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나서 내일 다시 오자고.”389화
“왜 내일입니까?”
“경매가 열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기다릴 수는 없지 않겠나?”
키시아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방금 전까지 유더가 생각했던 바와 일맥상통했다.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따위는 없음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멈칫하자, 키시아르가 그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미소를 보냈다.
“아무래도 나보다 보좌가 더 큰 아쉬움을 품고 있었나 보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겠나. 오히려 그런 반응을 해 주길 바라서 데려왔는데.”
그러길 바라 데려왔다고? 유더는 생각지 못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 잘못 들은 말이 아니라는 듯 나직한 질문이 들려왔다.
“이런 곳에 아직 회복되지 않은 보좌를 함께 데리고 온 이유가 무어라 생각했나?”
“그거야…….”
그 사실에 굳이 의문을 품지 않았었던 유더는 말끝을 흐렸다.
“당연히 제가 보좌라서 데려오신 줄 알았습니다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키시아르가 소리를 내어 낮게 웃었다.
“두 가지 이유라네. 프루엘레 공자가 얻어 온 정보를 토대로 이번에는 크게 위험할 일이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 첫 번째. 그리고 이런 방면의 경험을 쌓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 두 번째.”
“…….”
“나단이나 펠레타 기사단은 이런 일을 제법 많이 해 보았지만 마병단은 이번이 처음이지. 내 보좌의 유능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이런 경험은 없을 테니 함께 오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네.”
그런 생각으로 데리고 온 줄은 몰랐다.
‘…어쩐지 나단 주커만이 동행하는 내내 지나치게 묵묵하다 싶더니.’
그는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유더가 동행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했던 모양이었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 라 오르가 유더를 차기 단장으로 결정한 뒤 이것저것 가르쳤던 기억은 있었지만, 그건 다소 일방적인 가르침이었지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유연하게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지금의 유더는 그런 가르침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기분만은 몹시 새삼스럽고도 이상했다.
유더의 묘해진 표정을 무어라 생각했는지 키시아르는 눈을 살짝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말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갈 생각은 없으니까.”
그 부드럽고도 싸늘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몸 안쪽에서 타오르던 불쾌한 분노의 불씨가 소리 없이 사그라졌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확고한 반응이었다.
키시아르가 그렇게 말했다면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무엇보다도 단단한 믿음이 유더의 안에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자, 그러면 이제 출구를 찾아보지.”
그들은 올라가는 출구를 찾기 위해 잠시 흩어졌다. 물건으로 꽉 찬 드넓은 창고에서 어둠을 더듬어 나아가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지만, 여기 있는 세 사람은 그 정도는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유더는 끝도 없이 늘어선 선반을 따라 걸었다. 그가 향한 곳은 마정석이 보관되어 있는 구역이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하나같이 크기가 손바닥만 하고 색도 영롱하기 그지없는 최고급 마정석들이 평범한 돌멩이처럼 굴러다녔다. 마법사는 물론이요, 평범한 이들도 보자마자 탐욕에 눈이 뒤집혔을 광경이나 유더의 시선은 마정석들을 이곳에 아무렇게나 쓸어모아 두었을 이들보다 더욱 차갑기 그지없었다.
저 정도로 큰 마정석들은 마법을 위해 쓰이기보다는 주로 장식용으로 가공된다. 보석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마력이라는 신비한 힘까지 지니고 있으니 돈 많은 이들의 수집품으로는 그만이었다. 유더는 마정석 수집 따위에 열을 올리는 이들도, 그것에 의미를 두는 마음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만은 예외로 두었다. 다름 아닌 ‘첫 비밀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온 뒤 카치안 황제에게 하사받은 붉은 마정석 지팡이였다.
사실 그것은 각성자에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물건이었다. 마법사들과 달리 각성자는 마력을 이용하지 않는다. 이미 가공된 마도구 상태라면 모를까, 순수한 마정석 상태에서는 그저 쓸모없는 장식품일 따름이었다. 그것을 받친 검은 가시나무 또한 상으로 하사하는 지팡이를 만들 때 흔히 사용하는 흰 자작나무나 초대 황제가 좋아했다는 고결한 사과나무가 아닌, 쉽게 썩고 연약하기 그지없어 세공용으로 잘 쓰지 않는 나무였다.
카치안 황제도 그 마정석 지팡이가 유더에게 그리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마병단 단장의 상징으로 그것을 내렸다면 그런 점 따위에는 연연할 수 없는 법이었다.
흰 단장복, 그리고 붉은 마정석을 박은 검은 가시나무 지팡이.
그것들은 곧 사람들이 유드레인 아일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올리는 유명한 상징이 되었다.
마병단 단장이 즐겁고 행복한 자리는 결코 아니었지만 유더는 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제 손에 쥔 그것들을 자의로 놓으려 생각한 적이 없었다. 키시아르에게서 강제로 넘겨받은 자리이고 카치안이 일부러 내민 쓸모없는 장식품이라 해도 일단 제가 지켜야 할 것이 된 이상 그 모든 건 당연히 제 몫이었다. 짊어진 이상 책임을 지고 이끌어야 한다 생각했던 마병단처럼, 지팡이 또한 다른 것들에 이렇다 할 욕심을 내지 않았던 유더가 고집스레 지켜 온 자존심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자존심을 넘어 집착에 가까웠나 싶기는 한데.’
