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90화 (390/805)

390화

벽 바깥은 추측했던 대로 어느 술집의 지하실이었다.

오래된 나무 술통과 자루에 마구잡이로 담긴 식료품 더미에서 나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 사람이 모두 빠져나온 뒤 도로 닫힌 벽은 밖에서 보면 비밀의 문이 숨겨져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기척이 없는 틈을 타 1층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꽉 차 왁자한 테이블 때문에 누군가 지하실 쪽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는… 어디인지 알 것 같습니다.”

나단 주커만이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저희가 내내 살피던 유흥가에 위치한 가게 중 한 곳입니다. 이곳이 중간 거점이었군요.”

“새로 오신 손님이시오?”

그때, 그들을 손님으로 오해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얼굴을 마도구로 바꾼 키시아르가 태연히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예. 그런데 자리가 없어 보이는군요.”

“자리야 만들면 생기는 법이지. 거기, 엉덩이 좀 붙여!”

사내가 구석 자리에 앉은 술꾼들의 등짝을 밀어내자 곧 세 명이 앉을 자리가 생겨났다. 키시아르는 자리에 앉자마자 진짜 손님처럼 아무렇지 않게 맛있는 메뉴를 추천받고, 제법 독하다는 특산 과실주 세 잔까지 알차게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사내가 음식을 가져다주러 떠난 동안 유더는 조용히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온 건 바로 옆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술꾼들의 목소리였다.

“에이! 성문 봉쇄가 풀려서 이제야 좀 마시나 했는데 좁아터져서 살 수가 없어.”

“타이누 밖에서 들어온 놈들이 많아져서 그렇지 뭐.”

“아, 그 경매인가 하는 것 때문에?”

“그래. 여기 2층 여관에도 아까 멀리 상단에서 왔다는 자들이 묵겠다고 왔더라고. 그러니 용병처럼 보이는 놈들한테는 시비를 걸지 마. 위험하니까.”

키와 덩치가 큰 데다 검까지 찬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을 흘끔댄 술꾼들이 조금 겁을 집어먹었는지 조용해졌다.

“우릴 경매 때문에 들어온 용병으로 생각하나 보군. 벌써부터 이런 곳까지 소문이 퍼졌다니 놀라운데.”

키시아르 또한 그 소리를 들은 듯 낮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상단들이 들어오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상단이라고 신고한 뒤 타이누로 들어온 자들에 대한 보고는 아직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나단?”

“…예. 어떻게 된 일인지 재차 확인해 보겠습니다.”

경매나 파티 때문에 타이누로 들어오는 이들을 확인하는 건 에버와 나단의 몫이었다. 망토의 모자 속에 얼굴을 숨긴 나단 주커만의 눈빛이 한결 날카로워졌다.

“돌아가시는 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 이곳에서 바로 출발해야겠지. 상단 쪽에서 기다릴 이들에게서 연락은 아직…….”

“…저자들이 그 상단 사람들인가?”

“그래. 손을 봐. 남국인이 확실하다니까.”

유더는 나단 주커만과 키시아르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 앞에 놓인 음식과 술잔에 의미 없이 시선을 주다가, 옆자리 술꾼들의 수군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2층 숙소 쪽에서 세 사람이 내려오는 중이었다. 한겨울처럼 두꺼운 옷을 걸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이 하나같이 붉었다.

‘멀리서 온 상단 소속이란 이들이… 남국인이었다고?’

이곳은 타인 공작의 비밀 창고로 들어서는 문이 숨겨져 있는 술집 겸 여관이다. 그런 곳에 묵으러 온 상인들이 남국인이라면, 짐작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의 시선도 같은 곳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장님.”

“일단 지켜보지.”

남국인 상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듯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주방 안에서 나이가 많이 든 노인이 빠져나와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한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음식을 나르는 이들에게 중간중간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보니 그가 바로 이 술집의 주인인 듯했다.

‘시끄러워서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데.’

바람의 힘을 사용할지 말지 고민하며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문득 남국인 상인 중 한 사람이 고개를 퍼뜩 돌렸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유더가 있는 쪽 어귀를 향하고 있었다.

‘보통 눈치가 아니군.’

등 뒤가 서늘해졌으나 유더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주문을 받는 이를 부르려 한 척을 했다. 계속해서 유더가 있는 방향을 훑던 남국인 상인의 시선이 다가오는 직원에 가려지며 이내 사라졌다.

“주문 더 하시겠수?”

