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편지에 엄청난 소식이라도 있었나?”
편지를 모두 읽고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나직한 물음이 들려왔다.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키시아르와 시선을 맞추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표정이 평소와 달라서.”
읽는 동안 표정이 달라졌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터였다. 유더는 제 손안에 든 편지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가케인이 부상을 당했다는 말 때문에 조금 놀라기는 했습니다.”
“아. 그 소식은 들었네. 크게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한 일이지.”
키시아르가 이해했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동료가 위험할 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누구라도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진짜 이유는 그 때문만이 아니지만, 유더는 잠자코 대답했다.
“네. 정말로… 다행한 일입니다.”
다행한 일.
이전 생에는 마병단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겨졌던 일이, 이번에는 그저 그 한마디로 간단히 축약되었다.
가케인 볼룬발트의 때 이른 죽음은 유더가 과거로 다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케인이 다시 위험해졌던 순간에 그들은 함께 있을 수 없었다.
가케인이 위기에 처한 순간 유더가 외부 요인으로 그와 함께 있지 못했던 것 자체는 이전 생과 동일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졌다. 그건 미래를 바꾸기 위해 그가 해 온 나름의 노력들이 분명히 효과를 발휘했다는 증거였다.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바뀔 수 있다.
그건 즉, 키시아르 라 오르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일들 또한 분명히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재차 제공했다.
‘더 나아가 그 이후의 미래도.’
유더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그 어느 때보다도 곧게 직시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무어라 생각했는지, 키시아르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는 이내 눈을 사르르 접어 매력적인 눈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가케인 볼룬발트가 혹 마력의 샘 유적지 아래에서 발견된 광맥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나? 제법 흥미롭더군.”
“네.”
대답한 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혹 그 광맥 때문에 거기에 마력이 고이기 시작했을 확률도 있었을까요.”
“글쎄…… 굳이 말하자면 그 부분은 전후가 반대일 거라 생각하네.”
간단히 대답한 키시아르가 이유를 설명했다.
“보좌는 마정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아는가?”
“마력이 희박한 장소에서 많이 생성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왜 마정석이 많이 존재하는 곳일수록 마력이 희박한지는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마정석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데 익숙했지만 그런 부분을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유더가 고개를 젓자 키시아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정석이 생성되는 과정을 알면 간단한 문제지. 마정석이 만들어지려면 마력이 오랫동안 농축되면서 돌처럼 굳어져야 가능하다네. 그러니 마정석이 많이 나는 지역은 본래 농축될 만큼 많은 마력이 존재했던 땅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마정석이 많은 곳의 마력이 희박한 건 본래 존재했던 마력이 마정석으로 변하면서 소진된 결과라는 겁니까?”
“역시 이해가 빠르군.”
칭찬을 하며 미소를 지은 키시아르가 설명을 이었다.
“마정석이 지금은 아주 흔하지만, 과거에는 희귀한 광물이었다네. 초대 황제께서 오르 제국을 막 세우셨던 시대에는 마정석이란 명칭이 아예 존재하지조차 않았다더군. 마법사들은 그것을 토대로 마정석을 마력 희박 현상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지.”
충만한 마력으로 가득했던 옛날과 달리 세월이 흐르며 마력은 점차 희박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비례하여 마법사의 수 또한 점차 줄었고, 뛰어난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들도 찾기 힘들어졌다.
키시아르는 그에 반비례하듯 마정석 광맥 발견은 점차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공기 중에 자연스레 존재하며 순환하는 마력과 달리, 마정석은 내부에 저장된 힘을 소진하면 영원히 끝이었다. 하지만 생겨나는 마정석을 없앨 방법은 누구도 찾을 수 없으니 서부 마법사 연합처럼 그 현상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이들도 딱히 이렇다 할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마법사들이 마법 연구보다 마도구 제작에 더욱 힘을 쓰게 된 것도 결국 그러한 이유였다.
유더는 그간 잘 알지 못했던 마력과 마정석의 상관관계를 알게 된 뒤, 생각을 찬찬히 정리했다.
‘저 말대로라면 마력의 샘 아래에서 발견된 마정석 때문에 마력이 고이기 시작했다기보다는, 반대로 대량의 순수한 마력이 고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마정석이 생성되었다는 쪽이 맞겠군.’
키시아르의 말대로 전후 관계가 반대였다.
유더는 이논이 마력의 샘 유적지를 보며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자연 상태의 마력은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고이지 않으니 분명 인위적으로 생성되었을 것이라던 씁쓸한 확언.
키시아르 또한 대삼림의 범위와 땅 아래 고인 마력의 범위가 우연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었다.
