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이걸 대체 언제 구해 온 거지.’
저택을 떠나온 지 아직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온석은 비싼 값에 비해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 가격 대비 성능이 좋지 않은 물건이었다. 물론 키시아르가 돈에 구애될 일은 없겠지만, 정신없이 바빴을 사이에도 이것들을 구해다 제게 전달하라 명했을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럴 필요 없는데.’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내일 조사가 끝나는 대로 나가게 될 것임을 알 텐데도 모두 제게 너무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과거에는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당연한 듯 벌어질 때마다 어떻게 답해야 좋은지 알 수 없어 조금 혼란스러웠다.
“로벨.”
유더는 키시아르가 보낸 온석을 주머니에 넣고, 성수는 창살 너머에 있는 로벨에게 건넸다. 자신은 다치지 않았으니 부상자가 사용하는 쪽이 나을 듯했다.
“얼굴이 빨리 나으면 의심을 살 테니 그쪽에는 조금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몸에 발라.”
“이런 귀한 걸… 마병단에서 몰래 주신 것 아닙니까. 제가 쓸 수는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부상자가 옆에 있으면 둘 다 힘들어져.”
“하지만…….”
설명을 해 주었음에도 몇 번이나 저어하던 로벨은 유더의 시선에 밀려 결국 조심스럽게 성수를 사용했다. 얼굴도 상처투성이였지만 옷에 감추어진 안쪽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엉망이었다.
“자백하라고 그렇게 때린 건가?”
“뭐… 그래도 고문을 당하진 않았으니까요. 저보다 여기에 더 오래 갇혀 힘들었을 마티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티를 생각하면 전… 죽는다 해도 할 말이 없으니까요.”
효과가 좋은 성수 덕에 로벨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보이게 깨끗해졌다. 그는 유더에게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한 뒤, 몇 번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망설이다 시선을 돌리기를 반복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그게……. 마티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나니 너무 궁금해서 말입니다…. 기억을 되찾았다고 들었는데 잘 지내고 있습니까? 건강은 어떤지…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조금만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짐작은 했지만 로벨은 역시 제 연인의 안부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최대한 억누르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만 간절한 눈빛을 보다 보니, 문득 어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쓰디쓴 간절함이 담겨 있는 어떤 눈빛.
저를 바라보는 그 언젠가의…….
“…역시 어렵겠지요. 죄송합니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몽롱해졌던 상념에서 퍼뜩 깨어나 정신을 차렸다.
‘……뭐였지?’
“아니. 그녀는… 잘 지내고 있었어. 다만 말해 두고 싶은 점이 있는데, 아무래도 당신에 대해 좀 오해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
“오해요?”
유더는 마티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티가 로벨을 비롯한 온건파 각성자들마저 자신들을 배신하고 버린 게 아닐까 생각하며 원망하는 듯했다는 말을 들은 로벨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얼굴을 가린 채 말이 없었지만, 이내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하네요. 그때 제게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그녀는 모르는 일이고…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을 겪었다면 모든 각성자에게 환멸이 났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녀를 찾았다는 생각에 그저 기뻐만 했군요.”
“우리에게는 호의적이었고, 나한 측에 대한 증오가 더 큰 듯했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야. 만나면 이야기를 해 봐.”
“……예.”
로벨은 비각성자들이 쫓겨나는 일이 터지기 전, 공교롭게도 급한 임무가 생겨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임시 거처를 떠난 상태였었다고 했다. 아마도 나한 측이 수를 썼었을 것이다.
유더는 이전에 키시아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한은 본래 각성자에게 호의적이었던 비각성자들에게조차 그토록 가차 없는 짓을 하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까. 그 증오의 끝에 그가 바라는 건 뭘까. 모든 복수를 마치고 각성자만 가득한 세계를 완성하는 것일까.
‘이논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군. 옛 마법사들 중에도 그런 자가 있었다고 했었지.’
다른 식물들의 뿌리를 죽이며 자라나는 풀은 그냥 내버려 둔다 해서 죽지 않는다. 그것을 가장 쉽게 죽이는 방법은 아직 싹이 작을 때 뽑아내는 것뿐이었다.
‘확실히… 날이 갈수록 점점 행동이 거침없어지는 걸 보면 이 이상 커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유더는 키시아르가 바란 대로 이번 일을 통해 타인 공작 측과 나한, 둘 모두를 뽑아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로 했다.
밤이 깊어지자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 짐승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음산한 소리였다.
“에잇, 또 지랄이군. 저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싹해 죽겠어.”
“감옥이 지어진 지 천 년 가까이 되었을 테니 바람 새는 소리가 저따위인 것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요즘 들어 더 심하잖나. 전엔 저 정돈 아니었다고. 어디서 새는지라도 찾아 봐야겠는데 사람이 부족하니…….”
