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제일 먼저 들린 건 나이든 남자의 목소리였다. 끓는 가래와 뒤섞여 거칠어진 목소리가 억센 서부 억양으로 저와 함께 온 이들을 탓했다.
“어젯밤 살폈을 때와 똑같아. 괜히 당신들 말만 믿고 멀쩡한 문을 부순 게 아닌가. 남작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무어라 하시겠어.”
“…분명 이곳에서 힘이 움직였습니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앞서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와 달리 몹시 낮고 느릿했다. 유더는 가짜 마도구가 널린 선반 사이로 슬쩍 고개를 돌려 상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부서진 출입구 너머로 일렁이는 등불 불빛에 비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등불을 든 이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고, 나머지 둘은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한겨울처럼 몸을 단단히 감싼 옷자락 아래 드러난 피부가 붉었다.
‘이전에 보았던 술집 주인과 남국인 상인들이군…….’
남국인 상인들은 분명 빌름 남작을 만나러 가느라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는데, 이리 빨리 돌아올 줄 몰랐다. 게다가 들려오는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이곳에서 일어난 힘의 움직임을 어떤 이유에선지 정확히 파악하고서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몸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어디 있을지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으나 그의 눈이 닿는 범위 내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나단 주커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서로 떨어져 숨은 건 당연하고도 현명한 행동임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은 어쩐지 그 사실이 지독하게 초조하게 느껴졌다.
‘젠장.’
유더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주먹을 힘주어 꽉 쥐었다.
“더 볼 것도 없어. 나가. 여기 있는 물건들은 당신들이라 해도 때가 올 때까지 절대로 손대면 안 돼. 난 나가서 이곳으로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알려야 한다고!”
그사이, 노인은 남국인 상인들에게 짜증을 내며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문제도 없는 지하실의 비밀 문을 남국인들이 홀랑 부숴 버렸다는 사실에 몹시 화가 난 상태임을 숨기지 않고 투덜거렸다.
그대로 그들이 꺼져 주면 참 좋았으련만, 남국인 상인들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나갈 수 없습니다. 침입자가 있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글쎄 아무도 없지 않아! 이곳으로 누군가 들어갔다면 내가 알았을 거래도!”
“통로는 이쪽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쪽은 남작님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어. 벌레 한 마리 들어갈 수 없다고.”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만약 나중에 침입자가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공작님의 앞에 당신의 머리부터 내놓을 것입니다.”
“뭐… 뭐야? 지금 뭐라고……!”
뒤이어 알아들을 수 없는 남국어가 짧게 들려왔다. 그러자 남국인 상인 중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는 노인을 강제로 붙잡아 밖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 이 녀석들이? 날 왜 잡는 거야!”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며 겁에 질린 고함 소리가 곧 억눌린 신음으로 변했다. 그 소리들이 점차 멀어지는 동안 남은 남국인 상인 한 명이 무거운 발소리를 흘리며 비밀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긴 그림자가 창고 내로 드리워지며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느껴 본 적이 있는 시선이군.’
모자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그토록 날카로운 시선을 지닌 이는 흔치 않았다. 그는 이전에 술집에서 유더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던 그 남자가 분명했다.
사내는 어느 정도 안으로 들어선 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알아들을 수 있는 제국어가 음울하게 들려왔다.
“침입자여, 이곳에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나오도록.”
창고 내는 여전히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듯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거대한 힘이 움직이는 것을 나의 동료가 확인했다. 타이누 곳곳에 침입하여 폭발을 일으켰다는 각성자가 바로 너희들이겠지. 지금 나온다면 죽이지는 않겠다.”
순간 유더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우리를 나그란의 별이라고 생각했군.’
“나 또한 너희들과 다를 바 없는 각성자다. 내게는 너희가 도망치려 한다면 즉시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 마지막 권고다. 나오도록.”
남국인 상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 또한 각성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홀로 당당히 남아서 들어온 자신감의 근원이 바로 그것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유더는 그가 각성자라는 사실을 알자 오히려 평온함을 되찾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다 싶더니, 먼저 각성자라고 밝혀 주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똑같이 강한 몬스터라도 이름을 모르는 몬스터보다는 아는 몬스터가 더욱 상대하기 쉬운 법이다. 상대가 무슨 계열의 힘을 지니고 있든 같은 각성자라면 분명 과거의 경험 속에서 상대할 만한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기왕 오해해 주고 있으니 그것도 확실하게 써먹어 줘야겠고.’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주지. 셋을 세겠다. 하나…….”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아마 생각하는 건 모두 비슷할 터다. 저 남국인 상인을 빠르게 처리하고 빠져나가는 것이다. 상대는 하나이고 이쪽은 셋이니 전력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까지 놈을 상대하는 건 내가 해야 해.’
