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여러 시선들이 그의 손끝에 몰리는 감각을 느끼며 철창 쪽을 건드리자, 몬스터가 작은 소리를 냈다.
잠시 후, 페투아멧은 느릿하게 꼬리를 내리고 유더의 손이 있는 방향을 향하여 다가왔다. 철창에 매달려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입을 뻐끔대는 몬스터의 반응은 이전에 보았을 때와 다를 바 없이 똑같았다.
유더는 손을 반대쪽으로 옮겼다. 그러자 페투아멧 또한 머리를 돌리고 손끝을 쫓았다. 그 모습을 보며 헬렘과 믹이 동시에 무어라 한숨 같은 소리를 흘렸다.
“놀랍군요.”
“정말로 반응하네.”
“정보를 읽는 능력을 지닌 이의 말로는 저 몬스터가 유더를 저와 같은 존재라고 느꼈다고 하더군.”
어느새 유더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온 키시아르가 조용히 어깨를 붙잡아 우리에서 조금 멀어지도록 떼어 놓았다. 너무나 교묘해 누구도 유난스럽다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두 사람의 생각은 어떻지?”
“몬스터는 철저히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요. 저리 따르는 건 같은 무리를 발견한 반응임에 틀림없습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몬스터는 선두에 있는 놈이 움직이는 방향을 쫓으려 하는 성질이 크니까요.”
헬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확실히 오랫동안 몬스터 연구를 해 온 이답게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보다 훨씬 지식이 풍부했고, 놀라운 현상을 보고서도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몬스터들은 같은 종의 체액에 제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독성을 지닌 체액을 흡수한 이가 앞에 있다면 같은 종으로 인식했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헬렘은 페투아멧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는 녀석이라 그래도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만약 같은 종을 만났을 때 오히려 적개심을 보이는 몬스터였다면 오히려 유더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려 했을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듣자 키시아르가 서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랬다면 아마 자네들도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겠지.”
헬렘의 뒤를 이어 믹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제 생각도 할머니와 같아요. 신전에서는 미신이라고 하지만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 물건이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 준다고 믿는 이들은 많죠. 실제로 불가사의하게 공격을 피해 간 이들의 사례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이것도 낯설긴 하지만 가능하기는 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역사에 자주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존재하는 사례라며 믹은 자신이 아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몸이 다 낫고 나서도 이 현상이 유지될지 아닐지까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 당장 이 몬스터를 죽인다 해도 보좌님의 몸 상태나 남은 부상엔 그리 해가 가지 않을 것 같네요. 할머니는 어때?”
“내 생각도 같구나.”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그러나 이후에도 믹의 짙은 푸른색 눈동자는 한동안 유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호기심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시선이었다.
‘뭔가…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빛이군.’
무심코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유더는 문득 익숙한 기운을 얼핏 느꼈다. 각성자들이 힘을 사용할 때 흘러나오는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이 아주 미세하게 믹에게서 느껴지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착각인가 싶을 만큼 약했지만 유더는 자신의 감각을 신뢰했다.
‘……믹 슈덴이 각성자였나?’
슈덴 상단의 주인이 각성자라는 말은 이전 생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으나, 믹이 키시아르를 향해 입을 여는 쪽이 더 빨랐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저희의 의견을 들으셨으니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유더는 묵묵히 생각에 잠긴 키시아르의 흰 뺨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뺨에 진 속눈썹 그늘이 더욱 깊어진 것이, 당장이라도 페투아멧을 죽일지 말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 후, 페투아멧의 우리를 내려다보던 붉은 눈동자는 뜻밖에도 유더에게 향했다.
“그래. 해가 없다는 결론이 났으니 처분에는 이제 문제가 없겠군. 하지만… 보좌는 저것으로 뭔가를 더 알아보고 싶었던 게 아닌가?”
갑자기 화살이 제게 향했다. 유더는 내심 당혹했으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확실히 알아보고 나서 처분하자는 말을 할 성격이 아니니까.”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 여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게 정말 키시아르다웠다. 간만에 느끼는 능구렁이 같은 면모였다.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이논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하며 뭔가를 몹시 추궁하고 싶어 하는 듯한 눈빛으로 변했으나 유더는 그 시선을 슬쩍 피해 입을 열었다.
“……네, 뭐. 저 몬스터의 힘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내고 싶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 외의 이유로도 당장 처분하는 건 반대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무슨 이유지?”
“이논이 그동안 몬스터를 관찰하며 생각해 본 바가 있다고 하더군요.”
유더는 이논을 대신해 말을 이었다.