멀리서 투덜대며 지나가는 병사들이 사라지는 동안 유더와 로벨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여긴 지하 3층이라 창문도 없는데, 바람이 샐 만한 구석이 많나?’
이전에 기억 잃은 자들을 구해낸 곳은 지하 1층이었지만, 유더와 로벨은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서인지 3층에 갇힌 상태였다. 같은 층에 갇힌 이가 거의 없는지 몹시 조용한 건 좋았지만 창이 없어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힘든 건 조금 불편했다. 그렇다 해도 몸은 편하고 방해하는 이도 없으니 유더는 이 정도면 제 방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프루엘레 공자가 주었던 책 안에서, 이곳에 지하 4층이 있다는 소문도 존재한다는 부분이 있었지. 그건 진짜일까.’
프루엘레는 타인 가의 비밀 무역과 연관된 ‘물건’들을 숨길 만한 장소를 추측할 때 이 치안 관리단의 감옥도 표기해 두었었다. 4층이 있는 게 정말이라면, 지금이 그것을 확인할 적기가 아닐까.
‘어차피 이곳에는 병사들도 거의 오지 않는데……. 잠깐 빠져나갔다 다시 돌아온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살짝 매만져 본 창살은 몹시 단단했으나, 그래봤자 철이었다.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줄어들었다고 능력이 없어진 건 아니니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제 발로 나갈 수 있었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조금 더 주변이 조용해지면 슬쩍 4층을 찾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로벨은 추위와 졸음에 지친 채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옆사람이 깨어 있으니 저도 잘 수 없다 여기는 기색이 뻔해,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수면을 권했다.
“피곤하면 누워서 그냥 자지 그래.”
“아… 네. 마병단원님은 안 피곤하십니까?”
“나는 이게 편해.”
“정말 대단하시군요…….”
로벨이 유더를 같은 인간이 아닌 듯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더 버텨 보려 노력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벽에 기대어 본격적으로 낮게 코를 골았다. 유더는 잠들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멀리서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기척을 확인했다. 거의 사라진 듯하니 이제 슬슬 움직여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에서 누군가 걸어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순찰을 도는 병사들은 다시 돌아올 때가 아닌데. 뭐지.’
유더는 일단 반응하지 않고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곳을 돌지 않고 정확하게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온 발소리가 잠시 후 앞에서 멈추었다.
후우.
상대에게서 흘러나온 아주 작은 숨소리가 귀로 들어온 순간, 목 뒤에서부터 등골을 타고 찌릿한 소름이 흘렀다. 싸늘하게 식어 있던 전신의 혈액이 순식간에 거꾸로 펌프질되는 듯 뜨겁게 내달렸다.
유더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손에 작은 등잔을 든 키시아르를 보았다.
“…….”
입을 벌렸지만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키시아르가 여기에 있는 게 꿈인지, 현실인지 순간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더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잠시 후 우아한 움직임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등잔을 곁에 내려놓았다. 특유의 향이 퍼지며 시선이 같은 높이에 들어맞고 나서야 겨우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찾아들었다.
“…여긴 대체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무심히 일자를 그리고 있던 입술 끝이 그제야 조금 올라갔다.
“적당한 대가를 주고.”
“내일이면 나갈 텐데, 왜…….”
“음… 그런 매정한 소리는 그만하고, 이쪽으로 와 줄 수는 없나? 얼굴이 잘 안 보여.”
유더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천천히 창살 앞으로 다가가자 키시아르가 너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싼 체온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아니. 내 쪽이 차가워진 건가.’
“내가 준 온석은?”
키시아르도 같은 생각을 한 듯 물었다.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던 온석을 꺼내자 그가 그것을 살짝 쥐었다. 붉은빛이 흘러나오며 느껴지는 온기가 더욱 강해졌다.
“마력을 불어넣으셨습니까?”
“이 정도는 문제없어.”
유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는 듯 대꾸한 사내가 온석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 많은 말이 오가지도, 표정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작은 표정이나 손길 하나하나가 피부를 찌르는 듯 느껴졌다.
체온이 옮은 뺨이 조금 따뜻해지고 나서야 키시아르는 겨우 뺨에서 손을 놓고 또다시 깊이 숨을 내쉬었다.
“……너무 차가워. 역시 옷이라도 갈아입히고 보냈어야 했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뭔가 먹기는 했나? 남작의 결혼기념일 식사 때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었잖나.”
그 와중에 그것을 다 보고 있었던가?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으나 병사들이 중간에 물과 빵을 주기는 했다. 답을 들은 키시아르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게 접어서 들고 온 망토였다.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으니 걸치고 있게.”
“내일 병사들의 눈에 띌 겁니다.”
“돈을 받은 이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옷이 될 테니 걱정 말아.”
“…….”
거절을 한다 해도 들을 기색이 없어 보였기에, 유더는 잠자코 창살 너머로 건네준 망토를 받아 어깨 위에 둘렀다.
“그런데… 혼자 오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