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86화 (386/805)

386화

디아카 가 같은 가문에서 아버지의 겉모습을 가장 쏙 빼닮은 막내아들로 태어났다는 건 대단히 귀찮은 일이었다. 제 신분과 뿌리를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는 귀족적인 성격으로 태어난 키올레조차도 자신의 형제들은 영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일찌감치 고집을 피워 황궁기사단 기사가 되기로 한 뒤로는 대놓고 경계받는 일이 없었으나, 개 같은 서약에 묶인 이후로 분위기가 점차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한 게 문제였다.

본의 아니게 입을 닥치고 있노라면 자신을 대하는 상대방의 태도 변화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어떤 이들은 키올레가 조용할수록 그를 더 어려워했고, 또 어떤 이들은 몰래 얕보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형제자매들로 말하자면, 키올레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새카만 경계심을 내보이는 이들이었다. 이전에 멀쩡했던 때에는 오히려 대외적으로 책잡힐 곳 없이 대하던 이들도 요즘 들어서는 키올레를 향한 의심과 경계의 시선을 대놓고 드러내고는 했다.

아버지 디아카 공작이 대놓고 철이 들었다고 칭찬하며 등을 두드리는 지금은 그 시선이 거의 칼이 되어 멱을 쑤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눈빛 봐라. 아주 날 죽이려 들겠는데.’

첫째 형은 후계자라는 체면 때문에 대놓고 키올레와 대놓고 말을 섞기보다는 담담히 무시하는 편이었지만 아버지에게 관심받지 못하는 셋째는 달랐다. 살기로 타오르는 눈빛이 형형했다.

키올레는 형들의 시선을 못 본 체하며 디아카 공작에게 먼저 들어가 보겠노라 말할 틈을 노렸다. 지금은 누군가 이미 솜씨 좋게 끼어들어 말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전하. 뒤르망 남작의 편두통을 씻은 듯이 낫게 해 주었다는 이들을 다시 찾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그들을 광휘궁으로 보내실 예정이십니까?”

디아카 공작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인 뒤르망 남작은 지병인 편두통을 고치기 위해 안 해 본 치료가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평민 치료사를 만나 기적처럼 편두통이 나았다는 이야기는 키올레도 언뜻 들은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그런 미신에까지 기댈 생각을 할 만큼 카치안 황태자의 병세가 심각한 것일까. 떨떠름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디아카 공작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흘렸다.

“글쎄. 뭐, 사실 아직까지 믿기지는 않네만… 뒤르망 남작이 워낙 추천하니 한 번 정도는 써 볼 만하지 않겠나 싶더군. 뒤처리도 한결 편할 테고.”

“그러시다면 제가 아는 평민 치료사도 만나보시겠는지요? 제가 아는 자도 솜씨가 제법 쓸만하온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주변에서도 손을 들고 각기 잘 아는 평민 치료사들을 소개해 주겠노라 열심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키올레는 그 틈을 타 재빨리 디아카 공작에게 자신은 이만 물러가겠노라는 말을 전했다. 디아카 공작은 짜증이 가득 담긴 막내아들의 얼굴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철이 조금 들기는 했어도 아직 멀었구나. 이런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진실로 귀한 법인 것을.”

철이 든 게 아니라 강제로 입을 다물게 된 것뿐이기에 키올레는 뻔뻔하게 침묵했다. 공작은 손을 내저으며 들어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 가서 쉬거라. 아, 그리고…….”

무언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공작이 말을 덧붙였다.

“황태자 전하 주변의 호위기사들을 조만간 전부 물갈이할 예정이니, 황궁기사단 쪽으로 기별이 갈 게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그 말씀은…….”

“너도 이제는 제대로 된 일을 할 만한 때가 되지 않았겠느냐. 황태자 전하께서도 모르는 이들보다는 너를 더 편히 여겨 주실 게다.”

그 말은 즉 키올레를 황태자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밀어 넣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돈다고는 해도 황태자는 황태자다.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얼굴도장을 찍을 기회를 얻는 건 그 무엇보다도 좋은 특혜였다. 키올레는 또다시 제 얼굴을 향해 꽂히는 형제들의 경계 어린 시선을 느꼈다. 불쾌한 짜증이 또다시 뱃속에서 부글댔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얌전히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그렇게 본인만 모르는 사이에 키올레 다 디아카의 존재감이 날이 갈수록 부풀어 갔다.

***

‘친애하는 유더에게.’

유더는 제 앞으로 온 편지들 중 가장 두터운 가케인의 편지 첫머리를 읽었다. 초반은 유더의 건강 걱정, 중반은 서부 마법사 연합의 마법사들과 교류하며 생긴 소소한 사건들을 담고 있었지만 후반은 조금 달랐다.

‘…그리고 이건 쓸지 말지 고민했지만, 사실 며칠 전에 일이 하나 있었어. 새로 발생한 몬스터 중에 또 마력을 흡수하는 몬스터가 있었거든. 그놈은 한 마리뿐이긴 했지만 요즘 대삼림은 마력의 샘 유적지 개방 이후 마력이 대단히 충만해져서, 아무리 공격해도 회복력이 너무 빨라 해치우기가 쉽지 않았어.’

