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81화 (381/805)

381화

“오늘 본 일은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아직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군요. 신검의 성스러운 힘을 제 눈으로 직접 보다니… 건국 전설의 한 페이지를 보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니 쑥스럽군.”

빌름 남작과 노사제들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에 미칼린은 참았던 찬사를 끝없이 던져 댔다. 키시아르가 전혀 쑥스러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대꾸하자 미칼린이 흥분한 얼굴로 뒤따라오던 루산을 향해 칭찬의 물꼬를 옮겼다.

“그렇지. 젊은 사제님의 신력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나이가 이리 젊은데도 이런 강력한 신력이라니… 대신전이 큰 인재를 놓쳤군요. 허허.”

“예?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만…….”

갑작스레 화제가 제 쪽으로 향해 깜짝 놀란 루산이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노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 연합의 마법사들이 사제님을 뵌 뒤로 앞다투어 신전에 예배를 드리러 나가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있었던 일을 알게 된다면 모두 무척 기뻐할 겁니다.”

“루산 사제의 뛰어난 능력이 아니었다면 신검의 힘을 증명하기 정말 힘들었을 거라는 건 누구라도 알 테니, 너무 겸손해하지 말게.”

“아 그……. 감사합니다.”

키시아르까지 끼어들자 루산의 귀가 화르르 붉어졌다.

“제 신력은 대삼림에서 있었던 일 이후 늘어난 것이라 이리 대단한 말씀을 들을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두 분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대삼림에서 일어난 일들 이후로 신력이 늘어났다니. 그건 몰랐던 사실이라 조금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대삼림에 있는 내내 신력을 엄청나게 사용하면서 단련되었을 테니 늘어날 만도 하지.’

아마 오늘 일로 인해 루산에 대한 소문도 마병단의 소문 속에 한 축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데에 돈이라도 걸 수 있었다.

수년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 시원해진 얼굴을 한 미칼린을 향해 키시아르가 지나가는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자네는 혹 작년에 열렸다는 빌름 남작의 자선 파티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미칼린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문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남작이 가끔 돈 뜯어낼 목적으로 여는 파티 말씀이십니까? 타이누에 본부를 만든 첫해에 당한 이후로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어 잘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찌하여 궁금해하시는지요?”

돈 뜯어낼 목적의 파티라니. 프루엘레에게 들은 파티 정보를 생각하면 그보다 정확한 표현이 또 없었다.

“이번에 또 열릴 예정이라기에 궁금하여 물어보았다네.”

“이런 어지러운 시기에 말입니까? 생각도 양심도 없는 줄은 진작 알았으나, 언제나 예상을 한층 더 뛰어넘는군요. 성문을 닫아 버린 초유의 사태가 지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런!”

미칼린이 거친 어조로 빌름 남작을 비난했다. 그는 그간의 앙심이 절절히 느껴지는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낸 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키시아르의 안색을 살폈다.

“아, 혹 전하께서 제가 참석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참석은 해 보겠습니다만…….”

“괜찮네. 그보다는 아까 함께 이야기했던 서부 마법사 연합 측의 치안 협조와 대삼림 쪽이 훨씬 중하니, 돌아가는 대로 그 부분을 잘 부탁하지.”

“예. 물론입니다. 둘 모두 걱정 마십시오.”

노마법사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가 사라지고 루산도 기억 잃은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먼저 제 갈 길로 향한 뒤, 유더는 내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

“서부 마법사 연합과 치안 협조를 하시기로 했습니까?”

“그래. 아까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 그 이야기를 나누었지. 다행히 몹시 협조적으로 여겨 주더군.”

타이누의 치안을 지키고 사람들의 혼란을 잠재우며 나그란의 별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머릿수가 적은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 외에도 많은 이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서부 마법사 연합이 키시아르와 마병단에 이어 움직여 주기로 했다면 일이 한결 편해질 터였다.

“다행이군요.”

“그래. 참 좋은 시기에 맞춰 찾아와 주었어. 그건 그렇고, 나단은 프루엘레 공자에게 말을 잘 전달했을지 궁금하군…….”

키시아르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본저 쪽으로 움직였다. 그 안 깊숙한 어딘가에 글레힘 빌름이 머물고 있을 터였다.

붉은 눈동자 위로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은 날카로움이 짧게 머물렀다가는 사라졌다. 바로 방금 전 신검의 힘을 증명해 보인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철두철미함으로, 그는 곧바로 다음 일과 또 그다음에 있을 일들을 계산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 시간은 모처럼 기대가 될 것 같습니다.”

