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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80화 (380/805)
  • 380화

    유더는 노사제들이 무언가 망설이는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머뭇대는 이유를 알 듯하다 생각했다.

    ‘벨트레일 샨 아페토가 생각나는군.’

    지닌 신성력은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음에도 4대 공작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12인의 원로사제 자리까지 올랐던 사내. 그는 죽은 지 오래지만 그와 같은 이들은 아직도 신전에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흔하다 하여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키시아르가 루산의 신성력을 언급하며 이 자리에 동석시킨 건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그러면… 제가 먼저 해 보겠습니다.”

    한참 동안 서로에게 순서를 떠미는 눈빛이 오고 간 끝에, 한 노사제가 불편한 얼굴로 나섰다. 그는 행여나 신검 오르의 끄트머리에 옷자락이라도 닿을까 걱정되었는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손을 뻗었다.

    그가 입 안으로 기도문을 웅얼거림과 동시에 흰 신성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루산이 평소 발휘하던 신성력 수준은커녕 키시아르가 내던 신성력의 반도 되지 않는 수준의 희미함을 보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도 멀리 떨어져 힘을 보낸 탓에 정작 검까지 닿는 빛은 얼마 되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게 좋지 않겠나?”

    아무 변화도 없는 검을 보며 키시아르가 다정히 반문했으나, 노사제가 내던 빛은 그 순간 맥없이 끊겨 버렸다.

    “이런.”

    “……죄송합니다.”

    사제는 몇 번 더 힘을 내 보려 노력했지만 더는 나오는 빛이 없었다. 맥없이 물러난 그를 대신하여 두 번째 사제가 나섰다. 그는 용감하게 신검 가까이까지 다가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불행히도 낼 수 있었던 신성력의 양이 첫 번째 사제보다 훨씬 적었다. 그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끙끙대며 신성력을 짜낸 뒤에도 신검은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사제는 빌름 남작의 가까이에 서서 내내 의심스레 키시아르를 보던 눈초리 나쁜 자였다.

    “송구하오나 저는 준비를 조금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준비를 해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숫제 말만 공손한 통보였다.

    세 번째 사제는 자신이 요즘 신전 일로 바빠 건강이 좋지 않아진 탓에 힘을 내기가 어려울 듯하다는 핑계를 대며 사제들을 위해 만드는 특별한 성수를 두 병이나 마시고서 비장하게 나섰다.

    “흐으읍……!”

    그러나 성수의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낸 신성력은 셋 중 가장 적었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도 저보다는 밝겠군.’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용을 써 대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보기 어려웠는지, 나머지 두 사제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앓는 듯한 침음 사이로 부끄러워 붉어진 목덜미들이 보였다. 빌름 남작은 입술을 깨물었고, 여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미칼린은 웃음을 참지 못해 빠르게 기침을 토했다.

    “퓌토 사제. 거기까지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겨우 웃음을 참아 낸 미칼린이 어렵게 말을 걸자 세 번째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비해 신성력이 나오는 속도가 너무 느릴 뿐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힘을 발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마법사인 저도 압니다. 평소 퓌토 사제의 훌륭한 설교를 흠모하던 입장에서 염려가 되어 드리는 말씀이니 불쾌히 생각지 마십시오.”

    미칼린은 몹시 능숙하게 상대를 살살 달랬다. 그가 몇 번이나 달랜 후에야 세 번째 사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생색을 내며 손을 떼어냈다.

    “저는 아직 괜찮으나, 수장께서 그리 걱정해 주시니 어쩔 수 없군요.”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을 해 보아도 힘을 짜내느라 땀이 솟아난 얼굴과 떨리는 손은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뒤로 빠지려 손을 내리기가 무섭게, 빌름 남작이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허어, 이럴 수가. 훌륭한 사제 세 분의 신성력을 받아들였음에도 신검에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다니…….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러게 말이야. 나도 무척 놀랍군.”

    키시아르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자 빌름 남작이 잠시 입가를 꿈틀대다가는 이내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 혹 신검이 신성력에 반응한다는 정보는 이전에 확인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이미 확인하신 정보가 아니라 그저 옛 기록을 통해 알고 계신 정보였다면 혹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생각하여 걱정스러운 충심에…….”

