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70화 (370/805)

370화

왜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옥에서 준 빵을 정확히 7개 반 먹어치우며 병사들과 로벨의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떨떠름한 표정을 마주한 지 아직 한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스튜 그릇을 2번 비웠으니 평소보다야 적어도 부족하게 먹은 편은 아니었다. 참고로 8번째 빵을 다 먹지 못한 건 중간에 제이머 필 기사단장이 찾아와 석방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곳에서 먹은 빵이 지금 식탁에 차려 둔 빵처럼 부드럽거나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돌이 들거나 썩지도 않았고 물도 깨끗했다. 과거의 경험상 옥에서 주는 음식이 그 정도면 상당한 귀빈 대접이었다.

그래도 이논이 루산만큼이나 그를 걱정하는 건 확연해 보였기에 유더는 묵묵히 차려진 음식들을 더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겨우 말뿐인 진료 대신 제대로 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유더 님. 어제 치안 관리단으로 가시기 전 저택 내에서 사람을 쫓느라 능력을 많이 사용하셨다고 들었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예.”

“왼쪽 눈의 얼룩은 아직 그대로네요. 손등도 그런가요?”

유더는 잠자코 장갑을 벗었다. 드러난 손등에는 아직 희미하게 검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로 불긋하게 드러난 붉은 반점을 이논과 루산이 신중히 들여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검은 얼룩은 좀 줄어든 것 같은데요.”

“하지만 반점 범위는 그대로잖아. 이건 오히려 늘어난 것 아냐?”

이논의 날카로운 눈빛이 유더에게로 향했다.

“몸이 괜찮기는 무슨. 내가 웬만하면 힘을 쓰지 말라고 말했는데 대체 얼마나 써댄 거야?”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논 님. 고생하시고 돌아오신 분이시잖아요.”

루산이 선량하게도 이논을 말리며 유더의 손에 신성력을 부어 주기 시작했다. 흰빛이 손을 뒤덮자 팔부터 몸 안쪽까지 뜨거운 물을 부은 듯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유더는 그 틈을 타 루산에게 기억을 잃은 자들에 대해 물었다.

“루산 사제님께서 돌보는 분들은 좀 어떠십니까.”

“그분들이야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지내셨지요. 어제 단장님께서 물어보신 사항 때문에 그러시나요?”

루산은 눈치 빠르게도 유더가 왜 그들에 대해 묻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맞습니다.”

“유더 님이 잡은 하인 분의 인상착의와 이름을 알려 주니 마티 씨가 크게 놀라시더군요. 설마 그쪽 분이 여기에 잠입해 있을 줄은 저도 생각지 못했는데……. 그분은 어떻게 되셨죠?”

“마티 씨가 말했던 연인이 바로 그 사람이더군요. 덕분에 마티 씨의 생존 소식을 알리자마자 빠르게 협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더는 로벨이 겪은 일들과 그가 혼자서 무모한 잠입을 하게 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루산은 나한과 그를 따르는 이들 때문에 비극적으로 어긋나고 만 연인의 사정에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일단 로벨은 아까 저와 함께 석방되어 이곳으로 데려온 상태입니다. 그는 마티 씨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만… 사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벨은 마티를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지만, 이 건에는 마티의 의사도 중요했다. 한쪽이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마주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억 잃은 이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아 온 루산의 판단이 가장 정확하리라 생각하여 묻자 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억을 되찾은 분들 중에서도 마티 씨의 상태가 가장 좋기는 하지만… 당장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제가 사정을 먼저 알리고 의사를 들은 뒤 말씀을 전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해 준다면야 유더 쪽에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면 저는 말이 나온 김에 그분을 만나러 먼저 가 봐야겠군요. 일단 신성력 처치는 끝났으니, 나머지는 이논 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그래.”

이논이 어서 가라는 듯 손을 대충 흔들었다. 루산이 방 밖으로 나가고 나자 유더는 제 뺨을 찌르는 이논의 시선이 이전보다 조금 더 따끔따끔하게 변했음을 느꼈다.

“…자, 이제 솔직하게 말해 보시지. 힘, 얼마나 썼어?”

“매일 아침 힘이 얼마나 돌아왔는지 확인하려고 살짝 쓴 것 외에는… 어제 로벨을 잡을 때와 치안 관리단 안에서 조금 사용한 것밖에 없어.”

“치안 관리단 안에서는 왜 썼는데?”

“옥을 잠깐 빠져나가서 밖을 좀 살피느라.”

“아 그래……라고 할 줄 알았냐. 그게 조금이야? 어?”

