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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79화 (379/805)

379화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타이누에서 다시 만난 미칼린은 대삼림에서 머물던 때보다 훨씬 깨끗하고 정갈한 차림새였다. 그는 유더를 보며 연신 다행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수장님께서도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는 오늘 있을 일 때문에 초대를 받았다네.”

대답은 미칼린의 뒤에 앉아 있던 키시아르가 해 주었다.

“비공개 자리에서 신검을 확인시켜 주기로 했음에도 빌름 남작이 자꾸 핑계를 대며 참석자를 늘리자고 하기에, 가능하면 그간 서부의 치안을 지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 온 서부 마법사 연합을 부르자고 했지.”

남작이 무엇을 노리고 싶었을지는 뻔했다. 키시아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드러날 시 어떻게든 일을 크게 만들어 제 영향력을 키우고 싶은 것이다. 나그란의 별 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으면서도 끝까지 저열한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점이 대단했다.

키시아르가 지닌 검은 진짜 신검이고, 그 또한 진짜 신검의 주인이기에 딱히 물러설 이유는 없었으나, 그는 남작의 자존심을 슬슬 자극하며 서부 마법사 연합과 미칼린을 끌어들였다.

남작은 서부 마법사 연합이 그 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여겼으나, 놀랍게도 미칼린은 요청 편지를 보자마자 단번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빌름 남작의 저택 따위에 오고 싶지는 않았으나,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감내할 보람이 넘치고도 남겠지요.”

“그것이면 충분하지.”

“그리 말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그저 현장 내에서 중립을 지키며 공정하게 사안을 판단하는 것뿐입니다만……. 오늘 본 진실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명예를 걸고서 서부 내의 모든 이들에게 가감 없이 알릴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노마법사를 보며 유더는 키시아르가 서부 마법사 연합을 끌어들인 이유가 단순히 그들과 빌름 남작 사이의 오래된 앙금 때문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서부에서 마법사 연합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군.’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몇 년이 넘게 빌름 남작 대신 서부 내의 몬스터들을 정리하는 위험한 일을 줄곧 처리해 왔다니, 어지간한 이들과는 모두 안면을 텄을 터였다.

‘우리를 도와 이전의 고마움을 갚겠다는 뜻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감히 마법사의 자존심을 짓뭉갠 빌름 남작에 대한 복수도 할 수 있을 테니 기분이 좋겠지.’

그리고 서부 마법사 연합이 키시아르에게 받기로 한 전폭적인 연구 후원 또한 저 상쾌한 결정에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미칼린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키시아르를 보러 온 것만 보아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변한 태도가 느껴졌다. 대삼림에서는 달갑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오늘은 상당히 기껍다 생각하며 유더는 희미하게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빌름 남작은 고작 서부 마법사 연합 하나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실제로 닥쳐 보아야 알 일이었다.

유더가 생각에 잠긴 동안 키시아르의 시선이 그의 옆에 있는 루산에게로 향했다.

“루산 사제. 오늘 방문할 사제들은 내가 지닌 신검 오르의 진위 여부와, 내가 진짜 주인인지 아닌지를 보기 위해 오는 거라네. 알고 있나?”

“아, 네. 들었습니다.”

루산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론 빌름 남작이 데려올 사제들을 믿으나,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기 위해 자네의 신력이 필요해. 신력이 강한 사제일수록 도움이 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 이상 갈 이가 올 것 같지는 않더군.”

노골적인 칭찬에 루산의 귀가 붉어졌다. 그는 목에 건 나무 성표를 꽉 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고맙군. 그러면… 나단.”

“네.”

마지막으로 주군의 시선을 받은 나단 주커만이 앞으로 나섰다.

“타인 공자에게 오늘 저녁 식사 약속에 조금 늦어질 수도 있을 듯하니, 양해를 부탁한다고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나단 주커만이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대화는 일종의 신호였다. 유더는 이전에 했던 회의에서 키시아르가 프루엘레 반 타인에게 했던 명을 떠올렸다.

키시아르가 비공개 자리에서 태양신의 사제들과 빌름 남작을 만날 때, 남작으로 변신하여 그의 동생 글레힘 빌름을 만나 정보를 캐낼 것.