아까 주문을 받으러 온 이와는 다른 이였다. 피로에 찌든 목소리 속에 낯선 이들을 향한 경계가 얼핏 엿보였다. 유더는 주문받는 이의 등 뒤에서 노인과 함께 지하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남국인 상인들의 모습을 살피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이 술을 한 잔 더.”

“…지금 앞에 놓인 것도 덜 마신 것 같은데 또 달라고?”

유더는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단숨에 목구멍 안에 털어 넣고 거세게 내려놓았다.

“이제는 비었지.”

높은 도수 덕에 독한 향이 식도를 타고 퍼졌지만 어차피 그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을 터였다. 남자는 유더가 내려놓은 잔을 바라보며 눈을 껌벅이다 찌푸린 얼굴로 잔을 들고 얌전히 돌아섰다.

“주량 자랑하려 드는 술꾼 놈들 그간 많이도 봤지만 저걸 한입에 마셔 버리는 미친놈은 또 처음이구만…….”

무어라 말하든 말든 남국인 상인들의 눈을 피하는 목적은 이뤘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유더는 그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젖은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아 내면서 키시아르를 돌아보았다.

“…단장님. 따라가실 겁니까.”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갑자기 그리 마셔도 괜찮겠나?”

키시아르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물었다. 무엇이 그를 그리 즐겁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는 이런 것으로는 취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그거참 자세히 물어보고 싶은 말인데……. 잠깐. 다시 돌아왔군.”

당연히도 그 말은 주문을 받은 이가 다시 돌아왔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하실로 내려갔던 남국인 상인들과 늙은 주인이 어느새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느긋한 걸음걸이나 태도를 보아하니 침입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없는 듯 보였다.

그들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찢어졌다. 주인은 자신이 있던 부엌 쪽으로, 그리고 남국인 상인들은 여관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평범한 갈색으로 위장한 키시아르의 눈동자가 그들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훑었다.

“……프루엘레 공자에게 조사를 명하기를 잘했군. 앞으로는 저들의 동향 또한 철저히 감시해라, 나단.”

“네.”

“그러면 이제 일어나지.”

일어난 키시아르가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음식값 치고는 생각보다 많은 액수였다.

“너무 많이 두고 가시는 것 아닙니까?”

“좋은 구경을 한 값은 아끼지 않는 주의거든.”

독한 술을 한 번에 마시는 게 좋은 구경이라면, 그 돈은 제게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쨌든 돈을 내는 건 키시아르였으므로 무어라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술집을 나서서 주변을 확인했다. 나단 주커만은 붉은사슴 상단 건물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말하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상단 건물 앞에 다시 도착하자, 앞을 지키고 있던 펠레타 기사단원들이 유령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고, 공작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2시간이 다 되어 가는 참이라 슬슬 연락을 드리려 했었습니다만…….”

“그렇게 되었네. 일은 잘되었으니 걱정은 말고. 마차는 어디에 두었지?”

그들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차에 올라 빌름 남작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부의 옷을 입은 나단 주커만은 정중히 경례를 한 뒤 먼저 사라졌고,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숙소로 향했다.

밤의 어둠 속을 걷는 동안 키시아르는 내내 말이 없었다. 유더 또한 침묵 속에서 벌써 모습을 드러낸 남국인 상인들과 비밀 창고에 대해 생각하느라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내일 다시 오자고 했지. 키시아르가 뭔가 미리 해 둘 생각인 건 확실한데… 뭘 하려는 걸까.’

남국인 상인들이 벌써 이곳에 와서 창고의 위치를 확인했다는 건 타인 공작의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는 증거다. 프루엘레는 그들이 그저 평범한 상인이라 말했었지만, 직접 마주한 남국인 상인들은 어쩐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남국인 상인들이라… 이전 생에 본 적은 없는 자들이지만…….’

이전 생에서 카치안 황제가 서부를 되살리기 위한 교역에 한창 힘을 쓰던 시기, 오르 제국은 남국과도 제법 교류를 했다. 사막 이북 국가들 사이에서는 남국에 대한 인상이 전통적으로 그리 좋지 않았었기에 그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남국은 수많은 부족으로 나뉜 데다 언어도, 사회 체계도 사막 이북 국가들과는 모든 면에서 다른 낯설고 신비한 곳이었다. 오래된 흰모래 전쟁 이후로부터 사막 이북의 나라들이 그들을 좋지 않게 여겨 왔듯, 그들 또한 이북 나라를 믿지 않고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카치안 황제의 정책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남국은 그 일을 발판삼아 사막 이북 국가들과 천천히 국교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그리 보면 그들에게는 카치안 황제가 몹시 고마운 존재였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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