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수없이 많은 마도구를 소유하고 사용해 본 경험자답게, 키시아르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가 쉴 새 없이 마도구를 사용하고 마정석으로 마력을 재충전시키는 동안 나단과 유더는 그의 작업이 잠시라도 끊기지 않도록 발로 뛰며 도왔다.
유더는 일부러 마정석이 있는 쪽에는 발걸음도 들이지 않았다. 혹여나 이전 생의 연이 있는 붉은 마정석을 또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래되어 바스라질 듯한 그림이나 안전이 검증되지 않은 작은 수집품 같은 물건들, 그리고 마침내 직접 나르기 어려울 만큼 큰 물건들까지 전부 복제하고 위장하는 데 성공한 뒤, 세 사람은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쉬는 시간을 가졌다.
“이 보관 마도구들은 네가 챙겨라, 나단. 물품 명단을 작성하는 것도 잊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키시아르의 앞에 쌓인 자루 안에는 수많은 불법 밀수품이 담긴 보관용 마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무게를 경감하고 겉모습을 위장하는 마법이 담긴 마도구를 사용하여 봉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곡식 자루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 괜찮고말고. 기분도 상쾌하고 아주 좋은걸.”
자루를 내려다보는 키시아르의 눈빛은 몹시 즐겁고 쾌활해 보였다.
“이 창고에 있는 복제된 물품들은 어지간한 상급 마법사가 아니라면 알아차릴 수 없을 거야. 추적 마도구까지 적용해 두었으니 경매에서 이걸 사들인 자들을 추적할 때 쓰면 되겠지.”
키시아르가 손거울 형태의 마도구를 집어 들며 낮게 웃었다. 그 마도구가 바로 귀중품을 도난당했을 때 추적할 용도로 사용하는 추적 마도구였다.
“자,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칼라네사를 처리하러 가 볼까.”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뒤 키시아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더는 나단 주커만이 이곳까지 들고 온 자루를 나누어 들고 뒤를 따랐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험한 마약은 이전과 다름없이 허름한 포대 속에 담긴 채 한곳에 쌓여 있었다.
귀해 보이는 마도구나 마정석들보다도 이 칼라네사 몇 포대가 타인 공작에게 더욱 많은 돈을 벌어다 줄 물건이란 점에서, 유더는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흰 가루들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자, 이제 바꿔치기를 해 보실까.”
유더는 나단 주커만과 함께 들고 온 자루를 내려놓았다. 그가 이논을 만나고 오는 동안 키시아르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자루 안에는 보관용 마도구, ‘무한의 병’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이름만 무한일 뿐, 실제로는 다른 보관용 마도구들과 별로 다를 바는 없지만…… 액체나 음식 종류도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마도구란 돈이 있다 해도 갑자기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다. 그런 걸 이리 많이, 그리고 빠르게 공수해 왔다는 건 아마 키시아르 개인이 본래 가지고 있던 물건을 어디선가 가져왔다는 뜻일 터였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준비를 하는 동안 나단 주커만을 따라 무한의 병을 꺼내 놓고 뚜껑을 열려 했다. 그러나 틀어막은 뚜껑이 딱딱해 예상보다 잘 열리지 않았다.
“조심히 여십시오. 힘으로 열리는 병이 아니라 요령이 필요합니다. 깨지면 안 되니 주십시오.”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사내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유더의 손에서 병을 가져가 직접 여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내용물이 손에 닿으면…….”
“위험합니까?”
“아뇨. 흰 가루라 잘 지워지지 않아 흔적을 남기기 쉬우니 조심하라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남국인 사내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과 바람으로 씻어 내고 흔적을 지우면 되니까요.”
“능력을 그리 많이 쓰면……. 아닙니다.”
“무리가 안 되는 선에서 조금씩 쓰는 건 괜찮습니다.”
유더는 무어라 말하려던 것을 그만둔 나단 주커만의 말뜻을 대강 짐작하고 멋대로 선수를 쳐 대답했다.
“…….”
나단 주커만은 속내를 알기 어려운 눈빛으로 유더를 잠시 바라보았지만 이내 도로 묵묵히 병뚜껑을 마저 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심해서 여십시오.”
유더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그의 옆에서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병은 모두 열었나?”
그 사이 칼라네사 가루가 든 포대들을 손쉽게 모두 끌어내려 정돈해 둔 키시아르가 다가와 작업 상황을 확인했다.