“저 몬스터는 독성 체액을 통하여 마력을 흡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을 흡수한 저도 같은 능력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유더가 흡수한 붉은 돌의 힘도 비슷하게 연관되겠지만 그 부분은 이곳에서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몸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독성을 억지로 없애는 것보다는, 아예 흡수하는 방법을 몬스터를 통해 찾아내는 게 가능하다면 제가 원하는 바도 함께 알아낼 수 있으니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건… 몸에 남은 독성을 오히려 활성화시켜 보겠다는 뜻입니까?”
헬렘이 신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여태 뒤로 물러서 있던 이논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대답했다.
“남아 있는 독성은 소량이지만, 몸에 지나치게 적응한 나머지 신성력으로도 강제로 떼어낼 수 없는 상태라 판단했습니다. 어차피 독을 해독한다는 건 몸에 적응을 시킨다는 뜻이죠. 저 녀석의 기력이 그동안 많이 회복되어 본래 지닌 힘으로 남은 독성을 버틸 정도는 충분히 된다고 판단되니, 해 볼 만한 시도가 아닙니까.”
“그러려면 몬스터의 피를 사용해야 할 텐데, 그것까지 생각하고 말한 겁니까?”
이논이 헬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 몬스터가 위험했던 이유는 독성 그 자체보다는, 서부의 마법사들이 만든 이상한 증폭진 때문이잖습니까. 증폭진을 삼키지 않은 놈의 피를 뒤집어썼다면 저 녀석의 몸에 저리 흡수되기도 전에 충분히 제거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논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러한 방법을 논해 보자는 제의를 했다. 유더는 그 방법이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했으나, 실행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판단도 들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흠. 이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방향의 해결책이네요.”
믹이 미묘한 미소를 지은 채 입술 아래를 느리게 문질렀다.
“하지만 마법으로도 다 제거하지 못하고 몸에 완전히 달라붙은 독성을 제거한다는 전무후무한 도전이니 그 정도쯤은 해 줘야 할지도 모르죠. 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해?”
“위험할 수 있어.”
헬렘이 단번에 대답했다.
“그래, 위험할 수 있지만 불가능하진 않은 거지. 그리고 그 위험 수준이 어딘지 가장 잘 알고 대처할 수 있는 게 할머니잖아. 저 보좌님이 이대로 평생 한쪽 눈이 먼 채로 살아야 한다면 전하께서 많이 실망하실 것 같은데 시도라도 해 보지 그래.”
헬렘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유더는 그들 사이에 슬쩍 끼어들었다.
“내키지 않으신다면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와 주시고 살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나 헬렘은 어쩐지 유더를 몹시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유더의 왼쪽 눈을 살핀 그녀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알겠다. 그럼 네놈도 도울 테냐?”
“할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돕고말고.”
믹이 시원하게 대답하며 눈을 찡긋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잖아. 거기다 저 약사님도 함께라면 생각 외로 금방 끝낼 수 있을지도 몰라. 보통 머리가 아니신 것 같은데.”
“…….”
이논의 미간에 주름이 더욱 많이 잡혔지만 그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말을 토해 내지는 않았다.
“자, 저희들 의견은 이렇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결정만 내려 주시면 되겠네요.”
믹의 말을 들은 키시아르의 시선이 유더에게로 향했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그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유더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 안에서 미약하게 어른거리던 감정들이 이내 빠르게 갈무리되어 사라졌다. 감정을 정돈한 그는 언제나처럼 결정이 빠른 펠레타 공작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헬렘. 자네가 그 부분을 책임지고 맡을 경우, 준비 기간과 인력은 얼마나 필요하지?”
“인력은 더 필요 없습니다. 이런 일은 사람이 많다고 딱히 좋을 것도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준비할 거라고 해 봐야 저 몬스터 하나면 끝이지요.”
그리고 대상이 될 유더 또한 필요할 터였다.
“아무튼 데려오신 젊은이의 창창한 미래가 걱정되어 해 보겠다는 거지,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전 손을 뗄 겁니다.”
“그런 마법사이기 때문에 자네를 믿는 거야. 청장.”
“은퇴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리 부르십니까. 하다못해 전 청장이라고 해 주시는 쪽이 맞지 않겠습니까.”
“성을 버렸다 해도 쌓아 온 업적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한배를 탈 거라면 다른 이들도 자네가 누구인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아야 공평하지.”
“…말로는 주군을 이길 자가 없군요.”
헬렘이 혀를 차며 유더와 이논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키시아르의 말이 맞다고는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제대로 자기소개를 했다.
“한때는 헬렘 카스피르라 불렸습니다마는, 은퇴하면서 성과 작위를 모두 버리고 넘겼기에 지금은 그저 마법사 헬렘입니다.”
유더는 내심 몹시 놀랐다.
‘…단순히 궁중 마법사 출신이 아니고, 전 청장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