그 말들이 정말이라면, 대삼림 아래 마력을 가둔 누군가는 그로 인해 마정석이 그토록 많이 생성되리라는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을까?
‘대삼림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한 역사는 천 년에 이른다. 그때는 마정석이란 명칭조차 없었다니 몰랐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
그런 거대한 작업을 정말 사람이 했을지, 했다면 무슨 목적이었을지, 그 방법은 무엇이었을지 지금은 하나도 짐작할 수 없었다.
‘결국 믿을 건 칸나뿐이군.’
“단장님. 발견된 광맥의 소유권은 어떻게 됩니까?”
“기본적으로는 발견한 측 국가에게 귀속되나, 그건 발견자가 대부분 광맥이 위치한 나라 소속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이번은 광맥의 범위가 대삼림 전체일 수도 있어서 꽤 까다로울 거야. 뭐, 그건 폐하께서 고민하실 일이라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광맥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퍼지기 전에 할 조사를 다 끝내도록 노력하는 것뿐.”
맞는 말이었다. 유더는 손에 든 편지들을 내려놓으며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 보이는 타이누의 풍경은 평소와 비슷한 듯 조금 달랐다. 며칠 전까지는 밤에 불을 켠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폭발 사고와 도시 봉쇄가 이어지며 불안에 빠진 이들이 밤만 되면 일찌감치 불을 끄고 집안에 몸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처음 이곳에 왔던 때와 거의 비슷할 만큼 불을 켜 둔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 서부 마법사 연합이 나서서 치안을 강화하기 시작한 일이 안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확연한 증거였다.
어찌 생각하면 그 풍경 또한 과거에는 얻어내지 못했던 결과였다. 유더의 기억 속 서부는 처참하게 파괴된 후유증으로 신음하던 곳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나갈 때가 되었겠군.”
유더를 따라 시선을 돌린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키시아르는 평소와 달리 밤 시간에 외출을 할 예정이었다. 명목은 타이누의 치안을 열심히 관리 중일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한 바퀴 돌고 오는 것이지만 진짜 목적은 달랐다.
그들은 앞서서 몇 시간 전쯤, 아주 비밀스럽게 본저 내에서 빠져나가 치안 관리단에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는 빌름 남작에 대한 소식을 에버의 전서조를 통해 전해 들었다.
곧 있을 경매와 파티를 앞두고서 예상대로 빌름 남작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치안이 안정되고 나그란의 별이 새로 움직이는 낌새도 없으니 슬슬 움직일 거라 생각했지.’
치안 관리단 내부에서 에버를 비롯한 마병단원들이 몰래 모습을 숨기고 빌름 남작이 무엇을 하는지 살필 동안, 키시아르는 경계가 느슨해져 있을 붉은사슴 상단에 방문하기로 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가려 줄 검은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뒤집어쓴 채 소리 없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별저 뒤편에 세워진 마차 마부석에는 평소 입던 기사다운 차림새 대신 평민 마부의 옷을 입은 나단 주커만이 앉아 있었다. 그는 키시아르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고삐를 붙잡았다. 키시아르와 유더가 안에 타자마자 마차가 곧 출발했다.
‘세 명뿐이지만 전력으로 따지면 오히려 과해.’
머릿수는 셋이라 해도 능력만으로 따지면 소드 마스터가 둘, 고위급 사제가 하나, 마법사가 하나, 각성자가 둘인 셈이다. 어디서도 보지 못할 대단한 조합이었다.
마차는 빠르게 길을 달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평범한 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줄을 겹겹이 쳐 둔 붉은사슴 상단 건물은 멀리서 봐도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유더는 뒤이어 내린 키시아르가 어느새 얼굴을 마도구로 변용한 상태임을 알아차렸다.
“오셨습니까.”
붉은사슴 상단 건물을 지키고 있던 펠레타 기사단원 두 명이 다가와 소리를 죽여 인사했다.
“이곳을 지키던 타이누 기사단원들이 돌아오는 건 두 시간 뒤입니다. 그때가 임박하면 밖에서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본래대로라면 타이누 기사단이 기를 쓰고 지켰을 중요한 장소이지만, 지금은 치안을 함께 관리하는 상황이기에 틈을 만들 수 있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뒤를 따라 상단 건물로 들어갔다. 이전에 왔을 때와는 여러모로 달라진 모습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달라진 건 건물 1층 벽에 보란 듯이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이었다. 그것은 나그란의 별이 침입했을 때 폭발을 일으킨 흔적이었다.
내부로 들어간 이후에는 나단 주커만이 제일 먼저 앞서 나갔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익숙하게 나아가 지하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전에는 글레힘 빌름과 함께 왔었던 닫힌 문이 차갑게 그들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