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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68화 (368/805)

368화

“납치당할 뻔한 글레힘 빌름을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조금만 늦었더라도 아마 눈앞에서 빼앗겼겠지.”

마차가 달리며 내는 작은 소음 속에서 키시아르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야.”

어젯밤, 유더를 만난 직후 키시아르는 나단 주커만과 함께 곧장 글레힘 빌름의 집을 향해 움직였다. 현장 근처에는 이미 나단이 보낸 연락을 받고 주변에서 대기 도중 모여든 펠레타 기사단과 마병단 여러 명이 응집한 상태였다. 키시아르는 그 속에서 부단장 에버 벡의 얼굴을 찾아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많은 이들이 모여 주었군. 더 기다릴 시간이 없으니 현 인원으로 출발한다.”

나그란의 별이 글레힘 빌름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들은 마병단원들과 기사들의 얼굴 위로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키시아르는 나단 주커만에게 기사들을 데리고 글레힘 빌름의 저택 주변을 포위한 채 몸을 숨기고 대기하라 지시한 뒤, 마병단만을 데리고 몸소 나섰다. 임무를 해 본 경험은 기사단이 더 많았으나 이번 일은 마병단의 힘만으로 해결해야만 의미가 생긴다. 그 사실을 완전히 짐작하지 못했을 단원들은 각성자를 상대로 싸우러 가는 것이기에 자신들만 데리고 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글레힘 빌름의 고풍스러운 대저택은 밤이 깊었음을 감안해도 몹시 조용했다. 횃불을 든 채 앞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서로 잡담 한마디 나누지 않고 앞만 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인형처럼 음산했다.

“에문 필랑. 저택 안의 상황은 어때 보이지?”

어둠 속에서 다른 이들보다 눈이 밝은 에문을 지정하여 묻자 잠시 후 대답이 들려왔다.

“뭔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아직 불이 켜져 있는데도 내부 복도를 지나는 이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정원에 있는 개들도 여섯 마리 모두 잠들어 있습니다.”

“더 볼 필요도 없겠군.”

그가 당당히 앞문을 향해 나아갔음에도 글레힘의 집을 지키는 병사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키시아르가 손을 뻗어 힘을 발함과 동시에 그들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피를 흘리지는 않았으나 이미 송장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인원을 둘로 나누어 앞문과 뒷문으로 동시 진입한다. 뒷문으로 들어갈 이들은 에버 벡이 지휘하도록.”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가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키시아르 또한 검을 뽑아 들자 단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단장이 훈련에 참여하는 모습은 종종 보았었지만 그가 제대로 된 검을 들고 있는 건 처음 본 이들이 대다수였다.

키시아르가 서부로 떠난 직후, 케일루사 황제는 그가 신검 오르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그 소문에 대해 설명한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자신들의 단장이 진짜로 신검의 주인이든, 아니든 단원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들을 이끄는 이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드디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든든한 마음이 샘솟았다.

“뒷문으로 진입한 이들은 내부를 살펴 생존자를 구조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진행하라. 적을 만날 시에는 제압을 우선하되, 여의치 않다면 그 이상도 허용한다.”

빠르게 명을 내린 키시아르가 단원들의 얼굴을 훑었다.

“마지막으로 혹시나 싶어 묻지만, 나설 자신이 없는 이가 있다면 지금 말하도록.”

“…….”

물러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랜 훈련과 기다림을 거친 단원들의 눈동자 속에는 결의와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질문도 없나?”

“단장님. 이 일을 잘 끝낸다면, 유더도 더 빨리 돌아올 수 있겠지요?”

손을 든 에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모든 단원들이 귀를 기울였다. 키시아르는 순간 의외라는 듯 잠시 침묵했으나,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적들이 이곳을 노릴 것이라 추측한 이가 유더 아일이라는 걸 먼저 말해줄 것을 그랬군.”

답을 들은 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전부 끝내고 뵙겠습니다!”

키시아르는 절반의 단원들을 이끌고 글레힘 빌름의 집 정원을 통하여 정문으로 진입했다. 에문이 말했던 대로 본래 정원을 지켜야 할 개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거운 정문 또한 키시아르가 손을 뻗음과 동시에 힘없이 안을 향하여 열렸다.

저택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으로 기척을 감지하는 단원이 어느 방 안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안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하인들이 있었다.

“구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저택에서 본 시체와 동일한 방식으로 상처를 입었습니다. 죽은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합니다.”

살해당한 방식은 저택에서 죽은 빌름 남작의 동생 부부와 흡사했다. 최소한 이곳에 에르시 한 사람은 확실하게 와 있다는 뜻이었다. 현장에 사람을 남겨 두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적이 소수로 추정된다는 추측까지 훌륭하게 해낸 단원들을 짧게 칭찬한 뒤 키시아르는 바로 위층을 향해 올라갔다.