    말이 길었지만 요약하면 결국 사제 세 사람의 신성력에는 문제가 없었으니 신검 쪽이 의심스럽다는 뜻이었다.

    “저희만 이 자리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을 다른 이들이 알았다면 얼마나 놀라고 걱정하였을지…….”

    한술 더 떠 키시아르에게 불리한 상황인 듯 화제를 바꾸어 버리는 남작의 말솜씨에도 키시아르는 웃기만 했다.

    “그래. 충분히 할 만한 걱정이지. 남작의 충심은 이전부터 나도 아주 인상 깊게 보고 느낀 바야.”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라면 누구라도…….”

    “그렇지만 걱정 말게. 이 자리에 있는 사제는 세 명이 다가 아니지 않나.”

    “예?”

    “루산 사제. 이리로.”

    빌름 남작은 마병단의 유일한 사제 또한 오늘 키시아르와 함께 참석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젊디젊은 애송이 평사제라는 사실 또한 이미 하인들을 통하여 들은 지 오래였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짙은 녹색 머리칼을 대충 질끈 동여맨 젊은 사제의 목에 걸린 나무 성표는 어쩐지 빌름 남작을 몹시 미심쩍고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괜찮다면 이 검 위로 신성력을 부어 증명을 도와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루산은 서슴없이 검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기도문을 외지도, 성수를 마시지도 않은 채 그저 조용히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폭포수처럼 밝은 흰 빛이 그의 손안에서 쏟아져 나오며 신검의 검날을 말 그대로 덮어씌워 버렸다.

    “…….”

    세 명의 노사제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빌름 남작조차 입을 다물었다. 아주 오랫동안 빛을 쏟아부은 루산이 숨 한 번 차지 않은 얼굴로 신성력을 거두자 기다렸다는 듯 은빛 검날 위로 새로운 빛이 스르르 떠올랐다. 잠시 후 그것이 이지러지며 검날 위로 아름다운 문장 같은 글씨들을 띄워 올렸다.

    “저건 경전의……!”

    노사제 중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른 누군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정순하고 강력한 신성력 앞에서 유더 또한 압도되는 감각을 느꼈다.

    이토록 짙고도 특이한 신성력을 느껴 본 건 처음이었다. 사제들이 치료를 위해 발하는 신성력과는 전혀 다른데도,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기 그지없었다. 루산 또한 놀란 얼굴을 했으나 그는 이내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한참이 지나도 빛은 쉽게 사그라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혀를 차며 검을 검집 안에 밀어 넣었다. 어쩐지 검이 들어가기 싫기라도 하다는 듯 더욱 강한 빛을 토해 냈지만, 주인이 가차 없이 넣어 버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모든 기운이 뚝 끊기듯 사라졌다. 노사제들 쪽에서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무심히 내려다본 키시아르가 검을 도로 허리에 매며 입을 열었다.

    “이제 믿겠나?”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빌름 남작도, 세 명의 노사제들도, 그저 얼이 나간 얼굴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늘 본 일은 딱히 언급을 금하라 하지 않겠네. 만약 또다시 지나친 걱정을 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신을 의심하는 일과 같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전해 주었으면 좋겠군.”

    붉은 눈동자가 경고하듯 빌름 남작의 성마른 얼굴을 훑었다.

    “빌름 남작. 자네를 믿고 부탁해도 되겠지?”

    몹시 다정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늘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빌름 남작은 등 뒤를 타고 흐르는 기묘한 추위를 느끼며 겨우 메마른 입을 열었다.

    “……예, 전하.”

    “저 또한 거룩한 기적을 본 영광을 결코 잊지 않고 전하겠습니다.”

    미칼린이 뒤이어 공손히 가슴에 손을 얹으며 경의를 담은 인사를 했다. 유더는 미칼린 펀트를 만난 이래 이토록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자네들은?”

    키시아르의 시선을 받은 노사제들도 고개를 숙였다. 빌름 남작과 사이가 좋아 보였던 사제는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던 듯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였으나, 그를 제외한 다른 두 명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빌름 남작의 패배는 누가 보아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명백했다. 유더는 신검의 검집을 시원히 드러내고도 그 화려함에 조금도 지지 않는 사내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새삼스럽게도 심장이 뛰었다.

    신검 오르가 선택한 새로운 주인.

    이번에 그 검은 주인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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