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66화 (366/805)

366화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나단이 있긴 하지. 왜. 나단의 얼굴도 보고 싶나?”

“……아닙니다.”

유더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키시아르의 얼굴에 걸린 흐릿한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의 시선이 누군가 왔다는 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자고 있는 로벨에게로 향했다.

“저기서 자고 있는 이가 하인으로 잠입해 들어왔다는 로벨이란 자인가.”

“네.”

“조사를 끝내고 돌아온 단원들을 시켜 기억을 잃었던 자들에게 물으니 저자를 아는 이가 있더군.”

“혹시 그 사람이 마티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입니까?”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수긍했다.

“맞아.”

“저도 이곳에서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었습니다.”

유더는 로벨이 마티를 위하여 협조를 약속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제가 했던 추측들을 요약하여 빠르게 보고를 마쳤다.

“그의 추측과 달리 저는 이 살인 사건에 나한 측의 또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내 보좌가 여기 있는 동안에도 한시도 안 쉬고 일을 했다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묘한 얼굴로 짧은 웃음을 흘린 키시아르가 잠시 후 로벨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이쪽도 조사를 마친 결과 살인은 그저 진짜 목적을 위한 구실이라 판단했네. 범인을 숨기려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없더군. 그렇다면 이 사건을 발견한 이들의 추후 움직임 속에 그들이 바랐던 뭔가가 존재한다고 봐야겠지?”

맞는 말이었다. 유더가 신중히 끄덕이자 키시아르가 사건 이후의 현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움직임이야 더 말할 필요 없을 테고, 빌름 남작은 현재 이번 일의 조사를 위해 모든 병력을 집중시킨 상태라네. 저택 주변의 보호를 몇 배로 강화했고, 타이누 전역을 순찰하던 기사들도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철수시켰지.”

“…여태 꼬리조차 잡지 못한 이들이 대담하게 제 코앞까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겁을 먹기 시작했나 보군요.”

“그래. 아직까지는 반신반의하는 듯하지만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별저와 본저 사이를 가로막던 병사들을 물린 것을 보면 속내는 뻔하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유더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노력하던 것치고는 대단히 약삭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그 이후부터 줄곧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보아서는 타인 공작에게 연락을 하고 있을 거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는 게 참 늦기도 하지.”

키시아르가 서늘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덕분에 치안 관리단과 빌름 가의 저택, 이외의 몇몇 장소를 제외하면 타이누의 치안은 현재 공백이나 마찬가지라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펠레타 기사단과 마병단을 곳곳에 보내 대기시켰지만……. 이쯤 되면 타인 공작도 슬슬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겠지. 나는 내일쯤 그들이 우리에게 정식으로 도움을 청하리라 생각하네.”

“그러면 예상보다 제가 좀 더 빨리 이곳에서 나갈 수도 있겠군요.”

기사단장 제이머 필은 꽤 애석해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결국 빌름 남작의 말에 무조건 따르고 있는 입장이다. 갑작스레 연락을 받아 2차 조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유더를 풀어 주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보일 반응이 어떨지 제법 기대가 되었다.

“……나가고 싶긴 했나?”

키시아르가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유더가 이곳에 온 목적은 일차로 로벨을 만나 그를 살린 뒤 정보를 얻고자 함이었고, 이차로는 저 때문에 키시아르와 마병단이 발목을 잡힌 채 물러서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전부 달성했으니 이젠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밖에서 보니 너무나 편하게도 앉아 있기에 내가 보좌를 감옥에 보냈는지, 방에서 쉬라고 보냈는지 잠시 헷갈릴 뻔했는데, 그렇다니 다행이군.”

실제로 이곳이 제 방과 별 차이가 없다 생각했던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슬쩍 돌렸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앉아도 앉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는데 말이야. 정작 그래야 할 이는 전혀 변함이 없어서 어찌나 허탈하던지.”

“……사실 혼내러 오신 겁니까?”

“그러면 제 발로 여기에 들어오겠다고 해 놓고 설마 이 정도 말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역시 이쪽이 최선이었다고 말할 셈이지. 알아. 사과할 필요도 없어.”

유더의 선택과 이유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을 사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다만 다음에는 다른 선택지가 더 최선이라 생각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했을 뿐.”

알 듯 말 듯한 말을 한 뒤 키시아르는 능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했다.

“자, 그러면 아까 정리한 현 상황에서 붉은사슴 상단 내의 비밀 금고까지 털어버린 이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을지 생각해 볼까.”

“…알겠습니다.”

나한이, 에르시가 현재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최초에 밝힌 목적은 타인 공작이 진행하는 비밀 무역의 꼬리를 찾아내어 온 세상에 드러내고 징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사실 그 목적 자체는 키시아르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부터 열까지 차이가 날 뿐이었다.

‘놈들은 대삼림과 타이누에서 차례차례 비밀 무역과 관련된 정보들을 이미 손에 넣은 상태야. 폭발 사건을 일으키며 도시에 혼란을 부르고, 그것을 통해 빌름 남작이 보이는 움직임을 추적도 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진짜 핵심에는 이르지 못한 듯 보였다. 그건 그들이 얻은 정보가 완전하지 않거나, 혹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었음에도 무언가 가로막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해서 그 끈질긴 이들이 과연 포기하려 들까.

‘그랬다면 폭발 사건에 이어 빌름 남작의 집에서 살인까지 떡하니 저지를 리 없지.’

