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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69화 (369/805)

369화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공격을 주고받느라 단원들 중 몇몇은 약간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나, 키시아르는 옷깃 하나 상하지 않았다. 단원들은 지붕이 보일 정도로 파괴된 벽이 검으로 벤 듯 아주 깔끔하게 무너진 모습을 보며 숨을 삼켰다. 그것이 키시아르가 한 일이라는 건 누가 봐도 명확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 있을 뿐임에도 평소의 그와는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저 웃음을 거두고 푸른 검기를 두른 검을 들고 있을 뿐임에도 누구 하나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침묵 속에서 무너진 틈으로 드러난 밤하늘을 무심히 바라본 키시아르가 잠시 후 검에 두른 기운을 거두고 도로 검집에 넣었다. 그제야 그의 주변에 감돌던 서늘함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모두 무사한가?”

“네!”

키시아르의 서늘한 시선이 바닥에 흩뿌려진 피로 향했다가는, 제 손 쪽으로 내려갔다. 글레힘 빌름 이외에도 분명히 한 명 더 붙잡은 감각이 있었는데 연기가 사라지고 난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키시아르는 제 보좌가 아페토 공작가의 본저에서 만났다고 말했던 나그란의 별 소속 공간이동 능력자를 떠올렸다. 남국인 청년이라 들었던 그자가 이곳에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보좌를 감옥에 들어가게 만든 대가를 돌려주는 건 다음으로 미루어야겠군.”

혹시나 하여 단원들이 바깥을 내다보았으나 도망친 이들의 흔적은 당연히도 보이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축 늘어진 글레힘 빌름을 단원들에게 넘긴 뒤 주변을 수습하라 지시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수색을 끝낸 에버와 다른 단원들이 합류했고 나단 주커만이 기사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운 좋게 숨어 있다가 생존한 하인 두 명을 제외하고, 저택에 머물고 있던 모든 이들이 에르시의 손에 죽거나 크게 다쳤다. 빌름 남작의 집에서 눈을 뜬 글레힘 빌름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남작은 제 동생 중 하나를 죽이고 하나는 그 꼴로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굳이 저택 내의 모든 이들을 죽이려 들지 않았다면 아마 글레힘을 구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지독한 복수심이 발목을 잡았기에, 마병단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키시아르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 유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산라라는 이름을 들으셨다면 그 공간이동 각성자가 거기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로벨도 그에 대해 아는지 물어봐야겠군요.”

“그자에게 묻고 싶은 건 내 쪽도 제법 있어. 다만 일단 오늘은 쉬고 나서 그렇게 하게.”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내리자마자 로벨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던 유더는 우선 알겠다고 답했다.

“글레힘 빌름에게 그들이 뭔가 말한 건 없었다고 합니까?”

“내가 올 때까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서 말이야. 돌아가면 곧 알게 될 거라네. 빌름 남작이 오늘 아침 정식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거든.”

물론 그는 타이누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잡게 도와달라는 요청만을 했을 뿐, 비밀 무역과 관련한 정보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추운 곳에 홀로 있을 내 보좌를 데려오고 나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겠다고 했으니, 지금쯤 나를 몹시 기다리고 있겠군.”

그렇게 말하며 웃는 키시아르의 얼굴에서 피곤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빌름 남작의 저택 앞에는 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유더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단원들, 이논과 루산, 나단 주커만과 펠레타 기사단, 그리고 고양이를 품에 안은 프루엘레. 우습게도 그 사이에서 집주인인 빌름 남작이 가장 이질적이었다.

몹시 불편한 얼굴로 버티고 있던 빌름 남작은 유더가 내리기가 무섭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일 경이 준 정보 덕분에 나의 동생 글레힘이 무도한 자들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들었네. 어제 있었던 작은 오해로 인해 조사 도중 고생이 많았다는 소식도.”

“예.”

“예의를 갖추어 조사하라 일렀음에도 내 말을 듣지 않은 필 기사단장과 아래 기사들에게는 직접 한마디 할 예정이니 부디 마음을 풀게. 그리고 경의 능력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도 꼭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군.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그의 모습이 역겨웠는지, 뒤쪽에 서 있던 핀 엘더가 몰래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이전 생에서 빌름 남작 같은 자들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기에, 유더는 그저 담담히 반응했다.

“그러면 전하,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남작이 사라진 뒤, 고양이를 안은 프루엘레가 다가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돌아온 걸 축하해. 아일 경. 몸은 좀 어때?”

