키시아르가 맨손을 뻗어 절도 있게 쳐내자마자 이내 또다시 힘을 잃고 튕겨 나가 버렸다.
‘체술과 밀어내는 힘의 조합인가.’
키시아르의 능력이 무엇인지 아는 유더는 바로 파악할 수 있었으나 남국인 사내는 순간 멈칫하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이내 더욱 호전적인 모습으로 돌변하여 키시아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나단 주커만과 달리 체술로 뻗어 내는 공격과 힘의 방향을 일정하게 조정하지 않은 키시아르의 공격은 그가 여태 했던 방식대로는 쉽게 상대할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별것 아닌 공격이었으나 자신이 내뿜은 힘이 멀리 반사되듯 튕겨 날아갔다가는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다시 날아오는 경험을 여러 번 하자 남국인 상인의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남국어로 무어라 짧은 말을 중얼거리며 힘을 이전보다 더욱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다.
키시아르는 상대가 내뿜은 힘을 끌어당겨 모은 뒤, 마치 자신의 힘처럼 다시 되밀어 내며 적의 가슴 한복판에 꽂아 넣었다.
소리 없는 신음을 삼키며 사내의 몸이 멀리 날아가 어딘가에 처박혔다. 유더는 그곳이 정확하게도 칼라네사 포대가 쌓인 곳임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유더가 있는 곳을 바라본 키시아르가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지금!”
유더는 끓어오르는 불같은 고통을 모두 끌어모았다. 한계의 한계까지 타오른 통증이 기어이 왼쪽 눈을 터트린다 해도 이 일만은 기어이 해낼 셈이었다.
치솟은 손 위로 힘을 내뿜음과 동시에 허공에서 생성된 물줄기가 점점 커져 갔다. 평소에 불러내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이 회오리치면서 고통 또한 한계에 다다랐다. 유더는 거세게 악물었던 이 사이로 기어이 선혈을 울컥 뱉어내고 말았다.
“……욱.”
손이 벌벌 떨리며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하지만 힘은 멈추지 않았다.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힘이 기어이 유더의 안에 남아 있던 것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거대한 바람을 맞이한 불처럼 크게 일어남과 동시에,
오랫동안 왼쪽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검은 얼룩이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온 금빛에 휩싸여 불타는 것처럼 녹아내렸다.
‘가라……!’
제 눈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는 채로 쏘아 보낸 물줄기가 파도처럼 공중에 펼쳐진 채 적이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남국인 사내가 그것을 보고는 다급히 손을 움직여 힘을 발했다. 명백히 물줄기를 막으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빈틈을 놓치지 않은 키시아르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 유더를 향해 달려왔다.
유더는 그가 내뻗은 손을 보며 자신도 손을 뻗었다.
두 손이 서로를 붙잡아 끌어당긴 순간, 등 뒤에서 키시아르가 마지막으로 날려 보낸 힘에 끌어당겨진 선반들이 모조리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