“나도 그러해. 역시 내 보좌만큼 나와 잘 통하는 이가 없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비슷한 미소를 흘렸다.

“글레힘에게서 제법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나단 주커만과 함께 식사 자리에 나타난 프루엘레는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계획이 성공했음을 보고했다.

“그자가 약에 취해 정신이 없던 터라 초반에는 조금 고생이었습니다만, 정보 자체는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도피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날의 기억이 두려웠던 모양이군. 뭐, 이해할 만한 일이지.”

키시아르가 앞에 놓인 고기를 자르며 대꾸했다.

“예. 덕분에 제가 뭔가를 물어보았다는 기억도 금방 잊을 것 같아 그건 다행이더군요. 추후 진짜 빌름 남작에게 무슨 말을 듣는다 해도 오늘 일이 들킬 일은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알고 있던가?”

“글레힘의 말로는 상단 건물 지하실에서 이어지는 근처의 비밀 건물과 또 다른 곳에 제일 중요한 ‘물건’들을 나누어 배치해 두었다고 합니다. 상단 건물 쪽에 있는 물건은 그가 관리하였고, 다른 곳에 있는 물건은 빌름 남작이 직접 관리한 모양이더군요.”

‘역시 그랬군.’

말로는 비어 있다던 상단 건물 지하실에 무언가를 숨긴 듯 찜찜한 태도를 보이던 글레힘과 그곳 바로 근처의 유흥가 거리를 유독 자주 순찰하던 병사들. 어느 정도 예측은 했으나 아직 분명하지 않았던 그 연관성이 드디어 시원히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도 물어보았나?”

“네. 상단 근처 쪽에는 약과 귀중품들을, 그리고 다른 한쪽에 ‘말’을 두었다고 했습니다.”

“근처를 수색하여 일단 그것들을 먼저 확보해야겠군. 그런데 다른 한쪽 장소는 어디인지 힌트조차 알려 주지 않던가?”

“그 부분에서는 워낙 말을 횡설수설하여 확실하게 장소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말끝을 흐린 프루엘레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타인 가의 핏줄이 아니라면 누구도 열 수 없는 곳이라 그곳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할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더군요.”

“제법 의미심장한 말이군. 비유는 아닐 테고, 해당될 만한 곳이 있을지 생각해 봐야겠는걸.”

그 순간, 유더는 제가 어쩌면 그 답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 들었던 이논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덕이었다.

“……단장님. 갑작스레 죄송합니다만, 감옥 3층에서 제가 발견한 것에 대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음?”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초대 타인 공작께서 계셨던 옛 시대에는 혈연의 힘으로만 열 수 있는 마법 장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프루엘레 공자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곳에서 본 타인 가의 문장이 어떤 마법적 잠금장치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혈연의 힘으로만 열 수 있는 마법 장치라고?”

프루엘레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반문했다. 그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도 몰랐던 듯했다. 키시아르 또한 고기를 자르던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으나, 그는 이내 유더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피의 보호인가. 흠. 확실히 그 시대에 만들어진 건물이고, 건물 주인이 마법사였다면 4층을 숨기기 위해 그런 장치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군.”

“송구합니다만, 전하. 피의 보호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게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부끄럽지만 제가 마법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 아니라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천 년 전쯤의 마법사들이 비밀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사용했던 장치라네. 숨겨진 비밀이 있는 곳에 마법사와 그의 피를 이은 이들 외에는 출입할 수 없도록 해 둔 것이지.”

이논과 거의 다르지 않은 설명을 한 키시아르가 말을 덧붙였다.

“마력이 온 세상을 충만히 채웠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여러 가지 문제로 사용하지 않게 된 지 오래이니 모르는 것도 당연해. 스스로를 탓할 것 없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프루엘레가 새삼 놀라워하는 얼굴로 유더를 돌아보았다.

“그런 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아일 경은 어떻게 알았지? 정말 대단하군.”

“…4층이 존재하는 것이 맞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숨길 수 있었을까 궁금하여 정보를 구하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프루엘레 공자님께서 초대 타인 공작님이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알아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런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 준 이는 이논이지만, 이논의 정체를 알릴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설명을 대충 얼버무려야 했다.

“그렇다 해도 대단한걸.”

유더는 순수하게 감탄하는 프루엘레의 곁에서 제 얼굴을 바라보는 키시아르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소리 없이 내부를 꿰뚫을 듯한 붉은 눈을 피하여 음식 접시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