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자선 파티라면…… 정확히 무슨 목적의 파티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타이누와 서부 곳곳의 귀족들을 초대하여 여흥을 즐기고, 서부의 발전을 위한 기금을 내는 목적의 파티입니다. 제 아버지이신 타인 공작께서 빌름 남작을 시켜 비정기적으로 열고는 하시지요.”
듣기만 해도 서부의 모든 것을 제 것처럼 여기는 타인 공작의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파티가 아닐 수 없었다.
“듣기로는 작년에도 경매가 열렸을 때에 맞추어 같은 파티를 열었었다고 합니다. 그때 타이누에 방문했던 외부 상단과 빌름 가의 손님이 겹쳐 몹시 어지러웠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작년의 그 경매가 끝난 뒤부터 제국 남부를 시작으로 여러 비밀스러운 ‘물건’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 새로운 마약, 위험한 마도구들, 유행하기 시작한 불법 격투장의 타국인 매매 정황까지.”
몹시 공교로운 우연이 아닌가. 키시아르가 전혀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는 눈빛으로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아마 작년에 방문한 이들 중 많은 수가 올해 또 올 확률이 높으리라 생각됩니다. 때문에 저는 제게 정보를 주는 이들을 통해 작년의 ‘파티’ 때 타이누에 왔던 자들의 정보를 구하는 중이지요.”
작년에 왔던 이들의 명단 중에 분명 비밀 무역의 관련자들과 구매자들이 있을 테니, 구하기만 한다면 올해 올 이들과 비교하여 필요한 정보들을 더욱 빠르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프루엘레가 타인 가의 핏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을 끝마치고 전하께 전해 드리는 대로 저는 잠시 수도에 돌아갈 겁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려 노력하겠지만, 그전까지는 부디 여기 계신 분들께서 제 동생 니폴렌을 잘 돌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돌아가는 즉시 프루엘레는 곧 나머지 동생들을 포함하여 가문의 다른 세력들을 설득하기 시작할 것이다. 유더와 마병단이 해야 할 일은 그동안 약속한 대로 그의 소중한 막냇동생 니폴렌을 보호하며 실질적인 증거들을 붙잡는 것이었다.
프루엘레가 이번 일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 알게 된 에버는 새삼 책임감 어린 눈으로 고양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니폴렌 공자님을 보호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떠나시기 전 니폴렌 공자님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건 당연히 따로 말씀드릴 생각이었는데… 먼저 말씀해 주시니 이리 든든할 수가 없군요.”
“마병단의 보호를 원하는 각성자라면 누구든 부단장인 제가 신경을 써 드리는 게 당연한걸요. 언제든 편히 전달해 주세요.”
프루엘레의 눈동자가 안도의 감정으로 한결 따뜻하게 변했다. 유더는 든든하기 그지없는 에버의 모습을 보며 새삼스레 이전 생의 그녀를 잠시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신입 단원이 들어올 때마다 적응훈련 담당을 자주 맡았었지. 그때도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에버처럼 그가 단장이 된 뒤에도 곁에 남은 얼마 안 되는 초기 단원들과 유더의 사이에는 언제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한 껄끄러움이 존재했다. 함께 오래 일한 만큼 손발은 잘 맞았지만 그 벽은 최후까지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 그때는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과 같았다.
그녀가 앞으로 어떤 힘을 발전시켜 어떻게 변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했으면서도 정작 이런 면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 조금 씁쓸했다.
“니폴렌 공자에 대한 정보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이외에 나머지 두 부단장들에게만 알려 둘 생각이네. 나중에 칸나가 돌아온다면 에버 자네가 전달해 주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에버의 대답을 들은 키시아르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뒤 다음으로 넘어갔다.
“프루엘레 공자에게서 전달받은 정보를 토대로, 우리는 경매와 파티 당일 몹시 바쁘게 움직이게 될 거라네. 목표는 그때까지 타인 공작이 타이누에 숨겨 둔 ‘물건’들의 행방을 알아내고, 그것을 노리기 위해 올 각성자 집단을 막는 것이지. 현재로서는 두 집단으로 나누어…….”
이전 생의 에버를 잠시 떠올렸기 때문일까. 유더는 물 흐르듯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 중인 키시아르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손등이 저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지금은 장갑으로 감싸 보이지 않는 제 손등과 손가락 끝에, 매끄럽게 움직이는 저 입술이 닿았었다.
상대의 손을 공손히 받쳐 올려 손등부터 손가락 끝까지 내리누르는 키스는 흔히 지극한 경애의 의미를 일컬었다. 흔하게는 아래에 있는 이들이 윗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인정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했지만, 간혹 어떤 군주들은 역설적으로 그 키스를 공신에게 선사할 때도 있기는 했다. 어느 쪽이든 지나친 의미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평소처럼 입맞춤을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건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키시아르는 스스럼없이 유더의 앞에서 낮아지려 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음에도 그 순간이 그토록 철렁하게 고통스러웠던 건, 아마도 그것이 이전 생의 어느 순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유드레인 아일의 2대 마병단장 임명식 날 같은.