“덕분에 멀쩡합니다.”

“내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야. 펠레타 공작 전하께 당신을 맞이하러 나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니 관대하게도 허락해 주시더군.”

프루엘레는 여태까지 고양이를 찾아 준 키시아르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을 뿐이라는 태도를 공식적으로 고수하고 있었다. 그가 각성자라는 사실이나, 데려온 고양이의 정체 등은 아직까지 키시아르와 유더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러나 오늘부로 마병단이 본격적으로 빌름 남작과 타인 가를 돕는 형태로 상황이 발전했으니, 키시아르는 프루엘레와의 친분을 좀 더 드러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타인 1공자가 어제 유더를 위하여 몸소 치안 관리단에 갔었다는 사실을 아는 단원들은 빌름 남작을 대할 때와 달리 프루엘레에게 크게 경계를 보이지 않았다.

유더에게 제각기 한마디씩 고생했다는 말을 던지는 단원들의 눈빛 속에는 단순한 걱정과 위로 외에 생경한 감정들도 다소 깃들어 있었다. 유더는 등을 두드리고 손을 뻗어 주먹을 부딪치러 오는 이들 속에 갇혀 한참 휘말리고 나서야 겨우 키시아르와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어제까지는 없었던 마석 난로가 벽난로 앞에서 따뜻한 온기와 빛을 뿌리며 타오르는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자, 키시아르가 장난스레 물었다.

“돌아온 소감이 어떤가.”

“……고작 하룻밤만입니다만.”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웃었다.

“10년 같은 하룻밤이었지.”

“단장님께서는 바로 남작을 만나러 가실 예정이십니까?”

“보좌가 옷을 갈아입고 눕는 모습까지 본 다음에 그럴 생각이야.”

유더는 아직도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예복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혹시 옥에 있는 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 테고.”

“……그 비슷하기는 합니다.”

유더의 말에 키시아르의 눈썹이 위로 슬쩍 올라갔다.

“어제 갇혀 있는 동안 어디선가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병사들은 바람이 새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만, 저는 다소 이상하다 생각하여 잠시 나가서 살펴보았습니다.”

“……나갔었다고?”

“물론 들키지는 않았습니다.”

담담히 대답한 유더를 한참 바라보던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그래서 뭘 발견했나.”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판단된 장소에서 벽에 새겨진 타인 가의 문장을 발견하여 기억해 두었습니다만, 프루엘레 공자께서 주신 책과 비교하여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유더는 제가 본 문장의 위치와 상태, 그리고 계단의 구조까지 상세히 설명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들은 키시아르가 모두 끝난 뒤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감옥에서도 제대로 쉬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 온갖 일을 알차게도 하고 돌아왔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이 뭐가 있겠나. 그래서, 몸 상태는?”

멋대로 움직인 사실 때문에 혼이 난다면 감수할 생각이었으나 키시아르에게서 화가 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더가 건강 상태는 별문제가 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잠자코 갈아입을 옷이 놓인 곳을 가리키며 쉬라고 명했다.

“치안 관리단이 이제 우리의 새로운 일터가 되기도 했으니, 그 부분은 곧 확인해 보도록 하지. 일단 씻고 나서 식사부터 하게. 내가 나가 있는 동안 루산 사제와 이논에게 오라고 명해 두었으니 진료도 받고.”

“그러실 필요까지는…….”

말을 잇던 유더는 키시아르의 해사한 미소를 보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은 대답이야.”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은 사내가 손을 뻗어 유더의 눈가를 쓸었다. 어젯밤과는 달리 오늘은 그의 손 쪽이 조금 더 차게 느껴졌다. 평소와 다름없이 체온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제야 정말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유더 님. 하룻밤 사이에 살이 내린 것 같아요. 아무리 조사를 위해 갔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리 매정하게 옥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하는지……. 이곳 사람들은 정말 인정도 없네요.”

“밥을 왜 그것밖에 안 먹어? 평소에는 그것보다 더 먹잖아.”

유더는 키시아르가 예고한 대로 식사를 하며 루산과 이논 사이에 끼어서 진료라는 이름의 잔소리를 받았다.

“옥에서 이미 빵을 먹고 왔어.”

“빵밖에 안 줬어?”

“물도 줬어.”

“…네가 어떤 녀석인지 몰랐으면 지금 말장난하나 싶어 한 대 때렸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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