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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91화 (391/805)

391화

‘남국과 교류를 한다는 게 지금의 사막 이북 국가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기는 하지.’

처음에는 거품을 물고 남국과의 교류를 반대하던 이들도, 카치안 황제의 완강한 의지 속에 교역과 투자가 이어지기 시작하자 점차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믿음도 당장 보이는 눈앞의 이익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후 남국에서 온 사자들은 오르 제국이나 타국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오르 제국 황궁에 방문한 남국인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유명한 마병단장 유더 아일에게 제법 관심을 보이고는 했으나, 카치안 황제는 유더가 그들과 접촉하기를 원치 않았다.

당시는 전 대륙에 셀 수 없이 늘어난 각성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각국에서 마병단 같은 단체를 뒤늦게 만들려 노력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했다. 카치안 황제는 남국인들을 포함한 타국의 사자들이 혹여나 제국 마병단이나 각성자 관리 체계에 대한 정보를 빼내 갈까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웠다.

전 대륙에서 각성자의 힘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긍정적으로 통제한 사례로 극찬받은 마병단의 시작은 비록 카치안 황제가 아니었지만, 황제는 그 영광을 제 손에 오랫동안 홀로 쥐고 있기를 원했다. 지닌 힘과 이름값이 남부럽지 않았음에도 유드레인 아일의 운신에 늘 제약이 걸리고 대부분의 활동을 역사의 뒷면에서만 이어 간 데에는 그러한 맥락이 존재했다.

그때는 누군가와 교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각성자와 마병단의 미래를 위해서도 제가 눈에 띄지 않게 운신하는 쪽이 더 나으리라 판단했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카치안 황제와 오르 제국을 위하여 존재하는 기관인데 나서서 좋을 것이 무어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 선택이 다소 아쉬웠다. 남국을 포함하여 좀 더 많은 것들에 관심을 두었더라면 지금 일을 할 때 훨씬 편했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돌아와도 본래 몰랐던 부분이 채워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날이 갈수록 사무쳤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중요한 건 이미 지나간 시간 속의 카치안이나 수상한 남국인 상인들이 아니라, 타인 공작이 들여온 위험한 물건들이 제국 전역에 퍼지는 일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곧 일어날 사건들에서 키시아르를 돕고, 그가 위험하지 않도록 지키는 것만 신경 써도 시간이 모자랐다.

유더는 알 수 없는 남국인 상인들에 대한 고민과 과거의 상념을 접고 키시아르를 돌아보았다. 마도구로 변용했던 얼굴이 사라지고 되돌아온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매끈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유더의 눈에 비친 것은 금빛 머리칼 안쪽 이마에 맺혀 희미하게 반짝이는 물기의 흔적이었다.

그것을 조금 더 자세히 보려 눈을 가늘게 뜨는 것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반사적으로 눈꼬리를 접어 웃는 얼굴은 밤늦게까지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다 온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빛이 났다.

“왜 그리 보지?”

“…내일 단장님께서 비밀 창고를 어떻게 하실 계획인지 생각해 보던 중이었습니다.”

유더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게 그리 궁금했나?”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매끄럽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입고 있던 검은 망토를 벗었다.

“할 일은 간단하네. 우린 내일 그곳에 들어가 물건을 바꿔치기할 거야.”

밤나들이의 흔적을 간단히 지우고 완전히 평소와 같은 펠레타 공작으로 되돌아온 사내가 평온한 목소리로 답을 알려 주었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반문했다.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 창고 내에는 세 명이 옮기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물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랬지.”

“그 모든 물건을 짧은 시간 내에 바꿔치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럼. 있고말고.”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숙소 안이라 그리 비밀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 무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걸음을 옮겼다.

“더 가까이.”

“…….”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키시아르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자마자 뻗어 나온 손이 춤이라도 추듯 몸을 끌어당기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의 무릎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아 배를 끌어안겨 목덜미 뒤에 와 닿는 머리칼의 감촉을 느끼고 있으려니, 이전 생의 기시감이 참으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난 치는 방식 하나는 똑같기 그지없군.’

