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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75화 (375/805)
  • 375화

    초대 타인 공작이 마법사였으며, 대마법사 루마와 관계가 있었다는 놀라운 정보. 그게 사실이라면 지하 감옥 4층의 존재 유무를 프루엘레보다 잘 알지도 모르는 이가 우연히도 유더의 주변에는 한 명 있었다.

    “……초대 타인 공작이 루마의 제자였다는 게 사실이냐고?”

    갑작스레 유더의 방문을 받은 이논이 떨떠름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는 어디선가 채집해 온 약초를 빻고 있던 중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때 황제의 자식은 다섯 명 모두 루마의 제자였어. 물론 제대로 끝까지 배운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지만…….”

    “재능은 없었지만 연구에는 소질을 보였다던데. 루마가 이곳에 그를 보러 자주 왔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했고. 너는 본 적 없어?”

    “음…….”

    이논이 작은 그릇 안에 약초를 한 줌 더 넣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없어. 루마는 내 존재를 비밀로 했으니까. 나도 루마가 떠난 뒤론 황실이나 귀족들에게는 일절 개인적 관심을 두지 않고 임무에만 신경 썼고.”

    “그러면 지하 감옥 4층은 역시 없을 수도 있는 건가.”

    “설계도에 있었다면 있을 확률이 더 높겠지. 믿을 만한 마법사를 하나 찾아서 타인 가의 혈통과 함께 데려가 봐. 타인 가의 문장이 있었다면 피가 이어진 자들만 열 수 있는 장치가 존재할 수도 있어.”

    “그런 장치도 있어?”

    “옛날엔 꽤 흔한 보호 장치였어. 피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이논이 신경질적으로 약초를 찧다 말고 잠시 손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 감옥이 원래 연구 용도였고, 제일 아래층을 그렇게까지 해 가며 감췄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 초대 타인 공작이란 자는 꽤 찔리는 걸 연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찔리는 것?”

    “루마도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시간을 되돌리는 연구를 했는데, 다른 녀석이라고 그런 게 없겠어?”

    유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타인 공작이 루마의 제자인 건 맞는 듯하고, 지하 4층이 존재할 확률도 높다면 타인 공작이 숨겨 둔 ‘물건’도 그곳에 있을지 몰랐다.

    ‘일단 4층을 먼저 찾아 물건의 유무를 확인하고, 그다음에 초대 타인 공작이나 루마의 흔적을 뒤져 봐야겠군.’

    “이논. 지하 4층을 찾으러 갈 때… 혹시 너도 가 볼 생각 있어?”

    혹시나 싶어 묻자 이논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너… 혹시 거기 갈 생각이야? 몸도 아직 다 안 나았으면서 또?”

    “아니. 내가 반드시 가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어쨌든 4층을 찾기는 찾아야 하니까.”

    “수도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거라면 모를까, 이외의 장소에서 위험한 짓은 안 해. 난 너 같은 미친놈이 아니니까.”

    서슴없이 유더를 매도한 이논이 잠시 후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그보다 너, 내가 말했던 건 생각해 봤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더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전에 진료를 하며 이야기해 준, 힘을 제대로 되찾을 만한 새로운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음… 그렇지 않아도 단장님께서 오늘 펠레타에서 온 몬스터 전문가들을 만날 거라고 하셨는데 거기서 정보를 좀 더 듣고 조언을 구해 보려고. 너도 같이 가야 하니 준비해.”

    “몬스터 전문가는 또 뭐야. 난 못 들었는데?”

    그야 그럴 것이다. 사실 그 이야기를 전하려 여기 왔다가 타인 공작과 지하 4층에 대해 먼저 물어본 것이니 말이다.

    “지금 들었으니 됐잖아.”

    “되긴 뭘 돼?!”

    결국 대화의 끝은 익숙한 고함이었다. 유더는 용건이 있으면 그것부터 빨리 말하라는 타박을 받으며 이논과 함께 나섰다. 응접실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키시아르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사를 부르러 간다던 보좌가 한참 돌아오질 않아서 무슨 일인가 했군. 이제 가 볼까.”

    “네.”

    별저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마차 안에는 검은 천으로 감싼 작은 상자를 든 나단 주커만이 이미 올라탄 상태였다. 그는 키시아르와 함께 온 유더와 이논에게 소리 없이 눈인사를 한 뒤에도 상자를 지키는 위치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안에 대삼림에서 포획해 온 작은 페투아멧이 들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키시아르가 자연스럽게 유더를 제 곁에 앉혔기에, 이논은 나단의 곁에 앉았다. 유더는 이논의 불편함 가득한 표정을 보며 그가 이 자리를 참으로 내키지 않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오늘 만날 이들은 내 영지 펠레타에서 온 이들이네. 한 명은 작은 상단을 운영하는 이고, 다른 한 명은 펠레타 기사단 소속 유일한 마법사지. 이번 일 때문에 도움을 청하자 깊은 흥미를 보이며 흔쾌히 와 주더군.”