나한 측은 도시에 떠도는 공포를 의도적으로 점차 증가시키고 있었다. 이제까지 귀족들은 그 일들을 그저 타이누의 기사들을 죽인 각성자 테러 집단을 잡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로만 인식했으나, 오늘 이후로는 아니게 될 터였다. 혼란이 극심해지면 질수록 타인 공작도 이 일을 더는 작은 일로 치부하고 숨길 수 없게 된다. 혼란은 사람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기에 가장 좋은 감정이기도 했다.

겁을 집어먹은 빌름 남작. 성문을 닫은 채 내부 치안이 한 곳에만 집중된 타이누의 현 상황. 여태 일어난 폭발 사건들. 그에 얽힌 주요 인물들의 현 위치. 경험을 토대로 예상한 나한이 취할 만한 방식. 여태까지 들었던 모든 말들……. 유더의 머리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

잠시 후, 그는 저도 모르게 문득 작은 소리를 흘렸다.

“뭔가 떠올랐나?”

억측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단장님. 현재 남작의 저택과 치안 관리단을 제외하고 기사단이 아직 철수하지 않은 소수의 장소 중에… 혹시 글레힘 빌름의 집이 있습니까?”

치안 관리단으로 오기 전, 빌름 남작은 유더를 조사하기 위해 기사단장 제이머 필을 글레힘 빌름의 집에서 불러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번 살인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도시 내 병력의 재배치라면, 기사단장의 위치 이동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있네. 필 기사단장이 떠난 이후에도 기사들이 지키고 있다더군.”

“그렇다면 그가 어제 당했다는 사고가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당한 일인지도 아십니까?”

유더의 말에 무언가 짐작한 바가 있는 듯,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단이 조사하여 오늘 보고한 바에 의하면 어제 일어난 상단 창고 구역 폭발 사고에 휘말렸다더군.”

“물론 붉은사슴 상단의 창고 구역이었겠지요?”

“그래. 펠레타 기사단이 줄곧 살피던 곳 중 하나였지.”

유더는 비로소 결론을 내렸다.

“놈들이 이번 일을 통해 노린 진짜 목표는 그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째 동생 부부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빌름 남작은 글레힘 빌름에게는 기사단장까지 보내 주며 집 앞을 지키게 했다. 단순히 둘째 동생 부부는 남작의 재산에 빌붙어 사는 자이고 글레힘 빌름은 붉은사슴 상단을 맡고 있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자라는 차이 때문이었을까? 유더가 아는 남작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나한 측이 타이누에서 제일 처음 일으켰던 사건이 무엇이었던가. 로벨이 말했던 붉은사슴 상단 건물 폭발 건 이후에도 그들은 또다시 상단의 창고가 밀집한 구역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때마침’ 그곳에 있던 글레힘 빌름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것이 전부 우연의 결과일 뿐일까?

그들은 처음부터 붉은사슴 상단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중이었다. 상단의 중심 인물인 글레힘 빌름 또한 충분히 목표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제 일어난 일도 사실 상단을 파헤치고 혼란의 불씨를 키우는 목적보다는 글레힘 빌름을 노려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겠군.”

별다른 설명 없이도 키시아르는 빠르게 유더의 뜻을 이해했다. 그가 하는 말이 곧 유더가 하려던 말이나 다름없었다.

“로벨은 나한이 얼마 전 상단 금고에서 빼낸 종이들을 거의 다 읽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것을 보면, 얻은 정보가 완전하지 않았거나 무언가 막혔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우선 적의 눈을 돌릴 만큼 떠들썩한 사건을 일으킨 다음, 그 틈에 진짜 목표를 노린다…. 군사를 다루는 방법을 아는 자의 작전이군. 전력차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혹은 피해를 볼 가능성까지 모두 감안하여 저질렀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 대담하고도 가차없어. 그자답게도.”

키시아르가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유더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나한다운 방식이지. 동료들이 큰 위험을 무릅쓰는 작전이든 말든, 일단 자신이 살아남고 성공한다면 대의를 이룬 셈일 테니까.’

단순히 마병단의 발목을 잡거나 이간질을 하려 드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한술 더 뜰 생각을 했다는 점이 키시아르의 말마따나 실로 대담하고 위험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재까지는 우연이 겹치며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둔 상태였다.

빌름 남작은 그들이 저를 노린다고 여겨 기사들과 병력을 급히 옮겼다. 지금도 글레힘 빌름과 붉은사슴 상단을 지키는 이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이전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숫자일 터였다. 거기에 유더가 얽히면서 마병단의 이목도 살인 사건과 치안 관리단에 쏠렸다.

한 번의 대담한 살인으로 적의 이목을 돌리고, 혼란을 야기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기회를 만든 데다 심지어 유더의 발까지 묶였으니 그들이 움직이고자 한다면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었다.

“시간이 없겠군. 바로 움직이도록 해야겠어.”

키시아르가 손에 끼고 있던 팔찌형 마도구에 박힌 사파이어를 돌렸다. 빛이 한 번 깜박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단 주커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나단 주커만이 옥 안에 있는 유더를 향해 잠시 복잡한 눈빛을 보냈다.

“나단. 그사이 변동 보고는 없었나?”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좋아. 붉은사슴 상단의 부서진 건물과 글레힘 빌름의 집 근처에 있는 이들에게 연락을 넣고, 우리도 곧바로 움직인다. 한시가 급해.”

“먼저 나가 연락을 보내 놓겠습니다.”

나단은 주군이 무슨 이유로 그런 명을 내리는지 묻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창살 너머에 있는 유더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일 보지.”

“조심하십시오.”

오간 인사는 그저 그뿐이었다. 키시아르와 나단은 왔을 때만큼이나 조용히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유더는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으로 한동안 앉아 있다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온석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함과 아직도 공기 중에 남아 있는 서늘한 향기가 그 일이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러면 이제 나도 움직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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