“이 병 안에 든 건 곡물가루에 알로스 풀을 빻아 섞은 것이라네. 겉보기에는 칼라네사와 다를 바 없어 보이겠지만, 실제 칼라네사와 달리 환각 증상이나 중독성은 전혀 없고 불면증에 좋지.”
키시아르가 병 하나를 집어 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효능이 있는데, 무엇인지 짐작하겠나?”
키시아르는 어쩐지 유더가 답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는 듯 웃고 있었다.
‘알로스 풀이라면… 말대로 불면증에도 쓰지만, 그보다는 보통 음식물 쓰레기를 묻을 때 함께 쓰지 않던가.’
귀족들이야 직접 쓰레기를 버릴 일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평민들에게 알로스 풀은 좋은 냄새 제거제이자 쓰레기를 빨리 썩게 돕는 역할로 더 많이 쓰였다. 불면증에 좋은 풀은 다른 데도 많지만 썩는 냄새 없이 좋은 비료를 얻기에는 그 풀만한 것이 없었다.
“…혹, 그냥 단순한 바꿔치기를 하시려던 게 아니었던 겁니까?”
“다른 물건과 달리 이건 모조리 바꿔치기를 하면 오히려 골치가 아파질 가능성이 생기겠더군. 그런데 마침 칼라네사의 원료가 되는 풀이 본디 부패에 몹시 약하다는 게 기억나지 뭔가. 포네사와 달리 그것은 썩으면 본래의 효능을 모조리 상실하고 만다지.”
안타깝게도 말이야. 키시아르의 웃는 얼굴을 보며 유더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감각을 느꼈다.
‘그렇군. 부패 확률을 최소화하려 이런 형태로 어렵게 정제했겠지만… 알로스 풀을 빻은 가루를 섞는다면 그조차도 무효화시킬 수 있어.’
알로스 풀의 효능은 그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황족 출신 공작이 알 만한 지식은 아니었다.
키시아르가 보기만큼 귀하게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젠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고생 한 번 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귀족들이 알지 못할 지식을 입에 담는 그는 새삼 놀라움을 주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포대에 담긴 칼라네사 가루를 바꿔치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라네사 가루를 반쯤 덜어 내고서 무한의 병을 대신 포대에 기울이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듯 가벼워 보이던 병 속에서 흰 가루가 순식간에 끝도 없이 흘러나와 내부를 가득 채웠다. 뒤를 이어 나단도, 유더도 각자가 맡은 포대 자루 안에 병을 기울여 가루를 채웠다.
키시아르는 덜어 내어 쌓인 마약 가루들 중 단 한 줌만을 품속에서 꺼낸 주머니에 넣었다. 남은 가루는 무한의 병 속에 옮겨 넣은 뒤, 가차없는 눈빛으로 나단 주커만에게 고갯짓을 했다.
“나가는 대로 처분하겠다.”
“네.”
이제 창고 안은 그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다만 그 내부가 가짜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과, 혹은 대단히 실력 좋은 마법사가 아니라면 알지 못할 터였다.
‘해냈다.’
이전 생에는 누구도 모르는 사이 손쉽게 팔려 나갔을 물건들을 생각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감각이 손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퍼져 나갔다. 그 마지막에는 언제나처럼 키시아르가 서 있었다.
오래된 물건들을 만지고 손보느라 세 사람 모두 그리 깨끗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건 가장 많이 여러 물건을 만진 키시아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먼지가 묻어난 뺨과 땀이 어른대는 이마, 해묵은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망토를 걸친 사내는 모두가 아는 펠레타 공작이라고는 생각하기조차 힘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 모습이 훨씬 더 그다워 보였다면 이상한 일일까.
“…그러면 이제…….”
유더와 달리, 제가 해낸 일에 조금의 뿌듯함도 느끼지 않고 그저 마지막 점검을 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꼼꼼히 훑어본 키시아르가 막 입을 열다 말고 순간 멈칫하며 어디론가로 시선을 옮겼다. 그건 유더와 나단 주커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이 어디선가 강렬한 힘의 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건……!’
유더가 주변을 밝히던 희미한 불꽃을 없애 버리는 것과 동시에 나단 주커만이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세 사람은 각자의 감각에 따라 본능적으로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유더는 몸을 숨기기 적당한 선반 뒤로 몸을 날렸다.
뒤이어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들이 들어온 통로 쪽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술집으로 이어진 문이 터졌나……!’
유더는 오랜 경험에 따라 숨소리를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느리게 가라앉혔다.
곧 낯선 기척과 발자국 소리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쥐새끼가 들어왔다더니, 아무도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