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몇 번인가 말없이 눈을 깜박이던 사내가 잠시 후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리는 통에, 유더는 제가 무언가 말을 잘못한 것인지 의심해야 했다.
“……단장님?”
“아니…….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다가오려는 유더를 막은 뒤 한참이 지나서야 손을 내린 키시아르가 다시 유더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열기가 오른 듯 핏기가 도는 눈가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솔직함이 무엇보다 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이전에는 믿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뭐든 당해 보기 전엔 모르는 법이군.”
“예?”
“그 어떤 이에게 받은 칭찬보다도 방금 그 말이 더 기뻤다는 뜻이야.”
아프지 않아서 화내거나 항의하지 않았다는 게 그리 큰 칭찬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말이었던가. 먼저 호쾌하다는 둥 하는 농을 걸었으면서 왜 제 답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기뻤다니 더 묻지는 않기로 했다.
“유더.”
“…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는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하자 키시아르의 붉은 입술 끝이 씩 올라갔다.
“어서 낫게.”
“……예?”
“늘 그러기를 바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쾌유를 깊이 소원한 적이 없어.”
“저도 가능하면 그러고 싶습니다만…….”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제 몸이 낫는 방법을 찾는 일은 이제 이논과 헬렘, 믹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니 스스로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키시아르의 그릇을 보완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단시간 내에 실마리를 찾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니, 잠깐.’
무심코 생각하던 중, 유더는 여전히 웃고 있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흘긋 보았다. 혹시 저 미소의 의미가 단순한 쾌유의 기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치 그 눈빛을 기다렸다는 듯,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 두 눈으로 다시 나를 보아 주는 날을, 그리고 우리의 마병단으로 함께 돌아갈 때를 내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보좌는 아마 모를 거야.”
우리의 마병단.
그 낯설고도 익숙한 단어가 주는 이상한 감정 속에서 유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서부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사라인 대삼림에서 펠레타 공작과 그가 이끄는 마병단이 큰 공을 세운 뒤, 국경 지대를 어지럽히던 몬스터의 습격은 예년 수준으로 훅 줄어들었다.
마병단은 거대한 몬스터를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잡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이후에도 뛰어난 정예 단원들을 대삼림에 남기고 몬스터 토벌을 도와 국경 지대에 사는 제국민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거기에 더해 펠레타 공작이 진짜 신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서부 태양신 신전의 노사제들이 확인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자 수도에는 이전과 다른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긴장감을 야기시킨 것은 물론 물론 해당 소문을 가장 믿지 않았던 지체 높은 공작가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군. 사제들이 신검을 인정했다고?”
멀리까지 새어 나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막 황궁기사단에서 돌아온 키올레 다 디아카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디아카 공작이 측근들과 자주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질 때 즐겨 찾곤 하던 작은 장미 정원이 있었다. 여러 구역으로 나뉜 드넓은 정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곳에서 디아카 공작이 오늘도 회동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타인 공작가 쪽에서는 쉬쉬하고 있으나… 그 검으로 직접 전투에 나서 승리하는 모습을 본 이들이 많아…… 아무래도 부정할 수 없었을…….”
“이제 와 이러는 이유는 역시 황태자 전하의 건강을 핑계 삼아…….”
“초대 황제의 전설을 등에 업어 보기라도 할 셈인지…… 그래도 너무 심려치 마십…….”
카랑카랑했던 디아카 공작의 목소리와는 달리, 주변인들의 목소리는 몹시 작고 힘이 없어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내용인지 유추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병단과 신검의 새 주인. 키올레는 코끝을 찡그리며 그들이 하고 있을 이야기의 중심 주제를 머리에 떠올렸다.
펠레타 공작이 신검의 새 주인이 되었다는 소식은 케일루사 황제의 발표 이후 줄곧 헛소문 취급을 받았으나, 마병단이 서부에서 세운 공적이 화제가 되면서부터는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추세였다.
물론 황궁기사단의 기사들은 대부분 그 소문을 코웃음 치며 믿지 않았지만 키올레는 평소처럼 그들과 동조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는 마병단이 지닌 힘을,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쭉정이 공작’이 내보인 불가사의하고 찝찝하기 그지없는 위압감도 모두 몸소 제 눈으로 본 자였다.
키올레는 키시아르가 신검의 새 주인이라는 발표를 처음 들었을 때도 어쩌면 그 말이 정치적 농간이 아니라 정말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들은 말들로 미루어 보건대, 아무래도 펠레타 공작은 이번에 진짜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해 보인 모양이었다.
쭉정이 공작이 평민들을 데리고 대장 놀이를 하는 정도라면 귀족들이 신경 쓸 일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가 몬스터 이상 발생을 진정시킬 만큼 강한 힘을 지닌 이들을 이끌고서 큰 공적을 세운다면, 그건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요즘 같은 때에는 더 그랬다.
