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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93화 (393/805)
  • 393화

    그 말에 재잘대며 떠들던 입이 딱 다물렸다. 푸른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동그란 눈동자가 이전과는 다른 흥분과 기대를 담아 유더를 보았다.

    “…조력자 임명권 제안?”

    유더는 소리 내어 답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대삼림의 서부 마법사 연합 거점에서 힌, 가케인과 함께 들었던 짧은 이야기를 핀은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기억해. 그런데 그건 왜? 설마… 벌써 주려고?”

    “그렇다고 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은 있어?”

    핀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흥분 가득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어린 짐승처럼 말랑말랑해 보이는 뺨을 붉힌 소년은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려는 듯 보였으나, 왜 이런 제의를 갑작스레 건네는지 궁금해하는 신중함은 잊지 않았다.

    “있긴 한데……. 그거, 나한테만 하는 제안이야? 아니면 대삼림에 있는 힌이랑 가케인도 같이?”

    “네게만 먼저 하는 제안이야. 그 두 사람은 여기 없으니까.”

    “아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유더를 도울 사람이 필요해졌다는 뜻이구나.”

    말하지 않은 이면의 뜻을 바로 읽어 낸 핀의 눈이 씩 가늘어졌다.

    엘더 남매는 때로 마병단에서 가장 어린 지미보다도 천진하고 뒷일을 생각지 않는 듯 보여도 사실 상황을 읽는 눈이나 판단력은 어지간한 성인 단원들보다 뛰어났다. 그건 그들이 보기만큼 순진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해서 임명권까지 미리 쓰려는 건데?”

    유더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타이누에 있는 어떤 사람들을 나 대신 감시하며 조사해 주었으면 좋겠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끔. …할 수 있겠어?”

    “당연히 할 수 있지! 자신 있어!”

    핀이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런데 타이누에 있는 사람이라니, 누구야? 내가 본 적 있는 사람?”

    “아니.”

    유더는 핀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바로 어제 타인 공작의 명을 받고 이곳으로 들어온 남국인 상인들.”

    어젯밤, 타인 공작의 비밀 무역품을 모아 둔 창고와 연결된 술집 겸 여관에서 남국인 상인들을 보았다. 키시아르는 나단 주커만에게 그들을 감시하라 일렀으나, 유더는 제 쪽에서도 그들을 따로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단 주커만과 펠레타 기사단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 기척을 유달리 빠르게 알아차리던 남국인 상인들의 모습에서 무어라 말하기 힘든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힘을 쓴 게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각성자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할 테니까.’

    핀을 미리 조력자로 삼는 방안을 떠올린 건 그 때문이었다. 유더가 바라는 것은 누구도 모르는 사이 위험하지 않을 선에서 남국인 상인들을 꾸준히 지켜보아 줄 눈이었고, 핀은 그 일을 하기에 적절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자유분방한 악동 같은 면모는 동료들 사이에서 조금 제멋대로 움직여도 의문을 사지 않는다. 타인의 경계를 받지 않는 외모와 빠른 상황 판단력을 스스로 잘 알고 이용할 줄 아니 위험을 자초하지도 않을 터였다.

    어차피 마병단 내에서 정보 수집을 전담하는 이들을 모으고자 임명권을 쓸 생각이었으니, 그 시작을 조금 앞당기는 게 그리 나쁜 선택이 되지는 않으리라.

    “단장님께서 이미 주커만 경에게 그자들을 감시하라 말씀하셨지만, 나는…….”

    “펠레타 기사단 말고 우리끼리 조사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는 거지?”

    핀이 곧바로 유더의 뜻을 읽어내며 말을 가로챘다.

    “응. 내가 직접 하면 좋겠지만, 지금 거기까지 신경을 쓰기는 힘들 것 같아서 네게 부탁하고 싶어.”

    “음… 있잖아. 그거 알아? 유더는 참 운이 좋아.”

    기분이 좋은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휜 핀이 갑자기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

    “사실 이건 아직 비밀이었는데 말야, 얼마 전부터 나 혼자서도 이동 능력을 사용하는 데 성공했거든? 이번 일을 하면서 써먹기 딱 좋겠지?”

    엘더 남매는 본래 함께 있을 때 손을 맞잡은 범위 내의 사람이나 물건을 근거리 내로 이동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간 능력이 발전하면서 이동시킬 수 있는 거리가 점점 늘어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설마 따로 있어도 이동 능력을 사용 가능한 수준이 된 줄은 몰랐다.

    이전 생에는 남매가 퇴단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던 발전에 놀란 유더가 드물게 눈을 크게 뜨자, 핀이 반응에 흡족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전에 유더한테 능력 발전 조언 들으러 모두 함께 몰려갔을 때, 기억나? 유더가 우리한텐 이동 능력 사거리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쓸 수 있게끔 하는 수련을 같이 해 보라고 했었잖아.”

    물론 기억한다.

    그건 마병단 수련 방법을 제가 손볼 수 있게 된 직후 있었던 일이었다. 수많은 마병단원들이 몰려와 능력을 더 발전시키기 위한 개인적 조언을 듣기를 원했고, 유더는 하루 종일 시간을 들여 모든 이들에게 답을 해 주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엘더 남매도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쓰려면 우리 둘이 함께 있지 않은 상황을 제일 먼저 생각해 봐야 하잖아? 사실 여태까진 잘 안 되었는데, 타이누로 오고 나서 성공한 걸 보면 강제로 떨어진 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

    어떤 상황에서든 쓸 수 있도록 수련해 보라고 한 게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 노력의 결과로 결국 따로따로 능력을 쓰는 데 성공했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키시아르가 엘더 남매를 떨어트려 둔 결과가 이런 식으로 꽃필 줄이야. 그는 혹 남매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면 힌은?”

