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키시아르의 앞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어려웠다. 키시아르의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유더가 저 사내의 앞에서 진실을 감추는 게 날이 갈수록 더 거북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적은 늘 바깥이 아닌 안에서 찾아오는 법이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시선을 피하는 자기 자신을 참아내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껄끄러웠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알고 있었다.
저 사내에게 진심 어린 감정을 품기 시작한 순간부터 신발 안에 잘못 들어간 모래알처럼 거슬리던 무언가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좀 걸리적대는 정도였던 것이 이제는 목 아래까지 차오른 물처럼 시도 때도 없이 숨을 막았다.
그건 바로 감정이다.
억지로 억눌렀던 이끌림이다.
얼마 전까지 이름조차 몰랐던 후회다.
그것들이 쌓인 무게가 유더를 짓누르며 이 작디작은 거짓말조차 감추기 힘들게 만들었다. 머리와 가슴 사이에서 이견이 일어날 여지 없이 직선적으로 살았던 이전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전하. 그 ‘피의 보호’가 지하 감옥에 정말 있다면, 제가 가서 확인을 도와드리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프루엘레의 목소리에 유더의 얼굴에 머물던 키시아르의 시선이 사라졌다. 유더는 그제야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졌던 방금 전 그 순간이 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당장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군.”
언제 유더의 얼굴을 보았느냐는 듯, 키시아르는 능숙하게 프루엘레와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파티에 참석한 이들의 명단 쪽은 어떻게 되었지?”
“예상보다 빠르게 명단이 모이는 중이라 곧 취합하여 전달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화제가 파티에 참석할 이들의 명단 쪽으로 넘어가자 프루엘레는 의욕적으로 자신의 정보 제공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여러 가지 소문들이 있었지만 프루엘레가 특히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당시 타이누에 찾아왔던 많은 상단 중 남국인 상단이 존재했다는 소문이었다.
“확인해 본 결과 사실이더군요. 눈에 띄는 타국인 집단이라 기억하는 자들이 아직 꽤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와 연이 깊은 남국인 상인들이 그때 이곳에 찾아와 물건을 옮기는 일을 도운 듯합니다.”
“흠.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들과 타인 공작은 정말 엄청난 신뢰 관계로 엮여 있나 보군.”
“아버지에게 얻어낸 것이 많을 테니 그들도 결코 그 관계를 놓치고 싶지 않겠지요.”
“그래. 돈과 이권은 무엇보다도 확실한 동기이자 연결고리가 될 수 있지. 하지만… 역시 신경이 쓰이는군.”
“어떤 부분이 신경 쓰이신다는 겁니까?”
“그들의 목적이라고 해야 하나.”
뜬금없는 말에 프루엘레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키시아르의 말뜻을 이해해 보려 해도 짐작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키시아르는 상대가 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을 지키다 재차 입을 열었다.
“프루엘레 공자.”
“예.”
“혹 그 남국인 상인들이 이번에도 이곳에 올 가능성이 있겠나?”
‘키시아르는 남국인 상인들이 이번에도 타이누에 오리라 생각하는 건가.’
눈에 띄는 타국인 상인들을 마병단과 나그란의 별이 도사린 이곳에 또 보내는 건 그들이 작년에 아무리 일을 잘해 주었다 한들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유더가 타인 공작이라면 작년과는 다른 선택을 했겠지만 욕심과 초조함에 눈이 먼 이라면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수도에 돌아가는 대로 알아보겠습니다.”
“가능하면 지금부터 알아봐 주게. 수도에 있을 이들에게 연락을 넣어 정보를 구하고, 그 남국인 상인들의 다른 정보도 자네 쪽에서 더 알아보아 주었으면 좋겠군.”
프루엘레의 표정이 신중하게 변했다. 그는 영민한 자답게 쓸데없는 질문을 덧붙이는 대신 바로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식사가 끝난 뒤 프루엘레는 자신이 글레힘을 만나는 동안 키시아르가 보여 주었을 신검의 증명은 잘 되었는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들어올 때 키시아르의 허리춤에 매달린 신검의 휘황찬란한 자태를 이미 보았을 텐데도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키시아르가 흔쾌히 빌름 남작과 사제들 앞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자 그는 제 눈으로 그 광경을 보지 못한 사실을 무척 안타까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전하께서 신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황제 폐하의 발표를 통하여 처음 들었을 때는 저도 온전히 믿지는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에 맞춰 수도를 떠나신 것 또한 분명 큰 계획이셨겠지요.”
