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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83화 (383/805)

383화

“믹 님과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이 각성자라는 이야기는 왜 미리 해 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그는 자신이 각성자라는 걸 그리 밝히고 싶지 않아 하거든. 하지만 역시 보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나 보지?”

“말도 없이 계속 저를 그 능력으로 살펴보시니 모를 수가 없더군요.”

“그래? 그가 뭐라고 하던가.”

유더는 일순 머뭇거렸다.

“제 안에 있는 알맹이에는… 구멍이 많다고 했습니다.”

“구멍?”

일순 키시아르가 멈칫했다. 그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생각하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가는, 유더와 눈이 마주친 순간 천천히 도로 폈다. 표정만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도로 화려하고 예쁜 미소를 띠었지만 그 속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신중함이 겹겹이 깃들었다. 그는 눈을 깜박이지조차 않은 채 느릿하게, 그러나 유더가 경계하지 않을 정도로는 부드럽게 물었다.

“짐작이… 잘 안 되는군. 혹 믹이 그게 무슨 뜻인지도 말해 주던가?”

“딱히 비유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위험한 건 아니어 보인다고 하셨던 것 같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아마…….”

아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믹의 말을 들었던 순간 떠올렸던 제 안의 수많은 빈틈과 그것들을 자각하던 순간의 고통 때문이었다.

그 고통은 굳이 말하자면 한기와 가장 가까웠다. 실제로는 그리 춥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가슴 속 어디선가 뻐끔댈 구멍들을 생각하면 제 주변에서만 온기가 모조리 사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고는 했다.

한때 있었던 무언가가 사라졌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건 몹시 이상한 일이다. 단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기에 평소에는 잊고 있을 뿐이었다.

유더는 지금도 제 안 어딘가에 있을 그 구멍 속에 본래 있었을 것들이 무엇일지 완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 기억인지, 감정인지, 어째서 사라졌는지, 모두 채울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지조차도.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이 훨씬 많았으니까.

하지만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음에도 키시아르의 관찰하는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유더의 말이 정말인지 판단하려는 듯 침묵을 지키며 오랫동안 무표정한 흰 얼굴을 살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집요한 시선이었다.

유더가 무언가 말하지 않고 얼버무리거나 숨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웃으며 태연하게 넘기던 이가 내보인 그 모습에, 일순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이 유더를 덮쳤다.

‘아.’

거대한 페투아멧을 잡고 나서 눈이 보이지 않았던 시간 동안 무방비했던 자신을 감싸는 절대적인 방벽이 되어 주던 안온한 품. 그리고 그 속에 있을 때 느낄 수는 있었으나 볼 수는 없었던 시선. 다시 보이게 된 뒤로는 느낀 적이 없던 그 감각이 지금 다시 찾아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자신을 품에 안고 밥을 떠먹일 때, 약을 바르고 붕대를 다시 감아줄 때, 남몰래 찾아와 창을 뛰어넘어 세상에 아무도 없는 듯했던 나무 위에 올라갔을 때. 그럴 때마다 키시아르는 이렇게 저를 살피고 있었던가?

저토록 맹목적이면서도 가슴 어딘가가 저릴 듯한 눈을 하고서.

심장이 거세게 조였다. 고통을 닮은 감각이었으나 차갑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믹에게 조금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네.”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묻자 키시아르가 내보였던 감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잘 갈무리되어 사라졌다. 유더는 능숙하게 감정을 정리하는 데 익숙한 눈동자를 바라보다 문득 또다시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단장님. 그런데 사실은 저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참 두서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제게 관대한 키시아르라 해도 이 말은 농담으로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웃지 않았다. 그저 유더를 바라보다 짤막하게 물었을 뿐이었다.

“그런가? 어떻게?”

“그냥… 제 몸이니 자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나?”

그 말에는 침묵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위험하지 않다고?”

“목숨이 위험한 부상 같은 건 아니니… 저도 믹 님의 말처럼 크게 위험한 상태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키시아르는 오래 침묵했다. 시간이 제법 흐른 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믹 슈덴의 능력이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 들었나?”