키시아르는 오늘 내내 이미 많은 힘을 사용했으며 정체를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람이고, 나단 주커만에게는 무사히 밖으로 가지고 나가야 할 마도구 더미들이 있었다. 손이 비어 있고 탈출을 먼저 해야 할 이유도 없는 이는 저뿐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방해되는 것부터 해결해 둬야겠군.’
유더는 얼굴을 가린 망토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쓰면서 옷자락 안을 뒤졌다. 이논이 준 환약이 곧 손에 잡혔다.
아마 이논은 이 상황을 보면 어이없어하겠지만, 유더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리 빠르게 힘을 회복해야 할 일이 오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둘… 셋……!”
유더는 환약을 목 안으로 거칠게 던져 넣어 삼키면서 벌떡 일어났다.
‘바람, 그리고 땅!’
두 속성의 힘을 동시에 사용하자마자 주변에 있던 선반들이 뒤흔들리며 복제된 가짜 물건들이 바람에 휘말려 엉망으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수천 명이 동시에 내지르는 비명처럼 머리를 울렸다.
유더는 흔들리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지기 시작한 선반을 피해 달려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 속이라 뭐가 뭔지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어서 빨리 키시아르를 찾아야 했다.
‘분명 아까 이쪽으로 움직이는 걸 본 것 같은데……!’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공격이 유더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재빨리 바람을 밟고 옆으로 피하자마자 그가 있던 위치의 물건들이 모조리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남국인 상인이 내지른 공격의 위력이었다.
‘바람 속성 쪽 공격인가? 아니면 검기와 비슷한 종류?’
어느 쪽이든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몸을 굴려 그나마 멀쩡한 선반 뒤쪽으로 숨어든 뒤 참았던 호흡을 토해낸 순간이었다.
갑자기 배 아래쪽에서 칼에 찔리는 듯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
유더는 소리 없이 이를 악물며 선반을 붙잡고 몸을 웅크렸다.
‘…꽤 아플 거라더니, 그냥 겁주려고 한 소린 아니었군.’
이논이 경고했던 환약의 작용이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평소 각성자의 힘이 고이는 배꼽 안쪽, 마나 홀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은 순식간에 심장으로, 양팔로, 다리로 번지며 불에 타는 듯한 고통으로 변화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통증이 심하게 번진 곳은 왼쪽 눈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불로 낙인이라도 찍는 듯 눈 안쪽을 활활 태웠다.
유더는 고통 때문에 숨을 지나치게 크게 쉬지 않도록 억누르며 다시 일어났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몸을 떨리게 만들었으나, 이전처럼 힘을 쓸 때마다 가슴이 갑갑한 느낌이 찾아들지는 않았다. 마치 몸 안에 그간 억눌린 채 쌓여 있던 모든 것들이 드디어 자신들을 소진해 줄 불꽃에 닿아 거세게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남국인 상인을 상대하고 있는지 무기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키시아르는 오늘 신검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나단 주커만 쪽일 터였다. 바람은 여전히 유더의 의지를 따라 주변을 엉망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키시아르.’
남국인 상인을 상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그를 먼저 찾아 통로 쪽으로 내보내야 한다.
‘키시아르는 어디……!’
그 짧고도 단순한 간절함이 어둠 속에서 남겨진 단 하나의 생각이 된 순간.
유더는 문득 눈을 불태울 듯한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다’고 느꼈다.
그의 몸에서부터 죽 뻗어나간 가느다란 기운.
마치 실과도 같은 그 연약하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끝에 키시아르가 있다는 걸,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음에도 본능처럼 깨달았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유더는 땅을 박차고 뛰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 떠오른 빛처럼 홀로 반짝이는 사내의 손을 거세게 끌어당겼다.
“단장님……!”
마찬가지로 어두운 지하실 내부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던 것처럼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키시아르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마도구로 얼굴을 변용한 상태라는 것까지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재빠르게 다가온 손이 거부할 틈도 없이 유더의 뺨을 매만져 존재를 확인했다.
격류하는 감정을 따라 내부를 휩쓴 바람이 물건들을 회오리처럼 몰며 남국인 상인의 앞을 막고 선반을 무너뜨렸다.
“출구는 이쪽입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몸이 왜 이리 뜨겁지? 힘을 크게 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저는 괜찮습니다. 일단 단장님과 주커만 경의 피신이 우선이니…….”
그 순간 또다시 공격이 날아들었다. 기척을 느끼고 방향을 추측하기는 했어도 방해하는 바람의 힘 때문에 조절이 쉽지 않았는지 그저 거칠기만 한 눈먼 공격이었다. 유더가 힘을 쓰려 몸을 돌리려 한 것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유더를 감싸 끌어당기며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그의 손에서 발해지자마자 날아들던 공격이 벽에 부딪친 것처럼 반대로 튀어 나갔다. 어딘가의 선반 하나가 또다시 크게 무너졌다.
“…먼저 갈 생각 따윈 없어.”
바람에 뒤섞인 작은 속삭임이 유더의 귀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간다면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