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예상 외로 엄청난 속도였다. 키시아르가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그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더라니, 괜한 행동이 아니었다.
유더 자신도 이전 생에서 상대하기 까다롭다 이름난 각종 몬스터 퇴치를 위해 차출되어 보았지만, 죽이는 방법을 안다고 그것들을 연구할 줄 안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전문가라는 호칭을 붙일 때는 솔직히 조금 의문스러웠었는데, 그럴 만하군.’
“그 몬스터가 밥 먹고 소화시키는 모습을 반복해서 관찰하는 동안 알게 된 특이사항은, 소화가 섭취와 동시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형태가 아닌 것 같다는 거야.”
내심 감탄하는 동안 들려온 놀라운 말에 유더는 고개를 돌렸다.
“소화를 저절로 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하루 종일 먹고도 몸이 터지지 않는데?”
“너야 인간이니까 그게 이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어.”
인간이 아닌 이논이 담담하게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그 몬스터가 하루 종일 뭔가를 먹는 건 살기 위해서 마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충분한 마력을 지닌 마정석 조각을 꾸준히 공급받을 경우에는 이전처럼 바로 소화 및 흡수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어.”
작은 페투아멧은 평소 먹이로 주던 야채나 풀에 깃든 희미한 마력들을 흡수할 때는 섭취와 거의 동시에 소화를 했다. 그러나 손톱 끝만큼 작은 조각만으로도 넘치는 마력을 지닌 마정석 조각을 반복해서 계속 먹이자,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뱃속에 들어온 마력을 흡수할 때는 그놈의 배 아래쪽에 숨겨진 독샘이 뻐끔대며 움직여. 소화를 안 할 땐 움직이지 않지. 믹이라는 자가 발견한 거야.”
그 움직임을 토대로 세 사람은 계속해서 연구를 했다. 그리고 페투아멧이 소화와 마력 흡수 작용을 마음대로 조절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래. 지금 그놈의 체액을 가지고 조사 중인 게 그것과 관련된 거야. 전에 생각했던 대로, 네가 흡수한 독성을 활성화시키면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할 것 같아.”
긍정적인 신호에 기분이 한결 밝아졌다. 이논은 유더의 눈에 들어온 빛을 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좋냐? 언제는 힘 따윈 안 돌아와도 상관없단 식으로 신경도 안 쓰더니.”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
지금은 빨리 나아야 할 이유가 확고했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키시아르 때문이었지만,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성 활성화는 어떤 방식으로 시킬 셈이야? 언제쯤 시작하지?”
“위험 여부를 최대한 확인한 후 시작할 거니까… 아무리 빨라도 며칠은 더 걸릴 것 같은데.”
“그건 너무 늦어.”
“왜. 언제까지 모두 끝내야 한다는 기한은 없었잖아?”
유더는 심드렁한 이논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작게 입을 열었다.
“너도 들었을 것 같지만, 곧 빌름 남작과 타인 공작의 의도 하에 열릴 자선 파티와 비밀 경매가 시작될 거야. 나는 그때도 이런 상태로 있고 싶지는 않아. 그때까지는 반드시 모두 회복해야 해.”
“그게 열릴 거란 말을 듣기는 했는데……. 너, 또 거기서 뭘 하려고? 단장이 뭘 시켰어? 아니, 아니면 그냥 관련된 쪽인가?”
갑자기 키시아르에게 불똥은 왜 튄단 말인가. 유더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뭘 하기는. 마병단인 이상 어쨌든 한 곳에는 참여하게 될 테고, 내 힘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나서야 하는데 이런 상태여서는 안 되잖아.”
“거기서 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초조해진 게 아니고?”
유더는 그제야 이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이전 생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거대한 페투아멧을 단신으로 상대했듯, 이번에 또 그런 일을 저지르려던 게 아닌지 의심했던 모양이었다.
“이번은 그런 것 아니야.”
이논은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유더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들여다본 뒤에야 그는 유더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은 듯 볼 근육을 씰룩이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네 말은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
“…….”
“하지만 여기서 더 빨리 진행시키는 건 위험해. 확인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해야 가능성과 변수를 어느 정도라도 파악할 수 있으니까…….”
“회복 가능성만 있다면 위험도는 상관없어.”
“…네놈은 상관없을지 몰라도 나는 상관이 있거든? 방금 전까지 한 말 듣기는 한 거냐?”
간만에 듣는 분노의 고함과 함께 양 뺨이 붙잡혀 한껏 늘어났다. 우스운 꼴이 되었지만 그래도 유더는 이논과 눈을 맞추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나아야 해. 이번만 도와줘, 이논.”
“…….”
볼을 꽉 꼬집은 이논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는 제 손에서 힘이 풀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듯 애꿎은 손가락을 죄인처럼 노려보다가는 하,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어쩌다 이런 놈을 만나서.”
