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88화 (388/805)

388화

“나단.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나단 주커만이 어렵지 않게 문을 열었다. 본디 이곳의 책임자였던 글레힘 빌름의 상태가 엉망이 되었으니 열쇠를 몰래 확보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였다.

열린 문 안쪽의 풍경은 전과는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어둡지만 깨끗했던 복도는 간곳없이, 여기저기 부서지고 더럽혀진 광경이 눈에 띄었다.

‘잔해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니 청소보다는 비밀 유지를 더 우선시했나 보군.’

그 외에도 달라진 점은 하나 또 있었다. 분명 똑같은 구조임에도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듯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유더는 그것이 아마 이 지하실에 걸려 있다던 보호 마법이 깨진 탓이리라 짐작했다.

‘이전에 나단 주커만이 홀로 잠입했을 때 가져온 정보로는 나그란의 별이 이곳 중간까지 갔다가 탈출했다고 들었으니, 걸려 있던 마법들도 그때 많이 깨졌겠지.’

덕분에 그들이 들어가기에는 한결 편해졌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입구 주변의 보호 마법은 거의 깨졌군. 보강된 흔적이 없으니 이대로 나아간다.”

주변을 둘러본 키시아르 또한 유더의 생각과 일치하는 판단을 했다. 그들은 소리를 죽여 신중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하실에는 방이 많았으나, 키시아르는 그 모든 방을 전부 살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비밀 통로는 오직 단 한 개의 방에만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군.”

“그 방은 어떻게 찾으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네.”

그런 시간 낭비를 할 일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 프루엘레 공자를 글레힘 빌름에게 보내지 않았겠나? 시원하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망설임 없이 앞서 나가다가는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안쪽에 있는 문, 보이나? 사슴뿔 장식이 있는 곳.”

“네.”

키시아르가 가리킨 문 옆에는 숫사슴 뿔 모양의 촛대걸이 장식이 달려 있었다. 모든 문에 비슷한 장식이 존재했지만, 사슴뿔 모양을 한 건 그것뿐이었다.

“저기라고 하더군.”

그러나 키시아르는 바로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는 시선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읽어내듯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 주변의 마력 흐름이 어그러진 듯해. 공간 전체에 걸린 보호 마법 일부가 파괴되면 나머지에도 영향이 가서 골치가 아프단 말이야. …나단.”

“네.”

“이곳에 걸린 보호 마법진의 핵은 저쪽 방 안에 있다. 이걸 가져가서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키시아르가 품속에서 마정석이 박힌 마도구 하나를 꺼내 던졌다. 그것을 받아든 나단 주커만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고는 키시아르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본래의 위력을 다소 잃은 보호 마법이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를 경계하며 모습을 드러냈지만 나단 주커만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가벼운 발놀림으로 바닥에서 치솟은 마법진을 피하고, 때로는 검을 휘둘러 가볍게 파괴하면서 방문을 열고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감싼 공기의 흐름이 훅 바뀌었다. 마력의 흐름이 변한 것이다.

“이제 되었군.”

나단 주커만이 돌아오는지 보지도 않고 결과를 읽어낸 키시아르가 손을 올려 입 안쪽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의 주변에서 금빛 마력이 일어나며 때아닌 바람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유더는 검게 가라앉은 제 왼쪽 눈 안쪽에서 찌릿한 감각을 느끼고 어깨를 흠칫 굳혔다.

‘……뭐지?’

그 감각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키시아르의 손을 타고 퍼진 마력이 주변 공간을 메우며 환한 빛을 뿌렸다. 유더는 찌릿거리는 왼쪽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렸다. 빛이 사라졌을 때, 그의 왼쪽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슬쩍 손을 대 보아도 여태까지와 다를 바 없는 캄캄한 어둠만 펼쳐져 있을 뿐, 변함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지?”

마법을 끝낸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닙니다.”

유더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하게.”

반복하여 고개를 젓고 나서야 키시아르는 마법을 완전히 마무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보호 마법과 경계용 마법들을 잠시 멈추게 해 두었으니 이제 비밀의 문을 열어 보지.”

사슴뿔 장식을 향해 나아간 키시아르는 긴장감 없는 태도로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그가 장식을 붙잡아 한 바퀴 돌리고 반대 방향으로 두 바퀴 돌린 뒤 손을 떼자, 잠시 후 안쪽 어디선가 우르릉 하고 무겁게 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동안 울리던 소리가 잦아든 뒤 키시아르는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 안은 정상적인 방이 아니라, 어딘가로 내려가는 계단의 입구가 되어 있었다.