다만 달라진 건 이전이라면 이런 행동을 당하자마자 바로 일어나려 애썼을 유더 아일이 지금은 한숨만 한 번 내쉬고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키시아르가 굳이 이런 자세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야, 이 정도 장단쯤은 맞춰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뭐라고 한마디쯤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안 하나?”

“놀라길 바라셨다면 지금이라도 놀라 보겠습니다.”

“아니. 괜찮네.”

웃음 띤 목소리가 목덜미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듣는 이로 하여금 경계를 무너뜨리고 마음을 한없이 무르게 만들어 버릴 것만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뒤이어 등 뒤에서 향을 들이마시듯 숨을 깊이 마시는 소리가 들려오자 어쩐지 기분이 한없이 나른해졌다.

‘……아. 그런가.’

유더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 행위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단순히 이전 생의 같은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릇이 넘쳐흐르기 직전이 되어 외부에서 스스로를 격리하고도 참지 못해 밤늦게 유더를 찾아왔던 키시아르가 내보였던 짧고 강렬했던 접촉이 지금 느껴지는 감각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하기는, 생각해 보면 짧았던 밤나들이 내내 키시아르는 마법과 마도구를 사용했으며 심지어는 각성자의 힘까지 썼다. 마법을 쓰는 건 다른 힘을 쓸 때보다 더 힘들다고 했었으니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도 평소보다 힘들 터였다.

‘나단 주커만이 크게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문제는 없겠지만…….’

아까 그의 이마에서 엿보았던 물기는 착각이 아니라 분명 땀이었다.

“…….”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 속에 뒤섞여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는 감정들이 유더에게서 언어를 앗아갔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키시아르가 호흡 속에서 내뱉을 말을 기다렸다.

“…우리는 바꿔치기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돼. 그 창고에 있던 수많은 물건들이 우리를 위해 도움을 줄 테니까.”

“…….”

“무슨 뜻인지 알겠나?”

과연,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창고 내부에 쌓여 있던 수많은 마도구와 마정석들을 떠올림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불꽃 같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거기 있던 마정석과 마도구를 이용해 바꿔치기를 할 생각이란 거군.’

마도구는 마력이 거의 없는 사람도 사용할 수 있다. 마력이 있다면 좀 더 강력하고 섬세하게 마도구에 깃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마도구의 핵이 되어 주는 마정석의 마력을 통해 어렵지 않게 힘을 쓸 수 있었다. 일회용 마도구가 아니라면 설령 도구에 깃든 마법의 힘이 다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마정석을 이용하여 다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창고 내부에는 여러 가지 힘을 지닌 마도구와 그런 마도구들의 힘이 다해도 계속해서 힘을 공급해 줄 수 있을 마정석이 수도 없이 많았다!

유더는 고개를 돌려 저를 끌어안은 사내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마주 보았다. 이번만은 정말 순수하게 그의 잔머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창고에 들어선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내가 마도구 수집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사람들이 마도구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야.”

마도구 중 가장 흔한 것은 귀중한 물건을 작게 넣어 보관하는 수납 관련 마법의 힘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흔한 것은 귀족들이 지닌 보물을 침입자들의 시선에서 가려 주는 위장 관련 마법이었다.

그 어떤 기상천외한 마도구가 새로 나와도 저 두 가지 마도구의 아성을 위협할 수는 없었다. 마법사를 고용하기 어려운 귀족들에게는 마도구만큼 편리한 금고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있으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일도 없고, 아주 편히 일을 끝낼 수 있겠지.”

키시아르 같은 자가 들어와 그런 짓을 저지르고 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내일 일으킬 사건을 생각하듯 낮게 웃은 키시아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칼라네사만큼은…… 조금 직접적인 바꿔치기를 해 둘 생각이네. 다른 물건들과 달리 위장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야.”

“흰 가루는 구하기 쉬우니 문제없겠군요.”

“역시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알아 주는군.”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제 손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찬 웃음을 흘렸다.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하군.’

하지만 그 속 시원함을 위해 키시아르가 내일도 힘을 써야 한다는 사실은 그리 기쁘지 않았다.

거사는 내일 밤에 이루어질 테니, 그전까지는 시간이 있다. 유더는 낮 시간을 틈타 이논이 있을 헬렘과 믹의 숙소에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에버와 다른 이들은 빌름 남작이 치안 관리단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냈을지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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