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오만하며 날카롭기 그지없는 타인 공작의 목소리에도 남국인 사내는 조금도 겁을 먹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펠레타 공작의 영악함에 화가 나시겠으나, 상황을 넓게 보십시오. 어차피 쉽지 않은 사업이 되리라 예측하고 시작하신 일이 아니셨습니까? 황제의 시선이 전하가 아니라 쥐새끼들에게 쏠렸다면 이건 오히려 대단한 행운이라 할 만한 일입니다.”
“그야 황제 측의 시선을 피하는 게 이번 사업의 가장 큰 난관이리라 예상하기는 했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타인 공작은 불쾌한 기색으로 손에 쥔 말을 손톱 끝으로 긁어내렸다.
“전하. 기회는 위기와 함께 오는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병단이 그 끈질긴 쥐새끼들을 잡든, 못 잡든 이목을 최대한 그자들에게 쏠리도록 한 뒤 전하께서는 바라시는 바를 취하시면 그만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신기루와도 같은 명예라는 그림자 위에서 춤출 때,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뒤에서 웃으실 것입니다.”
말을 끝낸 남국인 사내가 입을 다물고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타인 공작은 눈을 굴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분노가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는 아니었으나, 남국인 사내의 말을 곱씹으면 씹을수록 그 길이 옳게 여겨졌다.
“그래… 맞는 말이군.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말지는 내 손에 달린 것이지. 괜스레 아까운 돈과 사람을 들여 쓸데없는 곳에 힘을 더 쓸 필요는 없을 터.”
“제 조언을 냉정히 받아들여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조차 제대로 못 하면서 욕심만 내는 이들보다 아톤, 네 말을 듣는 편이 훨씬 낫지.”
타인 공작의 머릿속에서 며칠 내내 기사들을 더 보내 달라는 둥, 돈이 없으면 일을 제대로 추진하기 어렵다는 둥 하는 괘씸한 소리를 해대던 빌름 남작의 목소리가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제 말을 제대로 듣는 척도 하지 않던 사촌 테오라도 같은 녀석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던 놈이었는데, 요즘의 일처리는 무엇 하나 만족스러운 면이 없었다.
타이누에 있는 인력들을 모두 쓸 수 있음에도 여태까지 시킨 일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한 놈에게 지원을 더 해 주어 봤자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누가 확신하겠는가. 사실은 재정이 대부분 묶여 있어 지원을 해 줄 상황도 아니었지만, 타인 공작은 그 부분을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남국인 사내의 말을 듣기로 결정하자 마음이 몹시 편안해졌다. 타인 공작은 여유를 되찾고 의자에 한결 편안히 몸을 기대었다.
“그러면 빌름에게는 이번 일을 마병단에게 맡기고, 그 사이에 물건들을 옮기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일러야겠군.”
“방법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작년처럼 경매와 자선 파티를 이용할 생각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때를 맞추어 네 상단의 사람들을 타이누로 보내도록.”
“이번에도 저희에게 맡겨 주시는 것입니까?”
“네가 아니면 이런 일을 누굴 믿고 맡기겠는가.”
타인 공작의 대답을 들은 남국인 사내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남쪽에서 온 미천한 상인일 뿐인 제게 보내주시는 신뢰와 은혜에 늘 감읍합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다소 불쾌하실 수 있으실 이야기입니다만… 말씀드려도 괜찮을지요?”
타인 공작은 짜증스레 주사위를 문지르다 말해 보라고 답했다. 얼굴을 가린 남국인 사내의 베일 너머로 속내를 읽기 힘든 검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그간 전하께 심려를 끼칠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실은 작년보다 저희를 못마땅하게 보는 가문 내부의 반발이 훨씬 거세진 상태입니다.”
“뭐? 그 문제는 이미 지난번에 끝난 게 아니었던가.”
“겉으로는 전하의 명을 듣는 것 같아도 저희를 감시하는 시선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때문에 이번에도 저희가 타이누로 간다면 쓸데없는 꼬리를 달고 가게 될 위험이 높습니다.”
타인 공작이 화를 내며 또다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대체 가문의 주인이 누구인지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놈이 하나 없어!”
“전하께서 허락하여 주신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을 기하여 저희와 연이 있는 이들에게 연락을 취하고자 합니다. 전하께서도 이전에 남부에서 본 적이 있으실 자들입니다만…….”
남국인 사내가 말한 이들의 이름을 들은 타인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기억이 나는 것도 같군. 남국 출신 용병이라던 이들이었던가?”
“예.”
“좋다. 그건 마음대로 해.”
“그들을 보내려면 사전 준비와 비용이 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은…….”