‘별 장치를 다 해 뒀군.’

한눈에 보아도 아주 오래전부터 공들여 만들어 둔 장치들이었다. 그들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뒤이어 드러난 곳은 길고 어두운 복도였다. 깨끗한 것으로 보아 여기까지는 확실히 나그란의 별이 들어오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이 끝에 타인 공작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 무역 교역품들이 있겠지.’

지하 통로는 생각보다 꽤 길었다. 여기까지 올 이라면 경계하지 않아도 되겠다 판단한 듯, 통로에는 이렇다 할 위험 요소가 없었다. 유더는 걸어가는 동안 방향과 거리를 대강 가늠해 보았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라서 방향 파악이 어렵기는 했지만, 그들이 이전에 파악했던 옆 거리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확실한 듯했다.

“올라가는 길이 보입니다.”

나단 주커만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멀지 않은 곳에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통로의 끝이었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 그 끝에 위치한 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열린 틈 너머는 아주 어두웠고,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유더는 지하실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손을 올렸다. 갑갑한 감각이 찾아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불꽃을 불러내자 곧 내부 광경의 일부가 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그들이 들어선 곳은 거대한 지하 창고였다. 수많은 물건들이 전에 붉은사슴 상단 지하실에서 보았던 마도구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유더는 이곳에 있는 물건들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구역별로 분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느 곳에는 반짝이는 마정석들만 놓여 있었고, 또 어느 곳에는 그런 마정석을 가지고 만들었을 마도구들만 쌓여 있기도 했다.

그러나 키시아르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그런 눈에 띄는 물건들 쪽이 아니라, 무언가를 그득 담아 둔 허름한 자루가 쌓인 공간이었다. 그가 검을 뽑아 자루를 살짝 찌르자, 벌어진 틈 사이로 흰 가루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그 가루를 찍어 든 검지 손가락을 엄지로 비벼본 사내가 혀를 내밀어 맛을 보는 모습을 보고 유더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위험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네. 음… 생각대로 이건 칼라네사군.”

손을 턴 키시아르가 자루를 내려다보며 온기 없는 눈빛을 보냈다.

“칼라네사가 뭔지 알고 있나, 보좌?”

“…모릅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리 대답하는 게 맞을 것이다. 철렁한 가슴을 가라앉히며 대꾸하자 키시아르가 여유롭게 몸을 돌리며 대답해 주었다.

“제법 뛰어난 진통 성분을 가졌지만 누구도 진통제로는 쓰지 않는 마약이라네. 환각성과 중독성이 지나치게 강해 다루기 어렵고, 과용하면 충격으로 죽음에 이르기도 하지.”

“…….”

“몇 년 전 타국에서 알음알음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는 연초의 형태로 반입되었었는데, 이런 가루 형태는 나도 실물을 처음으로 보는군.”

진통 성분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포네사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어 이름도 대담하게 그것을 따 지어졌다는 위험한 마약.

하지만 황실에서 철저히 관리하는 포네사와 달리, 칼라네사는 타국에서 밀반입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무분별하게 퍼져 나갔다. 유더가 이전 생에서 그 마약을 처음 본 것은 남부에서 일어났던 불법 격투장 사건 때였지만, 이후에도 그 마약은 비밀리에 거침없이 귀족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며 비밀스럽고도 재미있는 유희거리처럼 취급되었다.

파티를 다니다 보면 칼라네사를 넣은 연초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면서 몽롱하게 늘어져 있는 이들을 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유의 시큼한 냄새까지 더해 구역질 나오는 모습들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것을 멋없다고 말하는 이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기이한 풍조가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작이 여기였을 확률이 높겠군.’

한눈에 보기에도 자루가 수도 없이 많았다. 저 정도 양이라면 적어도 몇 년간 제국 전체에 공급하고도 남을 터였다.

이런 것들을 숨겨 놓고도 지하실의 대부분은 텅 비어 있다는 둥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던 글레힘 빌름이 떠오르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다른 물건들은 더 볼 필요도 없겠어. 타인 공작의 비밀무역 중간 거점은 여기가 맞아.”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타인 공작은 비밀 경매와 파티를 틈타 여기 있는 물건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팔아치울 생각일 것이다. 찾던 물건들의 존재 유무는 확실히 확인했으니 계획대로 그때까지 기다려 일망타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당장 눈앞에 있는 칼라네사 자루들을 보고 있으려니 불쾌함과 찝찝함이 앞섰다.

“일단 올라가 위치부터 확인해 보지.”

키시아르가 주변을 살피면서 느긋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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