나단 주커만을 보내는 건 프루엘레에게 개시 시간을 알림과 동시에 그를 보호하기 위함일 터였다.

키시아르는 고대하던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느긋이 일어났다. 그의 허리에 매달린 신검은 아직 두터운 천을 두른 상태 그대로였다. 유더는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늘 있을 자리는 어디까지나 비공개를 표방하였기에 저택 내의 하인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키시아르는 빌름 남작이 미리 하인들을 물러나게 해 둔 길을 따라 본저 뒤편에 위치한 작은 기도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도착하여 그들을 기다리던 사제복 차림의 노인 세 명과 빌름 남작이 있었다.

“펠레타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영원한 광휘의 빛을 이으신 분. 따스한 곧음이 언제나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세 명의 사제들은 서부 지역의 태양신 신전을 이끄는 명망 있는 이들이었다. 귀하게 태어나 자란 티가 나는 이들의 목과 손에는 귀한 보석과 금은으로 만든 성표들이 장신구처럼 걸려 있었다.

이름을 소개하고 인사를 마친 이들이 키시아르의 허리춤으로 일제히 시선을 옮겼다.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빌름 남작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그 검이 바로 신검 오르인지요?”

“그렇다네.”

키시아르의 여상한 대답에 나이 든 사제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한데 어째서 천으로 가려 두신 것입니까?”

“검집이 지나치게 화려하니 눈이 조금 아파서 말이네. 뭐, 확인을 위해서는 풀어야겠지?”

키시아르는 모두의 시선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검집을 묶은 천을 풀었다.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검집 위로 크고 작은 마정석과 보석 가루로 만들어낸 아름다운 무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신이시여.”

몹시도 감격스러운 것을 본다는 듯 한 사제가 과도하게 큰 성호를 그었다. 또 다른 사제는 의심을 아주 지우지 못하는 눈빛으로 유심히 검을 살폈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예장용 검처럼 보이니 의심스럽겠지.’

신검은 키시아르 이전에 제법 오랫동안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펠레타 성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초대 황제의 검이라 이름은 유명하지만 본래 그 검에 관심이 많았던 이가 아니라면 사제들도 그리 아는 바가 많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허락받지 않은 이가 신검을 만지면 큰일을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감히 손을 대어 보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키시아르는 의심 어린 눈빛으로 저를 보는 빌름 남작을 보며 미소를 지은 뒤, 천천히 손을 들어 검 손잡이를 쥐었다.

“아무 이유 없이 뽑는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듯하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신검 오르도 이해해 주겠지.”

검집 안에서 잘 손질된 검날이 서서히 빠져나왔다. 사제들과 빌름 남작이 일제히 눈을 가늘게 뜨고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검을 바라보았으나,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

침묵을 지키던 사제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기가… 몹시 대단해 보이는군요.”

“아침에도 잘 갈아 두었으니 당연하지.”

키시아르가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검을 이리저리 돌려 보여 주었다.

“느껴지나? 신검의 힘이.”

사제들이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보기만 하면 신검을 알아볼 만한 힘이나 표식이 드러날 줄 알았던 모양이지만, 그렇지 않아 난감해하는 기색이었다. 한참 뒤 사제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보기만 해서는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아 확인이 어려울 듯합니다. 저희에게 부디 대삼림 밖에서도 느껴졌다는 그 강력하고도 성스러운 힘을 보여 주실 수 있으실지요?”

“음……. 사실 그건 조금 힘들겠군. 그때 위험한 상황 때문에 검의 힘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 탓인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회복이 다 되지 않았다네. 알다시피 내가 허약한 몸으로 유명하지 않던가.”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어깨가 넓은 사내의 웃는 얼굴로 향했다. 하지만 펠레타 공작이 병약하여 오랫동안 칩거한 사실만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증명하고 싶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네들 중 누군가가 신성력을 이 검에 부어 줄 수 있겠나?”

“예?”

“신께서 내려 주신 검은 오러를 다른 검보다 더욱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동시에 신의 힘에 반응하지. 신성력을 부어 주기 위해서는 굳이 검에 손을 댈 필요가 없으니, 충분한 양의 힘만 주어진다면 확인이 가능할 거라네.”

“아…….”

세 노사제들의 얼굴이 동시에 다양한 색으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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