“그것도 이전처럼 처리하고, 일일이 귀찮게 하지 마.”
타인 공작의 심드렁한 대꾸에 남국인 사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 그런데 혹 1공자께서는 아직도 타이누에 계십니까?”
“온다는 말이 없었으니 그렇겠지.”
대답하는 공작의 얼굴에서 자식을 향한 관심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이제 좀 나가서 다시 게임을 할 마음이 생기는군. 아톤, 네가 있어야 재미있으니 열 판만 함께 하고 돌아가.”
그들이 앉아 있던 곳은 제국 수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고급 도박장의 숨겨진 휴게실이었다. 타인 공작은 다른 곳에서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때 주로 이곳을 방문하고는 했다.
남국인 사내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휴게실의 비밀 문을 열고 나가는 타인 공작의 뒤를 따르며 웃음을 지우고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도박에 열중한 귀족들의 웃음소리와 야릇한 약향, 몽롱히 반짝이는 불빛 속에 묻힌 찰나의 변화를 알아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톤! 빨리 이쪽으로 오거라. 판돈을 얼마 정도 깔아둘지 조언해 다오.”
남국인 사내가 조금이라도 늦을까 조바심이 난 타인 공작이 멀리서 크게 소리를 쳤다. 사내는 서늘함을 지우고 이내 이전과 같은 사람 좋은 눈웃음을 띤 채 걸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근처에서 유난히 오래 청소를 하고 있던 건장한 하인 한 명도 쓰레기를 대충 밀어 버리고 뒷문으로 슬쩍 빠져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도박장 내부의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주방이었다. 노련하게 디저트용 빵을 꾸미고 있던 중년의 요리사가 데브란을 보고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빠져나왔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계단 밑으로 들어갔다.
“벌써 다 살피고 온 거냐, 데브란? 너무 빠른데.”
“남국인이 ‘귀빈’과 함께 휴게실에서 같이 나오는 것까지 확인했어요. 지금은 도박 중이라 한참 동안은 아무 변화도 없을 거라고요, 스티버.”
요리사 옷을 입은 마병단 술과 부단장, 스티버 렌들리가 짧게 혀를 찼다.
“그래도 단장님께서 수도에 있는 우릴 믿고 맡기신 임무인데 더 확실하게 확인해야지.”
“이 이상 뭘 어떻게 더 확실하게 확인합니까. 고작 하인으로 들어간 주제에 높으신 분들 주변에 얼쩡대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요. 그렇게 걱정되면 스티버가 제 역할을 대신 했어야죠.”
“내가 도박장에서 뽑는 보안용 각성자 하인 나이대를 이미 옛적에 넘겨 버린 것을 어쩌겠어?”
며칠 전, 키시아르는 마병단을 지키고 있는 스티버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냈다. 그 안에는 수도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느 고급 도박장의 위치와 함께 데브란 하르투데와 스티버 렌들리가 해 주어야 할 일들이 담겨 있었다.
- 동봉한 가짜 신분으로 도박장에 위장 취직을 한 뒤, 그곳의 귀빈인 타인 공작과 그의 주변에 있을 남국인을 찾아내어 탐색할 것.
왜 타인 공작이 아니라 그 주변의 남국인까지 탐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대삼림을 거쳐 현재 서부에 있는 키시아르가 서부의 지배자인 타인 가와 관련된 무언가를 알아내고 싶은 모양이라 몰래 짐작했을 뿐이었다.
아페토 공작가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만천하에 드러낸 단장이라면, 다음 목표로 타인 공작가를 두고 있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법했다. 단둘이서 타인 공작과 주변을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오금이 조금 저렸지만 중요한 건 키시아르가 그들 두 사람을 지목하여 임무를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단장에게 능력을 확실히 인정받았다는 생각만으로도 두 사람은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귀족들이 주로 방문하는 고급 도박장은 보안과 인건비 절감을 위하여 몸값이 싼 평민 각성자들을 자주 채용했다. 건장하고 젊은 데브란은 어렵지 않게 채용에 성공했지만 스티버는 나이가 많아 하는 수 없이 요리사로 들어가야 했다.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으나 도박장에 온 타인 공작의 주변을 살피는 건 실질적으로 거의 데브란에게 맡겨야 했기에 스티버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튼 오늘 귀빈과 온 남국인 말인데요, 이전에 함께 온 다른 사람들과는 귀빈의 태도도 다르고 뭔가 느낌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뭐가 어땠기에?”
“일단 함께 휴게실에 있는 시간도 가장 길었고…… 무엇보다 귀빈이 그자를 굉장히 믿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래? 어떤 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