    “당연히 힌도 성공했지. 가케인이 다쳐서 빨리 치료받으러 가야 하는데 길이 무너져 막혔을 때 처음으로 해냈대. 대단하지?”

    그건 또 몰랐던 사실이었다. 가케인이 이전 생과 달리 죽지 않고 살아남은 데에는 다른 단원들의 발전도 한몫했던 것이다.

    “그러면 핀 너는 언제 처음 성공했어?”

    “나?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던 핀이 처음으로 입을 다물더니, 콧잔등을 장난스레 찡그렸다.

    “유더가 감옥 가서 조사하는 거 도우러 갔을 때.”

    다음을 기약하며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핀은 당시 타이누 기사단의 기사들에 대한 분노를 아주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빌름 남작의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타러 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개똥을 보고 기사들의 발밑에 던져두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소망이었다.

    “근데 그게… 진짜로 되지 뭐야.”

    기가 막힌 이유였지만 엘더 남매가 각각 동료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단계 더 발전했다면 좋은 일이었다. 유더는 솔직하게 칭찬해 주었다.

    “그랬구나. 둘 다 축하해.”

    “고마워. 하지만 아직 멀었어. 힌하고 같이 더 발전시킬 방법을 찾아낼 거야!”

    핀은 치안 관리단으로 돌아가 에버에게 키시아르의 답을 전하는 대로 임무를 위해 움직이겠다고 말했다. 유더는 남국의 상인들이 머무는 여관 위치와 인상착의를 알려 주고 절대 지나치게 접근하지는 말 것을 당부했다.

    “기척에 무척 예민한 자들 같았어. 조심해야 해.”

    “걱정 마.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의심 못 해. 아, 물론 지금은 나만 있지만.”

    힌과 헤어진 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핀은 아직 자신을 지칭할 때마다 우리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쓸 때가 잦았다. 하지만 멋쩍게 웃는 얼굴에 아쉬움이나 슬픔이 비치지 않는 건 마병단과 키시아르가 남매에게 서로의 빈틈을 충분히 채울 만한 상대가 되어 주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 사실이 조금 기꺼웠다.

    “그럼 이제부터 마병단 비밀 정보팀의 역사적인 첫 임무 시작인가? 완전 기대 돼! 나중에 봐 유더!”

    유더는 즐겁게 떠나가는 핀 엘더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이제 그도 잠시 외출을 다녀와야 할 시간이었다.

    ***

    “뭐야, 너.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와?”

    “너와 잠깐 이야기 좀 하려고.”

    찌푸린 얼굴로 숙소 문을 연 이논이 유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는 말을 툭 내뱉었다.

    “흐음. 마음이 몹시 조급해질 만한 일이 있었나 보지?”

    “…….”

    역시 이논은 키시아르와는 좀 다른 부분에서 감이 지나치게 좋았다. 유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답을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콧김만 한번 흥 내쉬고 문을 조금 더 크게 열어 들어올 수 있는 틈을 내어주었다.

    “일단 들어는 와. 오래 내줄 시간은 없으니까 빨리 이야기해.”

    숙소 내부는 이전에 왔을 때와 조금 달라진 상태였다. 깨끗했던 집안 여기저기에 수상해 보이는 마도구와 종이 뭉치가 널렸고, 먹다 남은 음식 그릇 사이에 포크 대신 펜이 굴러다녔다.

    믹과 헬렘은 페투아멧의 우리를 사이에 두고 앉아 무언가 말을 나누고 있었다. 각자 앞에 종이를 두고 필기를 하며 이야기하는 두 사람은 방문객이 들어왔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대화에만 몰두 중이었다.

    “뭘 보고 있어? 저쪽은 신경 끄고 올라와. 나랑 얘기하러 왔다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사이 계단 위로 올라간 이논이 목소리를 높였다. 유더는 시선을 돌려 이논을 따랐다. 그가 들어간 곳은 작은 침실이었다.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 위에 쌓인 말린 약재에서 이논이 묵는 장소다운 느낌이 한껏 느껴졌다.

    “그래서, 뭘 얘기하려고 온 건데?”

    “연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알고 싶어. 그리고… 마법사가 힘을 지나치게 사용해서 탈진할 경우 회복을 위해 뭐가 가장 좋은지도 같이.”

    “……넌 마법사가 아닌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이논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레몬을 생으로 씹어먹으면서도 표정의 변화 하나 없던 이가 그토록 떫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유더는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고 아는 사람 중에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까.”

    “내 말은……. 아니, 됐다. 말하지 마. 입 열지 마! 됐어!”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갑자기 혼자서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 뒤, 이논은 유더에게서 몇 발자국 정도 떨어져 앉았다.

    “일단 연구 진척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내가 생각지 못한 방법들을 그들이 많이 알고 있어서 상당한 도움이 되었어. 이번에 얻은 지식이 꽤 많아. 특히 헬렘이라는 마법사.”

    이논이 오랫동안 살아온 존재라고는 해도, 그의 지식이 모든 곳에 미치는 건 아니었다. 그는 헬렘과 믹이 몬스터를 연구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제법 감탄했던 듯, 찌푸렸던 표정마저 누그러뜨렸다.

    “아무튼 지금은 그 몬스터의 체액을 뽑아 조사하는 일과 동시에 마정석 조각을 먹여 흡수하고 배출하는 과정을 반복해서 관찰 진행 중이야. 후자는 이미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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