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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67화 (367/805)

367화

키시아르도 쉬지 못한 채 밤새도록 움직일 것임을 생각하면 제가 감옥 내에 가만히 앉아 시간을 버릴 수 없었다. 어차피 잠을 잘 생각도 없었던 데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 덕에 정신적 피로도 가라앉은 상태였다.

유더는 아직도 자고 있는 로벨을 돌아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걸친 망토를 여미며 주변에 기척이 없음을 재확인한 뒤, 창살을 잡아 힘을 사용했다. 가슴이 갑갑한 느낌이 퍼지며 한 사람 정도가 빠져나갈 공간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밖으로 나가 창살을 원위치시키자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듯이 텅 빈 옥만 남았다.

‘본래대로라면 손을 움직일 필요도 없는 일인데.’

그는 기척을 죽이고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지하 3층을 살피기 시작했다. 주변이 조용한 것을 보아 3층에 갇힌 이가 거의 없으리라 추측하기는 했었지만, 자세히 살피면서 보니 처음부터 그들 외에는 아예 아무도 없었던 듯했다.

‘아마 1층이 경범죄자들을 수감하는 곳이겠고… 2층이 중범죄자들 용이라면 3층은 그 외를 넣는 공간인가.’

병사들의 말로는 이곳이 만들어진 지 천 년 가까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타이누가 생겨나자마자 함께 만들어졌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제국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임에도 이토록 많은 감옥이 필요할 만큼 당시 상황이 어지러웠다는 거겠지.’

오래된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던 탓에 잘 모르겠지만, 도시 규모에 비해 감옥이 이리 많다는 건 그리 좋은 뜻이 아닐 게 뻔했다. 프루엘레가 준 책에는 좀 더 자세히 나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 제 어깨에 두른 망토와 온석을 준 이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본래대로라면 이 시간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을 터였다. 잠들기 전, 키시아르는 언제나 보고받은 편지들을 재차 읽거나 혹은 신검을 살피는 시간을 가지고는 했다. 유더의 앞에서는 검집을 두른 천만 다시 묶는 정도였으나, 새벽에 일찍 일어나 다른 방에서 꾸준히 검을 휘두르는 시간을 가진다는 걸 알았을 때는 조금 놀랐다.

유더가 잠에서 깨자마자 눈을 감고서 마음을 가라앉히며 힘을 모으는 시간을 갖듯이, 그에게는 새벽같이 일어나 연습을 하고 씻는 일과가 그러한 작용을 하는 듯했다.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게 노력하는 것에 그토록 익숙하니 손바닥에 박인 검사의 굳은살도 물러지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겉으로는 방탕한 펠레타 공작다운 생활을 하면서도 뒤로는 철두철미하게 일을 지휘하고 수련을 빼먹지 않는 점이 그답다는 생각을 했으나 방해가 될까 싶어 겉으로는 표 내지 않았다. 키시아르 또한 유더가 일어나자마자 그런 일을 한다는 걸 알았을 텐데도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걸 보면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오가는 대화가 없기에 오히려 특별하게 여겨지는, 그런 짧은 시간이었다.

생각에 빠진 사이, 어디선가 또다시 음산하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불빛을 받으며 보고를 읽던 키시아르의 옆얼굴을 머리에서 지워낸 유더는 재빨리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먼 곳에서 지른 비명이 길고도 험한 바위 틈새를 통과하는 와중 뒤섞이고 울리며 이지러진 듯한 그 소리는, 확실히 평범한 바람 소리와는 무언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겨울에 눈 폭풍이 칠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으면 날 법한 소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겨울도 아니고, 여긴 깊은 지하지. 역시 뭔가 이상해.’

유더는 몇 번 들려오던 소리가 끊긴 뒤 걷던 방향을 바꾸었다. 일반인이라면 파악이 어렵겠지만, 목표를 추적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이 정도 흔적쯤으로도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유더는 소리가 들린 곳에서 가장 가깝다 판단한 지점에 도달했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 복도의 끝이었다. 주변에 있는 옥도 비어 있었고, 인기척은 당연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위치가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만약 4층이 있었다면 여기쯤 계단이 있었을 것 같은 위치야.’

이 감옥은 혹 발생할지 모를 탈옥을 대비하기 위해 계단의 위치를 층마다 정반대 위치에 만들어 두었다. 지상에서 1층으로 내려간 계단이 오른쪽 끝이라면 2층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왼쪽 끝까지 가야 하고, 거기서 다시 3층으로 내려가려면 재차 오른쪽 끝으로 가야 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유더가 현재 서 있는 곳은 3층으로 내려온 계단에서 가장 먼 반대쪽 끝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며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다.

‘바람이 샐 만한 부분도 없어. 분명히 여기서 들렸는데…….’

그때, 이전보다 더 크게 또다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가장 크게 들리는 곳이라서인지, 묘하게도 바람에 섞여 사람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 흐으으… 으으…….

- 우우…….

소리는 잠시 후 다시 잦아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주변이 조용해졌지만 유더의 감은 뾰족하게 선 채 가라앉지 않았다.

‘역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살필 수가 없어. 불을 불러내는 수밖에.’