“이런, 그렇게 생각하나?”
“아닙니까?”
반문하는 목소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프루엘레는 대답 대신 웃음만 짓고 있는 키시아르를 경외롭게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돌아가기 전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저는 이제 전하와 폐하께서 어디까지 보고 계신지 그 끝을 감히 파악하려 하지 않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부드러워졌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유더는 또다시 저를 보는 시선을 느꼈다. 아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무슨 말을 할까.
침묵 속에서 상대의 말을 기다리는 건 다소 초조한 일이었다. 그가 여태껏 유더의 수상한 면모에 크게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고 오히려 흥미로워했었다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신경이 곤두서는 건 유더 자신의 변화를 새삼스레 크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유더 자신이 작은 거짓말조차 견디기 어려워지고 있듯, 상대도 어쩌면 그럴지 모른다. 제가 변하였다면 상대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키시아르가 그간 지켜 온 인내심을 내려 두고 의문에 대해 듣기를 원하는 날이 온다면… 유더는 제가 과연 얼마나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지 별로 자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드디어 기다렸던 부름이 귓가를 두드렸다.
“유더.”
“네.”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일찍 쉬는 게 좋지 않겠나?”
“……예?”
예상한 그 어떤 말과도 다른 질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탁자 위에 턱을 괸 채 비스듬히 기울인 얼굴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흔들림 없는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낸 눈동자는 오로지 유더의 얼굴만을 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 유더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조차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고요한 눈빛이었다.
그 순간, 신경줄을 바작바작 태우던 불쾌한 초조함이 아연히 갈 길을 잃었다. 유더는 일순 말을 잃고 멍하니 그 시선을 마주하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보좌는 늘 괜찮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한 번도 괜찮아 보인 적이 없었지. 아침 일찍부터 여기저기 움직이느라 피곤했을 테니 말을 들어.”
“아뇨. 저는…….”
정말로 괜찮다고 말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손이 이마를 짚음과 동시에 움직이려던 입이 멈추었다.
“보게. 미열이 있잖아. 어쩐지 식사량도 조금 적다 싶었지.”
“…….”
그건… 순전히 키시아르의 시선 때문이었다. 유더는 시야의 절반쯤을 가려버린 큰 손의 서늘한 온기를 의식하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차갑지만 따뜻한 특유의 체온.
그 안에서 풍기는 체향.
피부와 피부가 맞닿은 덕에 가슴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검은 안개가 일순 고삐가 풀리고, 가슴 속에만 있어야 했을 말이 입술 밖으로 불쑥 튀어 나갔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까?”
말하자마자 짧은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이건 찔리는 게 있다고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가 말이지?”
“…….”
“아까 믹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지 않아서 그런가?”
당연하지만 진짜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한 것이다.
관계를 바꿀 수 있는 열쇠가 유더의 손에 있다고 말하던 때와도 같았다.
유더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키시아르는 결코 그 열쇠를 빼앗지도, 보이는 척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더가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면 절대로 먼저 침범해 들어오지 않겠다던 말은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그 말 한마디를 통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문득 처음으로 키시아르의 앞에서 식사를 하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유더는 그때 키시아르를 경계하여 차려진 음식의 대부분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맛있느냐는 질문에 아무 감정 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키시아르는 유더가 솔직한 대답을 할 때까지 끈질기게 반복하여 같은 질문을 했다. 맛이 없어도 맛있다고 대답하는 것보다는 제가 무엇을 느끼는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이를 원한다던 사내는, 방식은 조금 달라졌으나 여전히 똑같은 끈질김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벽이 무너져 그 내부를 스스로 드러내 보일 때까지, 그는 언제까지고 기꺼이 인내하리라. 여태까지도 여러 번 그렇게 하여 이미 유더를 무너뜨려 왔으므로.
유더는 입을 열지 않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우습지만, 상대의 그런 변함없는 단단함을 확인함과 동시에 겨우 초조함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단단히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을 풀며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