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머리칼을 벅벅 문지른 이논은 제 행동을 잠시 후회하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더는 그의 멋쩍음을 해결해 주기 위해 그가 추측했던 대로 치안 관리단 4층이 정말 피의 보호로 숨겨져 있었다는 이야기와, 대삼림에서 새로이 발견된 마정석 광맥에 대한 것을 알려 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이논은 다행히도 이전의 멋쩍음을 모두 잊은 상태였다.
“마정석 광맥이라……. 그건 확실히 조사를 해 봐야겠네.”
“그럴 생각이야. 파고 들어가면 누가 거기에 마력을 고이게 해 두었는지 알 만한 증거를 찾을 수도 있겠지.”
“‘이전’에는 어땠는데?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 없어?”
유더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의 생에서는 알지 못했던 일들이니 줄 만한 정보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도 없었다. 이논은 뭔가 생각에 빠진 눈으로 유더를 바라보다 불쑥 중얼거렸다.
“뭐든 다 아는 것처럼 굴더니, 너도 모르는 게 많구나.”
“내가 다 알고 있었다면 네게 이렇게 꼬박꼬박 물어보러 오지도 않았겠지.”
“그래……. 그건 그렇지.”
대답한 이논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런데도 너는 왜…….”
“보좌님, 약사님. 우리 점심 먹을 건데 같이 먹을 거면 내려와요.”
그때, 문 뒤쪽에서 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반사적으로 일어나며 이논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아니. 됐어.”
이논도 따라 일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쩐지 문 너머의 믹이 보이는 것처럼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저 믹 슈덴이란 자 말인데. 지식이 풍부하고 대단한 자란 건 알겠지만 나를 가끔 너무 묘하게 쳐다봐서 기분이 나빠.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쳐다본다고?”
“그래.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있어야 대응을 할 텐데,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보기만 해. 그게 더 별로야.”
유더에게는 짐작 가는 의도가 있었다. 믹 슈덴이 지닌 특이한 능력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이 분명했다.
“그 사람은 각성자야. 본질을 보는 눈을 가졌다고 들었어. 네게서 뭔가를 봤을지 모르니 조심해.”
“본질을 보는 눈? 영혼을 말하는 거야?”
그 비슷하지만 무생물에게서도 볼 수 있다고 했으니 아주 같은 건 아니리라. 유더의 설명을 들은 이논은 세상에 별 능력이 다 있다는 욕설 섞인 중얼거림을 토해 냈다.
“그럼 그자가 날 신경 쓴 것도 당연하겠네. 귀찮게 하필 그런 능력을 지닌 놈이 여기 올 건 또 뭐야?”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또 뭐겠어?”
투덜대기는 했지만 이논의 반응은 의외로 깔끔했다.
“그자의 눈에 내 본질이 어떻게 비치든 그쪽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나도 모른 체하면 그만이야. 귀찮긴 하겠지만 아무튼 이유를 알았으니 됐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논은 상대가 제게서 뭘 봤을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많은 나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딱히 궁금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지.’
“너, 점심 먹고 갈 거야?”
“아니. 바로 돌아갈 거야.”
유더는 이논의 질문에 바로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어줄 시간이 없다더니 결국 식사까지 하고 가겠느냐고 묻는 것도 참으로 이논다웠다.
“어, 벌써 가시려고요?”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부엌에서 식사를 차리고 있던 믹이 눈을 크게 뜨며 말을 걸었다.
“권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잠깐 나온 것이라 곧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그래요. 아쉽지만 오늘은 우리도 바쁘니 어쩔 수 없죠. 다음엔 진짜로 한잔하면서 이야기해요.”
유더가 나가는 문 밖까지 따라온 이논은 인사를 건네지도, 그렇다고 들어가지도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라 유더는 재촉하지 않고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내가 얼마 전부터 오래 가라앉았던 기억들을 다시 되짚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어쩌면 너하고 관련된 부분이 좀 있을지도 모르겠어.”
한참 뒤 흘러나온 말은 누가 엿들어도 의심스럽지 않을 정도로 뭉뚱그렸지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얘기 좀 하자. 듣고 싶은 것도 좀 있고.”
“알겠어.”
“그리고 너…….”
말끝을 흐린 이논은 말을 할지 말지 제법 오래 고민하는 듯했으나, 결국 입을 열었다.
“2성 발현을 한 각성자들은 상대 성 쪽에만 끌린다는 게 정말이야?”
“…갑자기 그건 왜?”
“아무튼 맞아, 틀려?”