촛불만 한 크기의 불을 불러내어 복도의 끝과 그 주변의 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오래되어 낡은 돌벽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살피는데, 문득 어떤 부분에서 도드라진 감촉이 느껴졌다. 불에 비추어 보니 그것은 흐릿하게 새겨 둔 어떤 문양이었다.

‘이건… 타인 가의 문양이 아닌가?’

타인 가의 문양은 방패를 감싼 사슴 뿔이었다. 타인 공작의 편지 말미에서 본 인장과 거의 일치하는 문양이 감옥 복도의 돌벽에 새겨져 있다는 건 몹시 묘했다. 위치를 기억해 두고 계속해서 손으로 더듬으며 살핀 결과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번째 문양을 찾아냈다. 두 개의 문양은 같은 높이에 서로 마주 보는 방향으로 새겨져 있었다.

다른 벽에서는 그와 같은 문양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유더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슬슬 순찰을 도는 이들이 다시 올 때가 되었을 거야.’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속으로 숫자를 세며 병사들이 순찰을 도는 간격을 쟀다. 감옥을 떠난 순간부터 가늠한 숫자가 거의 한계에 다다랐으니 곧 가야 했다.

‘다행히 딱 맞췄군.’

제가 있던 감옥에 유더가 제 발로 다시 들어가자마자 곧 2층에서 병사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벨은 세상모르고 코를 고는 중이었다.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는 동안 다가온 병사들이 혀를 차며 쑥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 전하가 죽고 못 산다더니, 기어이 비싼 망토까지 주고 갔군. 저놈 옷에 달린 보석 좀 봐. 저게 다 얼마일까.”

“하나만 있어도 평생 먹고 살겠지. 옥에 갇혀도 달려와 꺼내 줄 분이 있으니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어. 퉤.”

“아무튼 우린 못 본 걸로 하기로 했으니 가자고.”

“…….”

그들이 사라진 뒤 유더는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이전이라면 모욕감을 느꼈을 법한 말인데,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드디어 제 노력이 나름대로 결실을 이루었다는 흡족함이 몹시 컸다.

‘몰랐는데…….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이 외부에서 보기에는 더욱 그렇게 보이겠군.’

그는 기분 좋게 앉아 제가 살피고 얻은 정보와 키시아르 쪽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들을 생각하며 밤을 지샜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은 밤이 될 듯했다.

***

다음 날, 제가 너무 깊이 잤다는 사실에 당혹해하는 로벨과 함께 병사들이 가져다준 아침을 들 때쯤 타이누의 기사단장 제이머 필이 찾아왔다. 그는 유더가 예상했던 대로 2차 조사는 없을 것이며, 곧 석방하겠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어제 새벽,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아내셨네. 아깝게도 잡지는 못하였으나 그들에게 납치당할 뻔하였던 글레힘 빌름 님을 구해 내셨지. 때문에 자네들은 곧 여기서 나가게 될 거야.”

“저, 정말입니까?”

“풀어 주고 내보내라.”

로벨이 놀라든 말든 제이머 필은 제 할 말만 하고는 몸을 돌렸다. 유더는 잠긴 문을 열쇠로 열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자리에서 홀가분하게 일어났다.

“가지.”

“대체… 제가 자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군요. 갑자기 이렇게 빨리…….”

전혀 놀라지 않는 유더를 본 로벨은 무언가 묻고 싶은 듯했으나 병사들을 의식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감옥 밖으로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격하게 환영을 해 주었다.

“유더! 나왔구나!”

“하룻밤 찬 곳에서 자니 역시 집이 좋지? 엉?”

에버는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이 익은 다른 단원들이 상당수 몰려온 상태였다. 제가 풀려났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았지만 치안 관리단 앞을 메우고 저를 자랑스럽게 두들기는 동료들에게는 미약하게 당혹한 기색을 보이는 유더를 보며 로벨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많이 몰려왔느냐는 표정을 하고 있네?”

제일 앞에 선 핀 엘더가 오랜만에 악동다운 미소를 지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쓰레기는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치우는 거라고 유더가 말했잖아. 그래서 치우러 온 거야!”

“가자!”

핀의 말에 크게 동조한 마병단원들이 타이누 기사단원들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단장님께서 앞으로 이곳에 마병단 조사본부를 만들어 버릴 거라고 하셨으니 다 비켜!”

“여긴 이제부터 우리 자리다! 의자는 사람 수대로 가져갈 거야!”

“뭐, 뭐야?”

당황한 기사들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치안 관리단 내부로 마병단원들이 와 소리를 내며 뛰어들어 갔다. 막으려 드는 자는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는 패기가 느껴졌다.

유더가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곁에 선 누군가가 웃음을 흘렸다.

“보좌의 예상이 멋지게 들어맞았지. 물론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겠지만.”

“단장님.”

키시아르가 유더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한쪽에 선 마차로 향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새벽 내내 야근을 했으니 이젠 쉴 때가 되지 않았나? 이야기는 가면서 하자고.”

펠레타 기사들이 얼떨떨해하는 로벨을 데리고 뒤쪽에 선 다른 마차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마차에 올라타 치안 관리단을 떠나 빌름 남작의 별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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