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아직까지 별다른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했겠지만, 알면서도 마병단원들이 염려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일 무엇을 할지 대답해 주었으니, 이제 나도 한 가지 물어도 되겠나?”
생각에 잠긴 유더의 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아직도 제 뒷덜미에 고개를 묻은 사내의 온기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뭔가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독한 술을 한입에 털어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 비결이 뭔가.”
“……그게 그리 궁금하셨습니까?”
“너에 대한 것이니까.”
새삼스럽고도 당연한 일이라는 듯 내뱉은 짧은 대답 속에 섞인 숨결이 간질간질하게 피부를 자극했다. 유더는 제 허리를 감싼 단단하고 큰 손을 내려다보며 어디까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짧게 고민했다.
답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어지간한 술로는 취하지 않습니다.”
“어지간한 것이라면… 그래도 아주 안 취하는 건 아닌가 보군.”
“예. 뭐…….”
그가 취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술이 아니라 몬스터의 피를 탄 술이 필요했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파티에 참가했다가 누군가 그를 노리고 보낸 독주를 마셨을 때였다. 물이나 음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다른 독들과 달리, 그 술을 마셨을 때 유더는 처음으로 ‘취한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죽은 듯 잠잠하던 감정이 깨어나고 차갑던 피부 안쪽에서 불꽃이 피어나는 그 감각은 인간적인 온기를 잊어버린 지 오래된 육신에 상당한 충격을 선사했다.
추후 조사한 결과 그 술에 든 독에는 몬스터의 피가 재료에 일부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몬스터에 약한 몸의 방어력이 떨어지면서 취기가 침범할 틈이 생긴 것이다. 보통 독의 작용과는 달리 취하는 것 이외에는 별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유더는 그 술을 보관해 두고 가끔 취하는 감각을 맛보고 싶을 때 홀로 마시고는 했다. 그 대담한 모습은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음울한 검은 머리칼의 평민 출신 오메가 마병단장을 둘러싼 온갖 흉흉한 소문들에 한 획을 더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독주가 아니라면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이 키시아르에게 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설명을 하려면 독주를 마신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건 아직 말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할 수 있는 영역과 없는 영역. 점점 더 애매모호해져만 가는 그 연약한 선의 경계가 유더의 머릿속을 헝클어뜨리는 사이, 키시아르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래……. 지난번에 함께 나누었던 술의 즐거움은 한계를 알기에는 너무 짧았었지. 이번 일이 끝나면 좀 더 느긋하게 서로의 주량을 가늠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가 말하는 지난번이 언제인지는 뻔했다. 이 숙소 내의 소파 하나를 장렬히 희생했던 리융 주 이야기였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그때 이후 새로 바뀐 소파 쪽으로 향할 뻔한 시선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예. 부르신다면, 가겠습니다.”
딱딱한 대답이지만 그 답이 나오기까지의 짧은 순간 유더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을 생각이 무엇인지, 눈치 빠른 사내가 알아차리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유더의 목덜미 쪽에서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기대하겠네.”
똑같이 추후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계획과 기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일단 유더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손에 힘이 되돌아왔고, 지친 듯 들이마시던 호흡에도 생기가 돌아왔다.
묵직한 무게를 지닌 계획과 달리, 기대에는 무거움이 없다. 이루어져도 그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 온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바로 그 미래를 향한 ‘기대’라는 사실을 유더는 생경하게 깨달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기운이 좀 돌아오셨습니까?”
“이런. 들켰나?”
시원히 대답한 키시아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을 끼친 듯해 미안하지만 괜찮아. 지닌 힘들을 적당히 함께 써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으니, 할 수 있을 때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
“마법과 각성자의 힘을 함께 써 보고 싶으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뭐든 직접 사용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감당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키시아르의 눈빛은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했다. 제 육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힘을 타고난 탓에 그것들을 오히려 제대로 쓸 수 없는 아이러니한 삶을 살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그가 제가 지닌 것들을 포기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사는 게 가장 편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 텐데도 키시아르의 눈빛 속에 깃든 의지는 단 한순간도 꺼진 적이 없었다. 그런 이였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에게 좀 더 조심하라 말하는 건 오히려 그의 의지를 모욕하는 처사다. 유더는 목 끝까지 올라왔던 말들을 삼켰다. 그리고 대신 좀 더 강렬히 자신의 회복을 염원했다.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해. 적어도 경매가 열리는 날까지는.’