    키시아르는 두 사람 모두 경험이 풍부하여 몬스터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이며,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없다고 설명했다. 둘 모두 이전 생의 유더는 몰랐던 이들이었다.

    “펠레타 기사단에 마법사가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거든. 다른 마법사들과는 조금 다르다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금세 멈추었다. 빌름 남작의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집 한 채가 그들의 목적지였다.

    평범한 병사 같은 차림새로 앞을 지키고 있던 펠레타 기사들이 키시아르를 향해 경례를 했다. 유더는 펠레타에서 온 이들이 머물 곳까지 눈에 띄지 않게 철저히 미리 마련해 둔 수완에 새삼 감탄했다.

    “오셨습니까, 주군. 기다리다 이 늙은이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마차 여행을 다닐 정도라면 앞으로도 오십 년쯤은 건강히 살 거라네 헬렘.”

    “오십 년이나 더 살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저보다도 주군께서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기쁘기는 하군요.”

    안에서 먼저 그들을 맞이한 이는 마법사 로브 차림의 나이 든 여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 키시아르의 앞에 서니 자그마한 몸이 더욱 작아 보였지만,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눈빛만은 젊은이 못지않게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이 페투아멧의 우리를 든 나단 주커만에게 향했다가는, 뒤이어 이논, 마지막으로 유더에게서 멈추었다. 유더는 어쩐지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몹시 유심히 보는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슈덴은 어디 있지?”

    “그 녀석은 어젯밤 내내 무얼 했는지, 오늘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 할머니. 이르지 마세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된다고요!”

    2층 위에서 슬픈 고함이 들려왔다. 키시아르는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법사가 안내한 곳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치워진 큰 테이블 위에 나단 주커만이 몬스터가 든 상자를 내려놓고 천을 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마법사가 문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단. 그동안 키가 더 큰 것 같구나. 괴롭히는 녀석들은 없었니?”

    “…….”

    나단 주커만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지만, 분위기는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웃음을 터트린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으며 부관을 옹호했다.

    “자네의 눈에는 아직도 나단이 어린 시절 모습으로만 느껴지나 보군. 지금은 감히 그럴 이가 없는데도 말이야.”

    “제 눈에야 주군께서도 크게 다르지 않지요.”

    “뭐, 그야 그렇겠지만.”

    짧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유더와 이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헬렘은 본래 궁중 마법사 출신이야. 내가 펠레타로 떠나야 했던 때에 은퇴를 고려한다기에, 마침 때가 맞아 좋은 은퇴지를 찾아 주었지.”

    “말이 은퇴지, 사실상 죽을 때까지 곁에서 일하라고 잡아가신 거지요. 누가 그리 춥고 습기 찬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겠어요? 거기에 몬스터가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헬렘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키시아르는 웃기만 할 뿐 그 말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다.

    유더는 그제야 ‘다른 마법사들과는 좀 다르다’던 키시아르의 말을 이해했다.

    ‘궁중 마법사 출신이라면… 어릴 때부터 본래 알던 사이였겠군.’

    이전 생에는 보지 못했던 그녀의 내력이 좀 더 궁금해졌지만, 헬렘이 유더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음… 단복을 입은 걸 보니, 당신이 그 신입 보좌인가 보지요?”

    “네. 유더 아일이라고 합니다.”

    “듣던 것보다 훤칠하네요. 내 손자놈보다 훨씬 건실해 보여.”

    듣던 것보다라니. 어디서 저에 대해 먼저 들었다는 것인가.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칭찬이 조금 더 당혹스러웠다. 유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자 헬렘은 웃음을 흘린 뒤 이논과도 통성명을 나누었다.

    이논은 평소처럼 불퉁한 듯 무뚝뚝한 태도를 고수했지만 헬렘은 그런 태도에도 아무런 불쾌감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저 몬스터를 살펴보기를 원했다는 말은 들었다’는 말을 건네는 얼굴에서는 오히려 호감마저 엿보였다.

    “다 되었습니다.”

    페투아멧이 든 우리를 몇 겹으로 감싼 천을 모두 제거한 나단 주커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유더는 마법진이 그려진 철창 안에서 갉작대며 야채를 먹고 있는 작은 페투아멧을 보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삼림을 떠나기 전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통통해진 것 같았다.

    “저게 그 몬스터군요. 정말로 처음 보는 녀석이네요.”

    몬스터를 살피기 위해 돋보기 안경을 위로 바짝 올려 쓴 헬렘이 큰 흥미를 드러내며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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