투덜거린 뒤 그는 약재 더미 사이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한창 말리던 중인 듯한 검은 환약이었다.
“이게 뭐야.”
“몬스터 독으로 만드는 중인 약의 시험작.”
긴 설명이 이어졌지만 요약하자면 결국 페투아멧의 독성이 어린 체액을 가공한 뒤 그것을 중화시킬 만한 각종 약재와 마법의 힘을 빌어 만든 약이었다. 이논은 그것이 성분상으로는 최선의 결과를 뽑아낸 물건이지만, 아직 사람에게 적용할 경우의 위험도를 다 확인하지 못해 연구가 끝나지 않은 것이라 설명했다.
“네가 먹어도 확실히 죽지 않겠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진행한 다음에 개량해서 줄 예정이었어.”
“…그러면…….”
바로 내민 손을 이논이 매몰차게 쳐냈다.
“이야기 먼저 들어.”
유더는 그를 더 자극하지 않기 위해 무릎 위에 양손을 두고 바르게 앉았다. 그래도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고 눈썹만 꿈틀거리던 이논이 말을 잇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일단 현재 예상으로는 이걸 먹음과 동시에 약 안에 든 독성과 네 몸 안의 독성이 서로에게 반응하며 현재 네 안에 고착되어 있는 힘의 균형이 깨질 거야. 상당한 고통이 몰려오겠지만 그 부분은 마법으로 키운 약초들이 어느 정도 해결해 줄 테고, 그사이에 너는 흡수의 힘을 활성화시켜 몸에 남은 독성을 완전히 소화하거나 배출하는 거지.”
“흡수의 힘을 내가 바로 쓸 수 있을까.”
“고통을 뛰어넘을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이논이 담담히 대답했다.
“힘이란 건 결국 사용하는 존재의 의지에 이끌리는 도구야. 단순하고 순수한 의지로 발휘한 힘일수록 강력하게 발휘되는 법이지. 그리고 넌 이미 ‘매개체’와 비슷한 힘을 발휘해 본 적이 있으니, 그 경험도 도움이 될 거야. 사실상 그걸 믿고 만든 약이기도 하고.”
그걸 잊지 않는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이논의 말을 듣는 동안, 유더는 새삼스러우면서도 낯선 한 가지 단어를 계속해서 되새기듯 떠올렸다.
‘의지…라.’
“일단 경매 때까지 최대한 더 개량해 보겠지만, 그때까지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하나만 줄게. 네가 힘을 쓰지 않으면 죽겠다 싶을 때만 심사숙고해서 먹어.”
“…알겠어. 고마워, 이논.”
“네가 고맙다고 말하면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찡그리며 대꾸한 이논이 정말 주기 싫다는 얼굴로 환약 하나를 유더의 손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가방을 뒤져 작은 흰색 환약이 가득 담긴 병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 힘을 쓸 때 갑갑했다고 했으니, 그 부분을 좀 낫게 해 줄 만한 것들이야.”
“이건 너무 많은데.”
“조용히 하고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씩 식사 후에 열 개씩 먹어. 나중에 그 독성 환약을 먹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토대를 다져 놔야 하니까.”
약사가 그렇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묵묵히 그 병도 품에 집어넣자 이논이 겨우 눈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 아까 또 뭐가 알고 싶다고 했었지? 마법사가 탈진했을 때 좋은 회복 방법이랬냐? 그냥 잠 잘 자고 밥이나 잘 먹으라고 해. 그럼 끝이야.”
너무 성의 없는 답이 아닌가 싶어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논이 어쩌라는 것이냐는 듯 팔짱을 꼈다.
“왜 그렇게 봐? 떨어진 마력을 강제로 보충하면 오히려 더 몸에 나빠. 애초에 탈진해서 위험할 정도로 힘을 쓴 상황이면 약이 아니라 사제를 찾아야지.”
“…그래, 알겠어.”
“그걸로 끝이냐?”
“그럼?”
들을 답은 다 들었는데 여기서 무슨 반응을 또 하란 말인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 끝을 미묘하게 움직이던 이논이 긴 숨을 토해 내며 ‘아니, 됐다.’ 하고 답했다. 그는 가방 안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 유더에게 거세게 던졌다. 받아 내고 보니 작은 물약이었다.
“가져가.”
“이건 또 뭔데?”
“그냥 기력 회복용 약이야! 가져가기 싫으면 도로 내놔.”
유더는 이논의 손이 뻗쳐 오기 전에 그 약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불퉁하게 굴면서도 결국 정이 많은 걸 숨기지 못하는 저런 부분이 정말로 이논다워 희미하게 웃음이 나왔다.
“가져갈게.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