높은 이들은 대개 가장 위층을 침실로 썼고, 이 저택의 꼭대기 층은 3층이었다. 화려한 계단을 올라 3층에 가까워지자 어디선가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사, 살려 줘……!”

키시아르는 그 목소리가 글레힘 빌름의 것임을 확인한 뒤 단원들을 향해 눈짓을 보내며 검을 올렸다. 그가 발한 힘이 저택의 모든 문을 세차게 밀어냄과 동시에 내부의 풍경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났다.

드넓은 침실은 온통 엉망이었다. 하인과 타이누 기사들의 시체 너머로 얼굴을 가린 남녀 몇 명이 서 있었다. 글레힘 빌름은 그 사이에서 잠옷 차림으로 묶인 채 추하게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버둥대는 중이었다. 그들의 등 뒤에 활짝 열린 창문을 흘긋 본 키시아르가 이내 입술 끝을 올려 미소를 지었다.

“전하!”

“마병단이다. 뒤로 물러나.”

글레힘 빌름이 키시아르를 보고 소리치기가 무섭게 흰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그의 목에 손날을 겨누며 동료들에게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키시아르는 그녀가 나한의 곁에 있었던 에르시란 여자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어떻게 이리 빠르게…….”

“입 다물어.”

당혹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린 동료를 향해 거칠게 소리친 에르시가 글레힘 빌름의 목에 겨눈 손에서 힘을 빼지 않고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우리가 너무 빨리 와서 놀랐나 보군.”

“…….”

“그자는 놓아주지 그러나. 오줌이라도 쌀 것 같은데.”

에르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글레힘의 목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사람의 손이 닿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글레힘 빌름이 억눌린 비명을 지르고는 잠옷 사이를 적셨다. 그는 수치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끄르륵대는 소리를 내다 기절했다.

“저런. 심약하기로는 과연 형에게 뒤지지 않는군.”

키시아르는 여유로웠으나 그럴수록 에르시의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저 사내가 어떻게 나한을 공격했는지 보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격렬한 증오와 경계가 그녀의 주변을 단단히 감쌌으나 키시아르는 조금도 그에 반응하지 않았다.

“나한이란 자도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함께 오지 않았나?”

“…….”

“내게 다친 부위가 아파서 못 온 건 아닐 테고,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나 보군.”

“…….”

“붉은사슴 상단의 자문을 납치하여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면 아깝게 되었어. 시간이 조금만 늦었으면 뜻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대담함만은 인정하지.”

대답 없이도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추측해 내는 키시아르를 보는 이들의 눈빛이 놀라움과 공포로 흔들렸다. 그들은 대부분 이런 상황에 익숙한 이들이 아니었다. 전투 상황에서 상대에게 뜻을 읽히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조차 모르는, 본래는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한계였다.

키시아르는 복면 뒤에 숨겨진 그들의 얼굴을 읽기라도 하려는 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한의 이름이 나왔을 때 에르시보다 더욱 격렬한 반응을 보인 자가 하나 끼어 있었다.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피부색을 보니 남국인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남국인이라.’

“어딜 보는 거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즉시 이자를 죽이겠다.”

“글쎄. 죽이면 자네들만 손해일 텐데 그런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는 편을 추천하고 싶군.”

이해할 수 없는 것만큼 두려운 적은 없다. 기분 나쁠 정도로 태연한 상대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각성자들이 술렁임과 동시에 에르시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글레힘 빌름을 뒤로 밀쳤다.

“으아아아!”

에르시가 고함을 지르며 손을 휘두르자 검만큼이나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키시아르와 마병단을 향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그녀의 주변에 서 있던 각성자들 또한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 빠르게 움직였다. 날아든 힘은 키시아르가 손을 움직이기도 전에 앞으로 나선 단원들에 의해 막혔으나, 각성자들 중 누군가가 능력으로 뿌린 검은 연기가 폭음과 함께 터져 나오며 공격이 순식간에 시작되었다.

“호산라! 빨리!”

“바람으로 연기를 몰아내!”

기침과 고함, 싸우는 소리가 범벅이 된 아주 짧은 순간.

키시아르는 눈을 감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며 순식간에 글레힘 빌름이 쓰러졌던 자리까지 도달했다. 누군가 글레힘을 빼앗기지 않으려 처절하게 공격했으나 소용없었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눈을 의심했을 만큼 간결한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연막 속에서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던 공격이 모두 찢기고 그 너머를 넘어 상대를 베어내기에는 충분했다.

비명과 함께 거대한 바람이 불어닥치며 집 전체가 진동했다.

잠시 후, 마병단원들은 흩어진 연막 속에서 반쯤 무너진 벽과 글레힘 빌름을 짐짝처럼 집어 든 단장을 발견했다.

“단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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