“껍데기 안의 알맹이를 보는 능력이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는 대상의 육신 내부에 깃든 본질을 본다네. 보통은 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지. 그는 그 능력을 통해 내 그릇이 각성의 날 이후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언해 준 사람이기도 해.”

살아 있는 것이라면 혼이라 말하겠지만, 믹은 살아 있지 않은 것에서도 본질을 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좋은 물건을 가려 내어 교역을 하는 상인다운 능력이라 할 만하다고 중얼거리는 키시아르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본래는 그런 상태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혼에 그리 많은 구멍이 생겨났다면, 아무리 목숨에 지장이 없다 해도 좋은 쪽으로 생각되지는 않아. 하지만 믹 슈덴을 만난 덕에 지금이라도 네게서 직접 말을 들었다는 데에는 감사해야겠군.”

“…….”

“해당 사항에 대해서는 나도 알아보도록 하지. 괜찮겠나?”

영혼에 난 구멍에 대해 무얼 알아보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더는 느리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키시아르의 입가에 그제야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는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청자의 믿음을 의심치 말고 편히 말하게. 그 구멍에 대한 것도, 뭐든 좋으니까.”

“……네.”

제 안에 있는 구멍들에 대해 말하려면, 필연적으로 잃어버린 기억과 감정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그건 아직까지 유더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가장 깊은 비밀이었다.

하지만 키시아르의 속삭임이 귀에 닿은 순간, 유더는 저도 모르게 무어라도 말하고 싶은 감각이 불쑥 치미는 것을 느꼈다.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목 안쪽이, 입술이, 혀가 놀랄 만큼 바짝 말라 간질간질했다. 간신히 억눌러낸 그 감각은 키시아르에게 닿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눈이 멀었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작게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비밀을 밝히는 대신, 그는 보이지 않는 눈을 핑계 삼아 욕심을 내어 사내를 만졌던 때처럼 다시 한 번 더 눈앞의 새하얗고 매끄러운 뺨과 속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 우습지만, 그 생각만을 한 순간 순식간에 머리가 그것만으로 꽉 차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유더의 뜻을 읽은 것처럼 키시아르가 한쪽 눈썹을 움직였다.

“그렇게 열렬히 쳐다보면……. 어쩐지 의도를 내가 좋을 대로 생각하고 싶어지는데 말이야.”

유더는 침묵했다. 그와 동시에 키시아르의 눈빛 또한 변했다. 공기가 순식간에 이전과는 다른 색을 띠었다.

“보좌가 상태를 솔직히 말해 준 상을 주고 싶어 지금부터 내가 그쪽으로 갈까 하는데, 싫다면 일어서서 식탁을 치워 줄 하인들을 부르러 가게.”

그 말은 언젠가 단장실 문 앞에서의 대화를 상기시켰다.

유더는 조심스레, 그러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힘을 머금고 다가오는 흰 손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당연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가온 사내가 유더가 앉은 의자 등받이 양쪽을 붙잡으며 몸을 낮추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듯 매끄럽게 다가온 얼굴에 넋을 잃음과 동시에 억눌렀던 열망이 놀랄 만큼 거세게 타올랐다.

키시아르의 눈동자 속에 비친 노골적인 표정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음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깊은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이전보다도 훨씬 더 노골적으로 감각을 자극하면서도 진득하게 섞이는 입술 사이로 유더는 제가 바랐던 것 이상의 충족감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느샌가 키시아르의 목에 팔을 감은 상태였다. 손을 도로 내리려 하자마자 뻗어 온 흰 손이 두른 팔을 풀지 못하도록 붙잡으며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전히 뒤통수가 저릿할 정도로 감각적이었고, 도무지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중독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처음 했을 때와 같은 충격은 이제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언뜻 익숙하여 고요해진 듯한 수면 아래 더욱 농밀하게 진득해진 합일감이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을 마시며, 유더는 저릿하게 울리는 몸속의 열기를 느꼈다.

‘…이논의 말이 맞았는지도 몰라.’

이토록 시도 때도 없이 치미는 욕망은 비정상이리라 생각했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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