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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64화 (364/805)

364화

로벨은 남작의 동생 부부가 목표가 된 것이나 오늘 살인이 일어난 데에는 딱히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여기는 듯했다.

“저택의 보안이 뚫렸다는 사실을 본보기로 보여 주어 남작과 타인 가를 욕되게 만들고 싶은 의도가 가장 컸을 거라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니면?”

“마병단이 남작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녀석들도 알고 있다면, 그렇게 해서 사이를 이간질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죠. 그 사이에 자기들은 하고 싶은 일을 다 저지르고 말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들이니까요.”

개인 감정이 몹시 섞여 있는 듯한 말이기는 하나, 지나친 소리는 아니었다.

‘범인을 각성자로 특정시키는 방식을 이용해 타인 가와 마병단 사이의 혼란을 부추긴다……. 가능성은 충분하지. 그럴 셈이었다면 정확히는 마병단을 막으려 했다는 게 맞겠지만.’

나한은 이미 대삼림에서 유더와 키시아르를 만났다. 상단 건물에 방문했을 때 나단 주커만이 이상함을 느껴 살피다 놓친 이도 그가 맞다면, 마병단이 어디에 있는지쯤은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마병단이 빌름 남작의 저택에서 머무른다는 사실이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딱히 비밀은 아니었으니까.

‘대삼림에서 마주쳤던 때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키시아르가 타인 가의 불법 무역 건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 이쯤에서 미리 선수를 친 건가.’

그가 할 만한 방식이기는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유더가 로벨을 발견하고 추격전을 벌이다 둘 다 감옥에 들어가는 결과를 예상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뭔가가 부족한 듯 느껴져.’

시체를 보았을 때 느꼈던 어떤 감각. 빌름 남작과 키시아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느꼈던 안개와 같은 의문은 로벨을 만났음에도 해결되지 않고 아직 흐릿하기만 했다.

‘그게 대체 뭘까. 내가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키시아르 쪽에서 정보를 더 찾아낸다면 알 수 있게 될까.’

유더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사이, 로벨은 제 이야기를 조금 더 했다. 타이누에서 처음에 일어났던 두 건의 폭발 사건 중 붉은사슴 상단에 침입한 건 나한 측이지만, 이곳에 침입했던 건 사실 자신과 동료들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는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나한 쪽 놈들이 거기 간 사이에 여기로 와서 마티와 다른 사람들을 몰래 구할 생각이었는데… 그땐 이미 아무도 없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조차도 왠지 나한에게 휘말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도망치던 도중 동료가 일으킨 폭발에 다친 병사들이 나왔다는 사실에 그는 상당한 죄책감을 지닌 듯 보였다. 한 번도 사람을 공격하거나 죽인 적 없이, 그저 조용히 사는 게 목표였다니 그럴 만도 했다.

유더는 로벨의 눈빛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나한 측에서 붉은사슴 상단을 공격한 일 말인데, 더 생각나는 건 없나? 아무거나 좋아.”

“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실 그 일을 주도한 건 에르시란 녀석입니다. 나한은 그 녀석의 복수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함께 하고 있을 뿐이죠. 에르시가 그곳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나한이 도와주었다고 들었습니다.”

“마주친 적이 있는 이군.”

“아. 그렇다면 혹시… 나한의 팔을 자를 뻔한 마병단원이 당신입니까?”

유더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런데… 팔이 잘릴 뻔했다고?”

키시아르가 직접 나선 데다 피가 많이 묻어 있었으니 꽤 다치기는 했으리라 생각했으나, 나한에게 그 정도로 큰 부상을 입힌 줄은 몰랐다.

“에르시를 감싸느라 그리 크게 다쳤다더군요. 당신이 아니라니 조금 놀랍고 아쉽네요. 아무튼 에르시는 그때 붉은사슴 상단을 목표로 삼고 나한과 몇몇 이들과 함께 갔었는데, 거기서 어떤 종이 뭉치를 많이 들고 왔습니다. 나한이 한동안 그것을 살피더군요. 저는 녀석이 그걸 거의 다 봤다고 말할 때쯤 크게 싸우고 그곳을 나왔기 때문에 이후는 잘 모르겠습니다.”

붉은사슴 상단의 비밀 금고를 나한 측이 털어갔으리라 추측했던 부분도 이로써 사실로 드러났다. 그 서류는 무슨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어쩌면 지금 에르시와 나한이 벌이는 행동들이 그것과 관련된 건 아닐까. 유더는 그 정보를 잘 기억해 두었다.

“그 외에는 아직 더 생각나는 게 없군요. 떠오르면 말하겠습니다.”

로벨은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이가 걸려 있기 때문인지, 마병단 내에 있을 가일과 두일 형제보다도 발언에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단체 내부의 기밀이나 현자에 대해서는 꼭 입을 다물고는 했었지. 로벨에게 묻는다면 어떨까.’

현자에 대해서도 알아보아야 하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지만, 눈앞의 급한 일이 우선이니 그 부분은 일단 미루기로 했다.

“거기! 필 단장님께서 도착하셨으니 일어나 있어. 마병단과의 대화가 끝나는 대로 조사를 위해 올라간다.”

어둑한 감옥 창살 너머에서 병사가 소리쳤다. 드디어 조사할 때가 된 듯했다. 로벨이 흠칫 놀랐다가는 초조하게 마른 침을 삼켰다.

“……조사를 할 때 전 뭘 하면 될까요.”

“내가 오기 전에 가짜 자백을 하지는 않았겠지?”

“안 했습니다. 했다면 이 꼴이 되지도 않았겠죠. 물론 그자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절 범인으로 찍어 둔 듯했지만 말입니다.”