세계의 이상을 감지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을 후회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제가 지켜온 것들을 타인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큼은 격렬한 분노와 허탈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조차도 사라졌다. 죽고 나서 다시 되돌아온 뒤 유더가 벗어난 건 단순히 단장 자리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제가 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흰 단복과 지팡이의 무게였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스스로의 뒤통수는 보지 못한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던 중, 유더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어느 선반 위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작은 불꽃이 내는 희미한 불빛 아래서 문득 신경 쓰이는 붉은빛을 본 듯했기 때문이었다.
“…….”
착각인가 싶어 불꽃의 크기를 조금 더 키워 보았지만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마정석 중에서도 유난히 커다란 붉은 돌이 빛 아래서 찬란한 빛을 냈다. 시간이 지났다 해도 오랫동안 익숙해진 물건을 몰라볼 리 없었다. 그것은 유드레인 아일이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에 박혀 있던 바로 그 마정석이었다.
‘…지팡이 생각을 했다고 설마 이런 곳에서 바로 마주칠 줄이야.’
떨떠름했지만 생각해 보니 다시 마주쳐 보았자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했다. 이제 저것은 유더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평범한 마정석일 따름이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에 이게 있다는 건… 이전 생에서 불법 무역으로 들여온 마정석을 누군가 카치안 황제에게 바쳤었다는 건가.’
아마도 그건 높은 확률로 타인 공작 측 사람일 터였다. 카치안 황제가 타인 공작의 비밀 무역 건과 아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했었지만, 그 증거가 적나라하게 눈앞에 드러나는 건 기분이 다소 더러웠다.
“무얼 그리 보고 있지?”
그때,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민하게 고개를 돌린 유더는 제가 보고 있던 마정석을 함께 보고 있는 키시아르를 발견하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기척 정도는 내 주십시오.”
“놀라지 말라고 일부러 발소리를 내면서 왔는데도 전혀 모르던걸.”
유더는 할 말이 없어 바로 화제를 돌렸다.
“출구는 찾으셨습니까.”
“나단이 찾았네. 먼저 살펴보고 오겠다기에 그사이 보좌를 데리러 왔지.”
대답한 키시아르는 유더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주제를 다시 마정석 쪽으로 되돌렸다.
“그런데 저 마정석은 왜 그리 뚫어져라 보고 있었지?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나?”
“아뇨. 저건…….”
유더는 마정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를 죽이고서 받은 상을 여기서 다시 만나 쳐다보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다른 마정석보다 더 크기에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까 싶어 잠시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확실히 크긴 하군.”
수긍한 키시아르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내부에 잠재된 마력이 다른 마정석보다 많기는 하지만, 그 외의 특별한 점은 없어. 혹 이게 마음에 드나?”
“아뇨.”
유더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렇게 생긴 마정석은 앞으로도 절대 손에 쥐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것이 지나치게 진심 어린 답이라는 사실을 느꼈는지 키시아르가 장난스러웠던 표정을 거두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시선을 피해 몸을 돌렸다. 마정석과 흡사하게 닮은 붉은 눈동자가 나란히 있는 꼴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처음에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자 나단 주커만이 침착한 얼굴로 다가왔다.
“출구는 저쪽입니다. 중간까지 올라가니 위층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기에 일단 다시 내려왔습니다.”
나단 주커만이 찾아낸 계단은 둘둘 말린 종이가 가득한 선반 뒤편에 있었다. 문을 열고 따라 올라가자 그의 말대로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사람 기척과 목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올라갈수록 점점 커진 소리들은 문 앞에 서자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해졌다.
‘…맥주 하나 가져오는 게 뭐 이리 느려! 그쪽에 있는 세 번째 통에서 따라오라고 내가 몇 번을…….’
‘새 접시는 아직이야?…….’
몇 마디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문 뒤에 있을 공간의 정체가 훤히 파악되었다.
“…술집인가 보군요.”
“그런 듯하군.”
문 뒤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들은 잠시 후 점점 더 멀어지다 사라졌다. 정적이 찾아온 뒤 약간의 시간을 가늠하고 나서, 키시아르가 문을 살짝 두드렸다. 속이 꽉 찬 무거운 소리가 났다.
“벽으로 위장한 문인 것 같은데……. 안에서는 쉽게 열 수 없도록 만들었군. 어디 한번 밀어 볼까.”
“제가 하겠습니다.”
유더가 나섰으나, 키시아르는 고개를 저었다.
“팔 힘만으로는 안 돼. 다행히도 내가 지닌 힘은 이런 일에 적당하지.”
유더는 키시아르가 지닌 각성자의 힘을 그 순간 새삼스레 떠올렸다.
무언가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능력.
그것을 떠올림과 동시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상태에서 문이 묵직하게 밀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빠져나갈 정도의 틈이 벌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