“…….”
유더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과거의 어느 날이 잠시 흘러갔다가는 지워졌다.
‘쓸데없는 생각을…….’
혹여나 눈치가 비상한 상대에게 들킬까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의자 위의 고양이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고양이는 커다란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며 꼬리 끝을 움직였다.
“…물건의 행방을 찾아내는 건 글레힘 빌름을 찾아가 확인해 볼 생각인데, 이건 프루엘레 공자의 도움이 조금 필요하겠더군.”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혹 빌름 남작으로 변신할 수도 있겠나?”
유더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키시아르의 질문을 들은 프루엘레는 잠시 무언가 가늠해 보듯 눈을 감았다 뜬 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능합니다.”
“그의 동생인 글레힘을 상대로도 들키지 않을 자신은?”
“그것도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글레힘을 찾아가는 시간에 남작이 다른 곳에 모습을 드러내면 아랫사람들의 의심을 살 테니, 그런 부분이 조금 까다롭겠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키시아르의 답 속에는 이미 모든 것을 생각해 둔 듯한 단단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글레힘을 구할 때 사용한 신검 이야기가 퍼진 덕인지 서부 태양신 신전의 원로 사제들이 이곳으로 방문하기로 했거든. 비공개적인 자리이고 남작도 반드시 동석하려 할 테니, 자네는 그 시간에 맞추어 글레힘에게 가게. 자세한 건 나단을 보내 알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이후에도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뒤, 식사가 끝났다. 프루엘레는 돌아가기 전 에버를 잠시 불러세웠다.
“벡 부단장님.”
“네?”
“사실 전 수도에서 열린 아페토 가의 재판들 중에서 당신을 뵌 적이 있습니다.”
에버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러셨군요.’하고 대답하자 프루엘레가 조금 망설이다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재판이 잠시 휴정된 사이를 틈타 피해자들을 몰래 해치려 했던 이들이 있었지요. 부단장께서 그때 단숨에 그자들을 때려잡고 법정 바닥에 던져 놓던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아……. 네. 그런 때가 있었죠. 설마 그날 저를 보신 줄은 몰랐네요.”
에버가 귀 끝을 붉히며 말끝을 조금 흐렸다. 유더는 그녀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새벽 훈련 도중 했던 때를 떠올렸다.
“제가 보았던 그때 그분과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게 되어 정말 좋군요. 혹시 전하께서 저에 대해 알려 주실 때, 제 희망 사항이 무엇인지도 말씀해 주셨습니까?”
“아뇨…….”
“전 이번 일이 끝나면 마병단에 입단하는 것이 꿈입니다. 동생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 외에 처음으로 생긴 꿈이죠. 언젠가 부단장님과 같은 곳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에버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공작가의 후계자에 가장 가까운 1공자가 그런 말을 하니 당혹스러울 만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후 수줍고도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되시길 바랄게요. 공자께서 변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면 아쉽게도 제가 맡은 신과가 아니라 스티버의 술과로 가시겠지만요.”
유더는 그 순간 그토록 똑똑하게 굴던 프루엘레 반 타인의 얼굴 위로 미약한 충격과 좌절이 번개처럼 스치는 광경을 보았다.
“……과에 따라 차이가 큰가요?”
“어, 그건…….”
“프루엘레 공자님. 잠시 물어볼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반응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에버를 대신하여 유더는 잠시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으응. 괜찮고말고……. 뭐지?”
“제가 잠시 다녀온 감옥에서 지하 4층과 관련된 무언가를 찾은 듯한데, 혹 아시는 바가 있으실지 궁금해서 여쭙고 싶었습니다.”
“지하 4층?”
프루엘레가 비로소 충격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유더가 지하 3층에서 발견한 타인 가의 문장이 새겨진 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신중한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벽이라……. 위치까지 그랬다면, 정말로 지하 4층이 있을 확률이 높을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그게 존재한다는 건 확실한 겁니까?”
“내가 전하께 드린 책에 의하면 설계할 때에는 확실히 있었던 모양이야.”
프루엘레가 답하며 기억을 떠올리는 눈빛을 지었다.
“초대 타인 공작께서는 타이누를 영지로 삼은 뒤 제일 처음 그곳을 만드셨다고 하지. 그리고 정무 도중에도 그곳에서 연구를 자주 했다는 말이 있어.”
연구라는 말에 유더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프루엘레는 이내 말을 덧붙였다.
“그분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법사셨거든. 무려 대마법사 루마의 제자셨지. 마법사로서는 활동을 하지 않으셨기에 대부분은 그저 가문 내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이지만… 대마법사 루마께서도 그분을 만나기 위해 타이누에 자주 방문하셨었다는 기록이 있어.”
초대 타인 공작이 마법사였던 줄은 몰랐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알고 있던 말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루마가 거둔 제자 중 가장 재능이 없었다지만, 연구하는 능력만은 인정받았다네. 무엇을 연구했는지는 이제 와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 감옥이 그토록 큰 이유는 연구 용도를 겸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