“그거면 됐어. 나는 당신이 각성자라는 사실을 알고 침입자로 오해하여 잡으려 했고, 당신은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도망치다 엉켜 넘어졌을 뿐인 거야. 시체를 발견한 건 우연이고, 우리 모두 그들을 죽이지 않은 거지. 그 사실만 기억해 둬. 나머지는 말할 필요 없어.”

“…신기하게도 영 거짓말은 아니군요.”

부담을 던 듯 로벨이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을 힘겹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곧 병사들이 그들을 데리러 왔다. 유더는 빠져나가면서 감옥 구조를 더 살폈다. 그가 갇혀 보았던 감옥들보다는 훨씬 단조로운 구조지만 튼튼한 것만은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또 보게 되는군.”

유더를 다시 본 제이머 필 기사단장은 찡그린 얼굴로 말을 건넸다. 유더는 그를 무시하고 곁에 앉은 에버와 동료들의 얼굴을 살폈다. 거기에 아까는 없던 얼굴이 한 명 추가되어 있었다. 프루엘레 반 타인이 기사단장의 옆에 앉아 있다가 유더를 보고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 아일 경. 내 고양이를 보러 와 주었다가 이런 고초를 겪게 되다니, 미안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내가 기억하는 것만이라도 전하여 조사에 도움을 주기로 했네.”

“……그러셨군요.”

아무래도 키시아르가 보낸 게 아닌가 싶었으나, 유더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기사단장이 일어나 명을 내렸다.

“저자들을 앉혀라.”

병사들이 로벨과 유더의 무릎을 꿇리려 했다. 로벨은 순순히 따랐지만 유더는 아니었다.

“조사를 위해 온 이들을 범인처럼 취급하는 것이 타이누 기사단의 규칙인가 보군요. 아니면 의자가 없으십니까.”

그의 반문에 주변에 선 기사들의 얼굴 위로 당혹과 어이없는 감정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유더의 말이 맞습니다. 단장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유더를 사건 조사 협조를 위해 보냈을 뿐이라 말씀하셨다고 아까 전달하지 않았던가요. 시작부터 이런 취급은 불쾌하군요.”

“하, 기가 막히는군.”

에버가 차가운 얼굴로 지원을 보내자 제이머 필은 결국 의자를 가져오라 명했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순식간에 한층 누그러졌다.

조사는 유더의 예상보다 훨씬 지리멸렬했다. 제이머 필과 타이누 기사단은 범인이 각성자이니만큼 유더와 로벨 중 누구라도 범인이 될 수 있다 주장했지만, 아무런 증거나 논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반면 유더에게는 빌름 남작의 동생 부부를 죽인 능력이 어떤 능력인지 제시해 줄 마병단의 동료들과, 그가 오늘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증언해 줄 증인이 있었다.

“아일 경은 식사 자리가 파한 이후 나의 부탁으로 고양이를 만나러 방에 함께 올라갔지. 저자를 보자마자 쫓아 달려나가기 전까지는 쭉 나와 함께 있었어.”

프루엘레가 느긋이 앉아 입을 열자 내내 유더와 로벨을 추궁하려 들던 제이머 필 단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오기 전 펠레타 공작 전하께 듣자 하니, 페이프와 넬리사벨 부부는 저택 바깥에서 살해당한 뒤 지하실로 옮겨진 게 확실하다더군. 옷과 신발에 묻어 있던 피 묻은 흙이 바깥에서 발견되었다지 뭔가.”

유더는 프루엘레의 말이 키시아르가 제게 전하는 정보임을 알아차렸다. 시선을 마주한 프루엘레가 그의 생각이 맞다는 듯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머 필 단장이 부하 기사들에게 그 말이 정말인지 확인했으나, 저택에 가 있는 기사들과 연락이 긴밀하지 못해 아직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역시 저와 이 하인은 내내 저택 안에 있었으니 범인이 될 수 없겠군요.”

유더와 로벨이 서로 입을 맞춰 놓은 상황 설명까지 듣고 난 뒤 기사단장은 만사가 짜증스러운 얼굴이 되어 이마를 감쌌다. 유더든, 로벨이든 아무나 범인으로 몰면 쉬워질 일을 모두가 나서서 꼬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펠레타 공작 전하와 마병단은 타이누 기사단의 기사들을 대삼림에서 죽인 자들이 이번 일의 진짜 범인이리라는 뜻을 전했으나, 솔직히 말해 그놈들이 그리 쉽게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도 다른 짓을 하지 않은 채 빠져나갔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군. 일단 합동 조사가 계속 진행 중이니 하루 뒤에 다시 2차 조사를 열지.”

결국 조사는 아무 결론도 내지 못한 채 맥없이 끝났다. 유더가 감옥으로 돌아가기 전, 에문이 유더에게 인사를 하는 척하며 손에 몰래 무언가를 슬쩍 쥐여 주었다.

“단장님이 보내신 거야. 가지고 가.”

“…….”

작은 천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유더는 예복 소매 안에 그것을 숨겼다.

“감옥이 무섭지는 않아?”

“괜찮아.”

“추위는? 거긴 맨바닥이잖아.”

“그것도 괜찮아.”

유더의 답에 한숨을 내쉰 동료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절대 참지 마. 너라면 문제없겠지만.”

“그럴 생각이야.”

유더는 도로 감옥으로 내려갔다. 병사들이 사라진 뒤 열어 본 주머니 안에서는 상처 치유에 효과가 좋은 성수가 든 작은 병과, 붉은색을 띤 마정석 하나가 굴러 나왔다. 지니고만 있어도 체온 유지에 짧게나마 도움이 되는 온석이었다.

“…….”

여태까지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었는데, 그것을 본 순간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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