새로 나타난 몬스터는 덩치도 큰 데다 마력이 충만한 땅일수록 대단한 회복력을 발휘했다. 마병단원들은 그 사실을 일찍 파악하지 못해 제법 고생했고, 그 과정에서 목숨이 위험할 뻔한 일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평소였다면 내가 혼자 마지막까지 몬스터를 유인하고, 그 사이에 동료들을 먼저 도피시키는 방법을 썼을 거야. 그런데 그때는 어쩐지 너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자꾸 생각나지 뭐야. 기억나? 때로는 성공하지 못해도…….’

성공하지 못해도 모두 무사한 게 최선의 결과일 수도 있다.

유더는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따라 읊조리며 다음 문장을 읽어 나갔다.

‘…그래서 주변 지형이 무너지는 걸 감수하고 그냥 일단 모두 후퇴했어. 후퇴하고 나서 다른 이들과 합류한 뒤에야 그 몬스터가 지닌 힘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지. 이미 마력을 흡수하는 몬스터를 잡아 봤기에 해결책도 빨리 알 수 있었던 것 같아.’

작은 페투아멧을 잡았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적고 난 뒤, 가케인은 담담히 그 몬스터를 어떻게 잡았는지 설명했다.

‘마력이 적은 지역으로 끌어내기만 하면 생각보다 쉽게 잡을 수 있는 놈이었는데 잡고 보니 참 허탈하더라. 만약 그때 거기서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난 허망하게 죽었겠지?’

비록 가슴 부분이 길게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가케인의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는 유더의 조언이 그때 떠올라 준 건 정말 천운이었다며 고마움의 뜻을 전한 뒤 제 건강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 부상은 마법사 분들이 도와준 덕분에 벌써 거의 다 나았거든. 아마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붕대도 풀었을 거야. 이번 일로 내 능력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면 너도 아마 깜짝 놀랄걸. 그걸 위해 일부러 위험을 자처한 게 분명하다고 힌이 몇 번이나 놀렸는지 몰라!’

유더는 묘한 기분으로 몇 번이나 그 부분을 반복하여 읽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걱정했던 부분은 일단 해결된 건가.’

이전 생의 가케인은 몬스터 토벌 도중 동료들을 대신하여 마지막까지 앞에 나섰다가 죽었다. 시체는 가슴 부분을 찢겨 몸이 동강난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들었다. 그래, 그랬었다.

다쳤다는 문장을 읽은 순간 기시감처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옛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상세한 상황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대체적으로는 이번 일과 거의 동일한 사건이었다.

유더는 가케인과 함께 갔던 마병단원들이 그의 희생 덕에 살아났다는 사실을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고 있었다. 거기서 비롯된 증오로 인하여 단원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이 걸렸던 기억, 그리고 거기서 얻은 분노를 벽처럼 느껴지던 키시아르에게 되는 대로 토해 냈던 기억 등이 연달아 함께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없던 일이 되었다.

편지 속에서는 이번 일을 잘 끝냈으니 임명권 영입 제안을 잊지 말라는 둥 하며 가볍게 적고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번 생의 가케인은, 유더가 바란 대로 무사히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럴 것이라 믿었다. 믿고 있었기에 가케인을 그곳에 두고 떠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리되었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무게감은 다소 남달랐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동시에 치미는 바람에 유더는 한참 동안 편지의 다음 장을 넘기지 못했다.

잠시 후 편지의 마지막 장을 연 유더는 방금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시 한 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말야, 이번 일이 끝난 뒤 마력의 샘 유적 쪽에서도 좀 색다른 발견이 있었어.’

서부 마법사 연합의 마법사들은 마력의 샘 유적지에서 흘러나온 농축된 마력이 이제 반쯤은 빠져나온 듯하다고 판단하여 땅 아래를 파 보기로 결정했다. 마병단원들은 그들을 도와 바위 아래 땅을 파 주기로 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마정석 원석들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처음에 몇 개 정도 파냈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끝도 없이 나오니까 나중엔 다들 말이 없어지더라. 난 마정석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렇게 크고 주먹만 한 마정석들이 한곳에 그리 많이 묻혀 있는 건 광산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라며?…. 덕분에 마법사들 쪽은 지금 또 난리가 났어.’

가케인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마정석 광맥이 발견되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질 좋은 마정석이 무더기로 묻힌 곳이 그 어디도 아닌 사라인 대삼림이라니. 여러 나라의 국경에 걸친 지역이니만큼, 탐을 내는 무리들이 엄청날 미래가 절로 그려졌다.

서부 전체가 몬스터 이상 발생 때문에 크게 파괴되고 나서 사람의 발길이 끊겨 버린 골칫덩어리 대삼림만 있던 이전 생에서는 당연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칸나의 말로는 아무래도 이게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것 같다고 해. 뭔가 그 장소와 관련된 오래된 정보가 읽힐 것 같다나? 그래서 칸나가 정보를 좀 더 읽어 볼 수 있도록 바위 아래를 팔 수 있는 만큼 더 파 보려고. 단장님께도 보고했는데 뭐라고 답해 주실지 조금 긴장되네.’

가케인은 그쯤에서 새로운 소식을 마무리한 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칸나가 곧 타이누로 떠날 것이라 썼다. 유더는 거기까지 본 뒤 편지를 접었다. 그 다음으로 읽은 칸나의 편지와 지미의 편지는 가케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들을 각자의 시선으로 담고 있었다.

마력의 샘 아래에서 나온 수많은 마정석들. 그리고 칸나의 의미심장한 발언.

그 아래에서 그녀가 읽어낼 정보는 대체 무엇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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