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아일 경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니라곤 하지만 피로해 보이더군. 내가 있으면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아서 눕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왔어.”
키시아르는 숙소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단 주커만의 질문에 답하며 거침없이 앞서 나갔다. 습관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고는 있으나 눈빛이 평소보다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나단은 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펠레타에서 온 이들은 타이누로 들어왔나? 현재 어디 있지?”
“언제든 부르시는 대로 올 수 있도록 저택 근처에 대기 중입니다만, 슈덴 님이 되도록 빨리 뵙기를 원하시더군요.”
“시간이 귀한 건 그쪽뿐만이 아니지. 오늘은 어려울 것 같으니 내일 오라고 전해. 타이누의 현 상황은?”
“성문이 다시 열리고 광장의 출입 통제를 풀고 나서 현재까지는 평소와 같습니다. 타이누 기사단과 병사들의 태도는 별로 협조적이지 않습니다만, 그 부분은 마병단 선에서 잘 처리하는 것 같아 저희가 나서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나그란의 별이 머물던 장소에서는 아직 다른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나.”
“예.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그 대삼림 내에 1년 넘게 마을을 숨겨 둔 이들이니 추적이 어려운 건 당연해. 어차피 어디에 나타날지는 이미 예상 답안이 있으니 상관 없어.”
다만 칸나 완드의 부재가 조금 아쉽군. 중얼거린 키시아르는 이내 깔끔하게 미련을 접었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가지 일들을 나단 주커만에게 묻거나 혹은 짤막하게 지시를 내렸고, 그러는 사이 금세 별저 바깥이 눈앞에 다가왔다.
문득 키시아르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나단의 조심스러운 부름에도 그는 대답 없이 그저 어딘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경계했겠지만, 지금의 나단 주커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재차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뒤에 선 채 주군이 상념에서 빠져나오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대삼림에서 예정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온 뒤부터 키시아르는 조금 변했다. 그는 빠르게 일을 처리하다가도 때때로 지금처럼 멈추어 선 채 깊은 생각에 잠기고는 했다.
오랫동안 밑바닥에서 살아오느라 기민해진 감각은 세상의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만한 힘을 움켜쥐게 된 지금도 나단 주커만에게 때때로 많은 것을 알려주고는 했다.
그 감에 의하면 키시아르가 그리 갑작스레 깊이 생각에 잠길 때는 대부분 유더 아일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 사내를 향한 주군의 태도는 대삼림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어떤 선을 넘어섰다. 타이누로 온 뒤의 행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장난스럽고도 치밀한 행동에 가려 대부분의 이들이 지나치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단은 더욱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그럼에도 그가 나서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히 제가 나설 수준을 넘었다는 판단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더 아일이 몬스터를 홀로 쓰러트린 뒤 어떤 부상을 입었는지, 그리고 그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주군이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나섰는지를 모두 알았기 때문이었다.
주군이 마병단의 신입 보좌를 상대로 얼마나 맹목적이고도 낯선 태도를 드러냈는지 알게 된 펠레타 기사들도 놀라기는 했지만, 나단 주커만의 놀라움은 조금 각별했다. 그는 이후부터 유더 아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다소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언제나 명확한 기준을 두고 행동하는 그로서는 요즘만큼 어려운 때가 없었다.
“나단.”
드디어 키시아르가 부관의 이름을 불렀다.
“네.”
“너는 혹 내게 치하를 받았을 때 오히려 싫었던 적이 있었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단은 드물게 당혹했으나, 이내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그래. 보통은 그렇겠지……. 그렇다면 어떤 기준인 걸까.”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으나 소드마스터의 귀까지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기준’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단 주커만이 주군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침묵하는 사이 키시아르는 작게 숨을 내쉬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금 그건 네게 물으려 한 말은 아니었다. 지금 한 말은 잊어줘.”
“…알겠습니다.”
나단 주커만은 잠자코 키시아르의 뒤를 다시 따랐다. 그러나 충직한 기사의 안에서 유더 아일의 존재는 조금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에는 프루엘레와 에버, 나단 주커만이 찾아와 함께 했다. 각각 만난 적은 있어도 다함께 본 건 처음이었기에 분위기가 다소 어색했지만, 이 자리를 마련한 키시아르는 그저 태연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야 하니 같은 편이 될 사람들끼리는 누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네. 어젯밤 보낸 식사 초대에 이리 빠르게들 응해 주어 고맙군.”
“아닙니다.”
작은 고양이를 곁에 놓은 의자에 따로 앉힌 프루엘레가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일 경. 몸은 좀 어때. 어제는 충분히 쉬었고?”
“예. 덕분에.”
키시아르의 우측에 앉아 있던 유더가 조용히 대답하자 그의 곁에 있던 에버가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린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타인 공자님과 관련된 말씀은 유더의 조사를 도와주러 오실 때 단장님께 조금 들었지만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각성자이셨을 줄은 몰랐어요.”
“벌써 놀라시면 이릅니다. 여기 있는 이 녀석도 그런걸요.”
공작가의 공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편안한 말투로 고양이를 가리켜 보인 프루엘레가 미소를 짓자 에버의 눈 위로 의문이 어렸다.
“예? 그냥 키우시는 고양이가… 아니었습니까?”
여러 사람이 들어와 있음에도 크게 긴장하지 않고 얌전히 자리를 지키던 고양이가 그 말에 대답하듯 작게 울었다.
“그 귀여운 고양이는 프루엘레 공자의 막내동생인 니폴렌 반 타인 공자라네. 보다시피 고양이로 변신하는 능력을 지닌 각성자지.”
고양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귀여워서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에버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본래는 사람을 무서워하지만 같은 각성자를 상대로는 크게 겁을 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우리가 맡아 주기로 했네. 프루엘레 공자는 곧 수도로 돌아갈 예정이거든.”
“네?”
“전하와 아일 경은 니폴렌이 사람이라는 걸 아시지만, 그래도 이외에 좀 더 믿고 맡길 수 있는 분들이 계셨으면 하여 이전에 부탁을 드렸죠. 이번에 시험해 보니 마병단 분들이 다수 있는 자리에서도 니폴렌이 얌전하기에 괜찮을 것 같더군요.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다 여겼는데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프루엘레가 고양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유더는 자신이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되돌아왔을 때 고양이와 함께 나와 있던 프루엘레를 떠올리며 그가 했을 ‘시험’이 언제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버는 몇 번이나 ‘예?’하는 말을 반복하기는 했으나 프루엘레와 키시아르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겨우 니폴렌의 정체를 납득한 듯했다. 나단 주커만은 자신만이 고양이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된 이유를 알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 여긴 듯,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러면 오늘 이 자리에서, 다함께 앞으로 있을 작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 두겠네.”
화제를 넘긴 키시아르가 프루엘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프루엘레 공자가 오늘 아침 제법 흥미로운 소식을 하나 가져왔거든.”
“아, 네.”
고개를 든 프루엘레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곧 경매가 열릴 소식이라는 건 이미 알고 계실 줄로 압니다만, 같은 시기에 빌름 남작이 자선 파티를 열 예정이라고 어젯밤 전달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