디아카 가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던 황태자는 아페토 가의 암살 시도 이후 두문불출한 지가 오래되었고,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디아카 공작은 황태자를 치료하려 노력하는 한편 그 소문을 막기 위해 힘을 썼지만 한번 새어 나간 소문을 진화시키기란 디아카 가의 이름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명실상부한 신검의 주인이 된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이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정치나 권력 다툼 따위에 관심이 없는 키올레도 요즘 아버지가 얼마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지는 알 수 있을 정도이니, 아마도 전쟁 아닌 전쟁이 발발할 것이다.
키올레는 제가 이름을 아는 유일한 마병단원인 유더 아일을 떠올렸다. 그 건방지고 괴물 같은 놈의 면상을 안 본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손목에 찍힌 서약의 증거를 통해 그놈이 멀쩡히 잘 살아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서부에서부터 날아오는 마병단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때때로 그자의 모습이 떠오르고는 했다.
‘대삼림에서 단신으로 몬스터를 때려잡았다는 마병단원 소문이 진짜라면, 그럴 수 있는 건 분명 그놈밖에 없겠지.’
그건 추측이라기보다 몸으로 직접 겪었기에 느낀 확신이었다.
키올레는 치를 떨며 생각을 그만두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때마침 아버지와 함께 있던 이들 중 누군가가 그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오! 키올레 경이 돌아왔군요.”
정원에서 차를 앞에 놓고 고상한 척 펠레타 공작을 욕하고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키올레를 반갑게 바라보며 입에 발린 칭찬을 해 댔다. 키올레는 그들 사이에 자신의 첫째 형과 셋째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간을 푹 찡그렸다. 형들 또한 키올레를 보고는 무표정한 얼굴 아래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아버지 디아카 공작만은 막내아들을 보고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손짓을 했다.
“키올레. 왔느냐? 이리로 오거라.”
“…예.”
키올레는 진작 들어갔어야 했다는 깊은 후회를 삼키며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공작 곁의 어중이떠중이들이 신이 나 그의 칭찬을 해 대기 시작했다.
“키올레 경은 정말 젊은 시절의 공작 전하를 빼닮았군요.”
“40년 전 전하의 모습을 뵙는 듯합니다.”
디아카 공작은 키올레가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기사단의 옷을 입은 모습을 볼 때만은 그런 칭찬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는 했다.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이냐. 생각보다 늦었구나.”
“예. 단장님과 훈련 계획에 대해 말을 나누고 돌아오느라 조금 늦어졌습니다.”
“황궁기사단의 단장이라면 테오라도 반 타인 경이었지요?”
“예.”
“타인 가에서 나온 괴벽 중 가장 특이한 괴벽을 지닌 분 아닌가 싶은 분 아닙니까. 검에 미쳐 집에도 돌아가지 않는다던데, 가문에서 걱정이 많다더군요.”
“저도 훈련 때문에 자주 집에 오지 않습니다만.”
“아, 무, 물론 키올레 경은 그분과 다르시지요.”
아버지와의 대화에 어떻게든 끼어들려 애를 쓰는 누군가에게 성의 없이 대답한 뒤, 키올레는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빨리 돌아가라고 해 주셨으면 좋겠군.’
짜증은 나는데 서약 때문에 성격대로 대답해 줄 수 없으니 더욱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쯤 되면 가 보라고 권할 줄 알았던 디아카 공작은 어쩐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키올레를 보고 있었다. 키올레는 늙은 아버지의 시선이 제 가슴에 달린 황궁기사단의 문장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의문을 느꼈다.
‘왜 저러시지?’
“키올레. 그러고 보면 네가 테오라도 반 타인과의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구나.”
친분이 두텁다기보다는 그저 삭막하기 그지없는 단장과 휘하 기사의 관계일 뿐이었으나, 키올레는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디아카 공작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좋은 탈출구를 찾았다는 듯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 요즘 타인 가의 정황에 대해 들은 바는 없느냐?”
“딱히… 없었습니다.”
“타인 공작은 테오라도 경을 사촌 중 가장 믿는다고 하던데,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며 한번 물어보거라.”
“……예.”
그런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가 못 된다는 답은 아버지에게 필요 없을 터였다. 디아카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옛날에 네가 기사 따위를 하겠다며 난리를 피울 때는 내 속이 상했었는데, 요즘은 그 고집을 들어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지금처럼만 다니거라.”
그간 사고를 많이 쳤던 막내아들의 소문을 암암리에 들어 알고 있던 귀족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키올레는 그 속에 끼어 있는 제 형들의 눈빛 속에 어두운 기운이 깃드는 모습을 보며 찌푸린 미간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정말 짜증 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