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처음에 헬렘의 이름만 소개하기에 성은 대외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예상을 한창 뛰어넘었다. 오르 제국의 궁중 마법청장이라면 진주탑 꼭대기에 있는 원로 대마법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실력자일 터였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마법 한 번 쓰기조차 힘들어하는 시대라고는 하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유더가 이전 생에서 만난 진주탑의 몇몇 원로들은 놀랄 만큼 강력한 속성 마법을 쓸 줄 알았다.
몬스터 전문가라기에 타이스 율만처럼 뛰어난 연구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직위를 차지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지만, 여러 명이 존재하는 진주탑 원로와 달리 제국의 궁중 마법청장 자리는 하나뿐이었다. 얼마나 뛰어난 연구 실력을 선보였든 그것만으로는 될 수 없을 자리였다.
전 청장씩이나 지낸 이가 명예도, 성도 모두 숨기고 고작 할머니 소리를 들으며 말년을 구석진 펠레타에서 보내고 있다니.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믹 슈덴과 나단 주커만의 태연한 반응을 보아서는 아무래도 진짜 같았다.
아무튼 헬렘의 말로는 준비 기간과 인력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니 다행이었다. 유더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제 몸의 회복을 넘어 키시아르의 그릇과 관련된 문제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열쇠까지 반드시 찾아낼 셈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부터 시작하지요. 자, 약사님이 함께 있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이논은 작게 한숨을 내쉬기는 했지만 넉살 좋은 믹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약사님 말고, 이논이라고 불러요.”
“좋아요, 이논. 획기적인 치료법 발상만큼이나 시원시원하네요.”
나단 주커만은 돌아갈 준비를 위하여 먼저 나갔고, 키시아르는 헬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움직이는 사이에 유더는 또다시 저를 바라보는 믹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 안에서 또다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언뜻 보이는 듯도 했다.
“…아까는 미처 묻지 못했습니다만, 각성자십니까?”
“오. 내 힘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리 빨리 알아차렸죠? 과연 대삼림의 영웅쯤 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본래 기운에 조금 민감한 편입니다.”
담담히 대답한 뒤, 유더는 목소리를 낮추어 믹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무슨 능력을 지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보실 때 자꾸 기운이 느껴지니 신경이 쓰이는군요.”
“그것까지 느꼈어요? 조금 민감한 정도가 아닌데요. 대단하네.”
믹은 솔직하게 감탄한 뒤, 순순히 답을 해 주었다.
“제가 가진 능력은 대상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겁니다. 눈으로 발휘되다 보니, 조절하기가 쉽지 않아요. 뭔가 신경 쓰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자꾸 힘이 나오거든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내부요? 장기를 보신다는 겁니까. 아니면 기운?”
“하하하. 기운도 좀 볼 줄은 알지만, 이건 둘 다 아니에요. 뭐라고 해야 하나.”
머리를 긁적이던 남자가 유더를 다시 한번 힘주어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대놓고 눈가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제가 보는 건 말하자면… 껍데기 안에 있는 알맹이와 같은 부분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우리 보좌님은 굉장히 특이한 알맹이를 가졌어요. 제가 본 사람 중 최고로요.”
뭐가 어떻기에 여태 본 사람 중 최고로 특이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미약하게 찌푸린 유더를 향해 믹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안엔 구멍이 많아요. 빈 공간이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순간 가슴 속 어딘가가 크게 울렸다. 놀라움과 경계심이 동시에 유더의 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철렁한 감각을 내리누른 유더는 표정 변화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
“뭐, 그게 위험해 보인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세상의 모든 이들을 다 들여다본 건 아니니까 어딘가엔 보좌님보다 더 이상한 알맹이를 지닌 사람도 있겠죠. 어쩌면 당신이 지닌 힘이 너무 강하거나 부상의 여파로 그런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르니 걱정은 말고요.”
위로인지, 무엇인지 모를 말을 쾌활하게 내뱉은 뒤 믹은 유더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음에 볼 때는 보좌님께 대삼림에서 잡은 몬스터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네요. 사실 그걸 가장 기대하고 온 것도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유더의 무뚝뚝한 대꾸에도 믹은 즐거워했다.
“좋아요, 좋아. 그날을 위해 좋은 술을 마련해 둬야겠네요. 슈덴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대접해 드리지요.”
그도, 헬렘도 여러모로 성격이 독특한 이들이었다. 그 점이 키시아르의 사람들다우면서도 이전 생에는 없었던 만남에 기분이 다소 묘해졌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이논을 두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키시아르는 조용히 다음 일정을 고지해 주었다.