***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핀 엘더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치안 관리단에 있는 에버가 보낸 전령이었다.
“어젯밤 빌름 남작이 치안 관리단에서 뭘 했는지 모두 파악했나?”
“네. 단장님께서 예상하신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빌름 남작은 어젯밤 몰래 치안 관리단에 있는 제이머 필 기사단장을 방문했다. 허름한 옷과 망토로 몸을 숨긴 상태였지만 마병단원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기사단장과의 대화를 빠르게 마무리한 뒤 무거운 자루를 든 벙어리 하인 한 명만을 데리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에버는 어둠 속에서 기척을 숨기는 데 능한 에문과 소리에 예민한 조디, 그리고 만일의 경우 변명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핀을 대동하고서 몰래 빌름 남작을 미행했다. 기척에 예민한 기사나 같은 각성자가 붙어 있었다면 대단히 까다로웠겠지만 평범한 사람 두 명을 멀리서 뒤따라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경비병들이 교대 근무를 위하여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지하 3층으로 내려간 남작은, 놀랍게도 3층의 끝부분 벽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자루가 없는 빈손으로 다시 빠져나와 아무렇지 않게 저택으로 되돌아갔다. 에문의 능력으로 불러낸 어둠 속에 몸을 감춘 마병단원들은 그가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다 함께 똑똑히 확인했다.
“유더가 발견했다는 벽이 정말로 감추어진 공간으로 향하는 통로의 문이었던 것 같아요.”
빌름 남작이 빠져나온 뒤 그가 사라졌던 벽을 재차 살피러 간 단원들은 타인 가의 문장이 새겨진 벽 근처에서 손가락 자국 같은 희미한 혈흔을 발견했다. 닦아 내려 한 흔적이 있었지만 급히 움직이느라 깨끗이 처리하지 못한 듯했다.
“혈흔이라. 역시 ‘피의 보호’가 확실하겠군.”
결론을 내린 키시아르는 핀에게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몇 가지 지시를 에버에게 전하라 명했다. 유더는 대화가 길어지는 사이 밖에 먼저 나가서 기다리다가, 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핀에게 다가섰다.
“핀. 갈 때 타고 갈 마차를 불러 뒀어.”
“응? 괜찮은데. 고마워, 유더.”
이곳에 없는 힌과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년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건 나지. 내가 조사를 받고 있을 때 도우러 와 줬는데 그 이후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했으니까.”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엘더 남매를 함께 본 적은 많아도, 개인과 이리 대화를 나누어 본 건 거의 처음이었다. 하지만 대화 주제 때문에 고심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핀이 즐거운 얼굴로 조사 당시 있었던 일 이후로 제가 해 온 타이누 기사단원들의 ‘자그마한 응징’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유더 말을 듣길 잘했어. 필 기사단장 아저씨가 정말 놀리는 맛이 좋거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얼마나 부들부들 떠는지, 그 주변에만 겨울이라도 온 것 같다니까.”
“직접 못 봐서 아쉽네.”
“그치? 지금 같이 가면 볼 수 있을 텐데. 갈래?”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진심으로 아쉽다는 뜻을 담아 대답하자 핀이 아하핫 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유더는 잠시 그의 해맑아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요즘은, 괜찮아?”
이곳에 온 뒤 핀은 한동안 기력이 제법 빠져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나인 힌과 떨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기억을 잃은 이들을 루산과 함께 돌보면서 기력을 조금씩 되찾더니, 타이누 기사들을 골탕 먹이는 일에 골몰하고 있는 요즘은 완전히 전처럼 의욕을 되찾은 듯했다.
‘그래도 혈육과 떨어져 있는 동안 느끼고 있을 어려움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닐 테니까.’
“나? 당연히 괜찮고말고.”
유더가 무슨 의미로 묻는지 바로 눈치를 챈 소년이 밝게 대답했다.
“오히려 다들 너무 신경을 써 줘서 좀 이상해. 힌이 보낸 편지를 보면 힌도 그렇다고 하던데, 설마 유더까지 걱정해 줄 줄은 몰랐네. 이거 이번 편지에 써야지.”
유더는 신이 난 소년을 보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이전에 내가 했던 제안. 아직 기억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