약사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서슬 퍼런 목소리와 함께 다가온 손이 뺨을 꼬집어 흔들었다. 피부 안쪽이 얼얼했지만 유더는 묵묵히 얼굴을 내주었다. 반항하지 않는 상대 때문에 의욕을 잃은 이논은 앓느니 죽는다는 얼굴로 도로 앉았다.

“몸은 진짜 괜찮았던 거야? 너 그때 내가 준 약을 먹고 갑자기 열…이 나네 마네 했었잖아.”

차마 직접적으로 성욕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없었던 탓에 중간에 잠시 말끝이 흐려졌지만 유더는 개의치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때 이후로 그런 일은 없었어. 힘도 좀 더 회복되었고. 다만… 힘을 쓸 때 왠지 뭔가에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기는 해.”

“막히는 느낌?”

“낼 수 있는 힘이 더 있는데도 훨씬 조금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야. 갑갑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미친놈. 그 말을 제일 먼저 했어야지!”

이논이 한 번 더 유더의 반대쪽 뺨을 잡아당겼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현상일 줄 알았어. 아니라는 걸 나도 어제 확신했다고.”

뺨이 당겨지고 있는 탓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어쨌든 뜻을 알아듣기는 했는지 곧 손이 떨어졌다.

“낼 수 있는 힘이 더 있는데 뭔가에 막힌 것처럼 적게 나오는 느낌이라……. 어쩌면 그리 나쁜 징조는 아닐 수도 있겠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이논이 내린 결론은 예상과 달리 긍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기력을 회복시키는 약이 어쨌든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는 뜻이잖아. 네가 가진 본래의 힘이 돌아오고는 있지만, 이질적인 힘들을 아직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탓에 힘을 내보내는 통로가 막힌 거겠지. 음, 통로가 뭔지는 알아?”

“알아.”

기사, 마법사, 각성자 등의 힘을 지닌 이들이 그것을 외부에 발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고인 힘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비유할 때 주로 ‘통로’라는 말을 사용했다. 본래는 소드마스터들이 사용하던 말이었다지만 현재는 마법사들도 썼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각성자들 또한 당연히 쓰게 될 말이었다.

“본래 가진 힘이 적었다면 그리 불편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네놈이 힘 하나는 엄청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말하자면 괴물 같은 적응력으로 본래의 힘을 되찾고 있으면서 몬스터의 독성에다 마력까지 같이 부대끼고 있는 탓에 소화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셈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네 안의 회복하고자 하는 힘이 일단 제대로 작동 중이라면… 슬슬 다른 방법을 한번 더 써 보는 것도 좋을지 모르지.”

“방법이 있어?”

“얼씨구. 방법이라는 말에 눈빛 바뀌는 것 좀 봐라. 그렇게 낫고 싶었으면서 왜 약사 말은 안 들어?”

혀를 찬 이논이 턱을 괴며 짧게 웃었다.

“그동안 내가 그 석상 같은 기사 양반 방에서 조그만 몬스터를 살피며 생각해 본 바가 조금 있지. 그 몬스터가 마력을 삼켜서 소화하는 힘은 아무래도 체액을 대신하는 독 성분에 있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지금의 네 상태를 토대로 가정한 내 생각이 들어맞는다면…… 어쩌면 너도 그걸 쓸 수 있을지 몰라.”

“…….”

그게 무슨 뜻일까. 알 듯 말 듯한 느낌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유더의 얼굴을 보며 이논이 고개를 기울였다.

“미친 소리 같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침착한데. 여기서 더 들어 볼 생각 있어?”

답은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

“젠장……. 때아닌 몬스터가 갑자기 서부 주변을 어지럽힐 때부터 내 느낌이 좋지 않다 싶었어.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길 수가 있나!”

타인 공작이 내리친 탁자 위의 값비싼 식기들이 흔들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천한 것들이 감히 타이누에서 주제도 모르고 날뛰더니, 나 몰라라 하던 펠레타 공작 놈이 이제야 나서서 공을 가로채려 해? 무능한 빌름 놈이 겁을 먹고 성문까지 닫아 버리는 바람에 황제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진정하십시오.”

타인 공작의 앞에 앉아 있던 사내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눈을 제외한 전신을 긴 천으로 만든 옷과 베일로 감쌌으나 그가 남국인 특유의 붉은 피부색을 지녔다는 사실은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고작 그 정도 일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진행 중이신 일들은 아직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빌름 놈이 거기에서 그토록 멍청하게 구는데, 그것도 얼마나 가겠나! 내가 하루라도 빨리 물건들을 옮기라고 그토록 말했는데…….”

타인 공작이 머리를 짚으며 이를 악물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떨리는 손안에는 방금 전까지 큰 판돈을 걸고 진행 중이었던 주사위 게임의 말이 쥐여진 상태였다.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이 가세한 지금이 오히려 전하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회? 무슨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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