“나는 돌아가자마자 빌름 남작과 서부 태양신 신전의 사제들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할 거라네. 그 자리에 루산 사제를 동석시킬 생각이니 불러와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루산에게는 마침 마티와 로벨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야 했으니 잘된 일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루산을 찾아간 유더는 뜻밖에도 기억을 잃은 자들을 돌보고 있는 로벨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여기서 일을 돕고 있었을 줄이야.’
이전에 루산을 돕던 단원들이 다른 일 때문에 많이 빠져 일손이 부족하기는 했겠지만, 설마 로벨의 도움을 받고 있을 줄은 몰랐다. 유더의 시선을 눈치챈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는 이내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왔다.
“유더 님. 무슨 일이십니까?”
“단장님께서 사제님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좋은 결과가 나온 겁니까.”
뭉뚱그려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로벨과 마티의 이야기임을 모를 리 없을 루산이 어설픈 미소를 흘렸다.
“하하… 그건 아니고요. 오히려 그 반대라서 이렇게 이분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겁니다.”
‘……그 반대?’
유더와 시선이 마주친 로벨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대신하여 루산이 설명을 해 주었다.
“마티는 로벨을 지금 당장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로벨의 사정을 듣고 나서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일단 생각할 시간을 더 주기로 했죠.”
“역시 그랬군요.”
“……그래도 마병단원님, 아니. 유더 님이 먼저 경고를 해 주셔서 다행이었죠. 아무 대비 없이 들었다면 정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요.”
로벨이 끼어들어 작게 대답한 뒤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되찾은 이들이 머물고 있는 방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인 듯해서, 계속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일손이 필요한 사제님을 돕고 싶다고 부탁드렸죠.”
힘이 없어도 대답은 분명했다. 마티가 자신을 거부한다고 모든 걸 포기하지 않은 점이 긍정적이었다. 루산도 같은 생각을 한 듯 로벨을 바라보며 말을 보탰다.
“기억을 잃은 분들은 로벨 씨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얼굴이 익은 사람을 마주하는 게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수락했습니다. 다만 마티 씨나 기억을 되찾은 다른 분들과는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어요.”
“그 정도면 괜찮겠지요.”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산의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계속 일만 하진 않을 겁니다. 나한 놈을 찾아가실 땐 반드시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이곳에 온 뒤 그쪽에서의 연락은 없었습니까.”
“네. 전혀 없었죠. 본래 머물던 숙소를 비우고 도망쳤다는 말도 들었는데, 다음에 어디로 갔을지는 저도 모르겠더군요. 기껏 협력을 약속드렸는데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로벨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했다. 그는 나한을 잡는 것만이 유일한 복수이자 마티를 향한 속죄라 여기는 듯했다.
“…그러면 로벨 씨, 아까 말한 대로 여기 있는 분들께 음식을 모두 먹여 드리고 나서 바퀴 의자 방향을 돌려 주세요. 저는 유더 님과 함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루산은 로벨을 조금 안타깝게 쳐다보다가는 남은 일을 지시하고 유더와 함께 몸을 돌렸다. 그들은 키시아르가 있을 숙소 방향으로 향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로벨 씨는 정말 협력적이에요. 저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부터 뭐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어 하시더군요. 마병단을 어려워하긴 하지만 적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요.”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그분을 구해 데려와 주신 유더 님 덕이죠.”
루산은 아무렇지 않게 유더의 얼굴에 금칠을 했지만, 유더의 입장에서 보자면 루산 쪽이 더 대단했다. 아무리 지금은 괜찮아졌다고는 해도 제게 해를 가한 나한과 같은 집단에 있었던 각성자를 상대로 그리 대인배처럼 굴 수 있다는 건 보통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한 마음이었다.
“아, 그리고 아까 대삼림과 수도에서 이쪽으로 날아온 편지들이 꽤 많이 전달되었는데… 유더 님께 날아온 편지가 있을지도 모르니 이따 확인해 보시죠. 제게도 왔거든요.”
“그렇습니까? 확인해 봐야겠군요.”
이전에 대삼림에 남은 동료들이 보낸 편지에 간략하게 답장을 써서 보내 주었었다. 그에 대한 답장이 슬슬 다시 올 때가 되기는 했을 터였다.
유더가 루산과 함께 돌아간 숙소에는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 이외에도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그 손님은 유더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오.”
그는 바로 서부 마법사 연합의 수장, 미칼린 펀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