“대체로는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
일순 몹시 복잡한 표정을 지은 이논이 이내 ‘됐다.’ 하고 돌아섰다.
“내가 준 것들 잘 챙겨. 위에서 해 준 말 잊지 말고.”
그가 하려다 삼킨 말은 무엇이었을까. 유더는 묻는 대신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서 등을 돌렸다.
***
“낮에 약사를 만나고 온 일은 잘되었나?”
“네.”
“연구 진행이 예상보다 성과가 좋다는 말은 나도 들었네. 헬렘이 이논 같은 이가 수도 구석에서 약방을 하고 있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감탄하더군.”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망토 속에 몸을 숨긴 유더는 나단과 함께 키시아르의 뒤를 따르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그 정도로 감탄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봤어.”
“그러셨군요.”
“돌아가면 그에게 성의를 담은 선물에 급료를 몇 배쯤 더 얹어 주어야 할 것 같다네.”
이논이 과연 그걸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유더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한 번 지나쳐 온 길을 다시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단 주커만이 어젯밤 핵을 손봐 둔 붉은사슴 상단 지하실의 보호 마법은 또다시 찾아온 침입자들의 발걸음을 붙잡을 힘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덕분에 키시아르 또한 마법을 사용할 필요성이 없어져, 편하게 사슴뿔 모양의 장치를 움직여 통로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보고에 의하면 여관에 머무는 남국인 상인들은 오늘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다가 저녁이 되자 밖으로 나갔다더군. 빌름 남작이 때맞춰 집무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접촉하여 연락을 할 셈이겠지.”
그리고 그 덕에 빈틈이 생긴 지금이 바로 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키시아르는 빌름 남작의 이상 행동에 대한 보고를 프루엘레에게서 전달받자마자, 그에게 치안 관리단 쪽으로 향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들이 타인 공작의 비밀 창고에 침입해 있는 동안 치안 관리단에서 대기 중인 에버가 프루엘레와 함께 지하 감옥 4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확인하는 작전을 공동으로 수행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일을 빨리 끝내면 그쪽과 합류하는 거지.’
오늘 할 일들을 되새긴 유더는 비밀 창고로 통하는 문을 열자마자 작은 불꽃들을 불러냈다.
거대한 창고를 가득 메운 물건들은 어젯밤과 달라진 구석이 없어 보였다. 남국인 상인들이 없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혹 누군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감각이 한층 예민하게 섰다. 나단 주커만 또한 비슷한 기분인지 평소보다 더욱 무뚝뚝하게 가라앉은 얼굴 위로 언뜻 긴장감이 엿보였다.
“자, 그러면 이제 시작해 볼까?”
이 중에서 긴장하지 않는 이는 오직 키시아르뿐이었다. 여유 만만한 얼굴로 방긋 웃은 사내가 마도구가 가득 쌓인 곳으로 다가가서 몇 가지 마도구를 골라냈다.
“일정 기간 동안 마법으로 가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복제’ 마도구. 그리고 그 가짜를 진짜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줄 ‘위장’ 마도구. 거기에 한 수를 더해줄 ‘보호’에 ‘추적’까지… 전부 최상등품이군.”
그가 필요한 도구를 골랐으니 남은 건 이 공간에 있는 물건들을 가져오는 것뿐이었다. 유더는 나단 주커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모습을 본 뒤, 마도구를 살피는 키시아르의 앞에 섰다.
“단장님, 잠시…….”
“음?”
“이걸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곳까지 품고 온 물약을 꺼내 건네자,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붉은 눈이 의아한 듯 깜박였다.
“뭔가?”
“이논에게 받았습니다. 마력을 소모하여 탈진하는 경우 쓸 수 있는 회복에 좋은 약이라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물건이었기 때문인지, 키시아르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커다란 손 위에서 더욱 작아 보이는 약병을 오래도록 내려다보던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구 진척에 대해 물으러 간 게 아니라, 이걸 받으러 갔던 건가?”
“둘 모두입니다만…….”
“그래. 잘 쓰도록 하지.”
약병을 느릿하게 그러쥔 사내가 주머니에 그것을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지나치게 침착한 인사라고 생각했는데, 불빛 아래 어른어른 엿보이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눈가에 번진 기쁨과 붉은 열기는 무엇으로도 묘사할 수 없을 만큼 환한 빛과 같았다.
“생각해 주어서 고맙네.”
“아닙니다.”
갑자기 숨을 쉬기가 어려워지는 이상한 기분이 찾아들어, 유더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가슴이 쉴 새 없이 가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