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유더는 그가 무어라 목소리를 더 내기 전, 입술 위로 손가락을 올려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했다. 아직 그들이 갇힌 옥 근처에 있는 병사들을 인식한 사내가 곧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 와 보았던 때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타이누 치안관리단 감옥은 규모에 비해 지키는 이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인력이 더욱 부족할 시기이니 얌전히 있는 기색을 보이면 저들도 곧 경계를 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터였다.
유더는 조용히 감옥 안에 드리운 어둠 속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그의 생각대로 옥 바깥에서 그들을 살피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별문제가 없다 판단한 듯 얌전히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겠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당신이 왜 여길…….”
남자도 기다렸다는 듯 다시 고개를 들고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조사를 받으러 왔을 뿐이야.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일단 당신이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도망치려 시도하지는 않아 주어서 다행이란 말을 하고 싶군. 그랬다면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 무척 힘들었을 테니까.”
오면서 했던 가장 큰 걱정거리가 사실 그 부분이었는데, 다행히도 여태 얌전히 옥 안에 들어앉아 있어 주어 다행이었다. 유더의 말을 들은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싸늘하게 하, 하는 소리를 흘렸다.
“나는 누구처럼 사람을 죽이거나 공격하려고 능력을 쓰지 않아. 애초에 그런 일에 쓸 만한 능력도 아니고. 도망쳐 봤자 이곳을 나가기 전에 죽을 게 뻔한데 뭐 하러 빠른 죽음을 자초하겠어.”
“상황 판단이 빠른 건 좋군. 그러면 일단 당신이 누구인지, 오늘 일어난 사건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부터 말해 줘야겠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도, 당신도 범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진범을 잡아야 하니까.”
순간 남자의 어두운 갈색 눈동자가 잠시 멈칫했다.
“……내가 죽이지 않았다는 걸 믿는다고?”
“그러니까 여기로 온 거잖아.”
“당신은… 마병단이잖아.”
“그게 뭐.”
남자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잡으러 왔던 사람이 나를 믿는단 건 이상한 소리지. 내가 죽으면 당신한테는 오히려 좋은 상황일 텐데 뭘 믿고 말하라는 거야.”
시간이 없는데 참 귀찮게도 구는 놈이었다. 유더는 길게 숨을 내쉰 뒤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대로 있으면 당신은 죽어. 그리고 당신이 죽어서 나아질 상황이었다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내가 끝냈을 거야.”
삭막한 어조에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꼈는지 남자의 몸이 멈칫 굳었다.
“당신을 잡으려 했던 건 남작의 집에 잠입한 각성자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도망치지 않고 목적을 순순히 말해 줬다면 금방 끝났을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건 당신 쪽이라고. 진짜 범인이 나한과 관련된 이일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고, 나머지 정보가 필요해. 당신은 그들과 다른 쪽이지?”
“…그걸, 어떻게.”
“당신이 찾는다는 이들은 마병단이 별저에서 보호하고 있어. 나는 당신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거기까지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린가?”
순간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절망과 자포자기로 가득했던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뜨거운 감정이 불쑥 튀어 올랐다. 남자는 웅크렸던 몸을 펴고 철창에 매달렸다.
“역시, 역시 거기 있었던 거구나. 살아 있었어……! 거, 거짓말은 아니겠지?”
“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지? 당신이 여기서 나가면 바로 확인할 수 있을 문제인데.”
“다들 무사한… 아니, 무사한 겁니까? 대체 어떻게…….”
그때,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는지 멀리서 병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유더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다시 한 번 눈짓을 했다. 남자는 철창을 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기척이 다시 사라진 뒤에야 대화가 재개되었다.
유더는 기억을 잃은 사람들을 발견한 과정과 구해 온 뒤의 치료 과정을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제와 단원들의 치료를 통해 몇몇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는 말을 듣자 남자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쳐서… 몇몇은 이미 죽었다고… 했다고요.”
“우리가 발견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렇다면 혹시, 거기에… 거기에 비 오는 날의 하늘 같은 긴 머리칼을 지닌 여자는 없었습니까. 이름은 마티… 출신은 넬라른인 사람인데…….”
남자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철창을 움켜쥔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유더는 뜻밖에도 여기에서 다시 듣게 된 이름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순순히 답해 주었다.
“그녀는 우리와 함께 있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이었지.”
“……신이시여.”
철창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던 손에서 일순 힘이 풀렸다. 유더의 앞에 엎드려 몸을 숙인 남자가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되뇌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시간이 없었지만 유더는 그가 흐느껴 우는 모습을 탓하지 않고 모른 척했다. 잠시 후 눈물을 그친 남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순순해진 태도로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마티가… 혹시 저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습니까? 저는 마티의…….”
“마을에 연인이 있었다고는 했었는데.”
“접니다.”
빠르게 대답한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잔뜩 얻어맞아 엉망으로 부어오른 얼굴이었으나 눈빛만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저는 나그란의 별의 일원이고, 나한을 따르는 놈들과는 이번 일로 척을 진 지 오래입니다. 마티를 찾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희망을 찾아 그곳에 들어갔던 겁니다.”
어둠에 가린 얼굴 위로 결연한 의지가 흘렀다.
“당신을 믿으면 전 여기서 죽지 않고 나갈 수 있는 겁니까? 마티를… 다시 만날 수 있습니까?”
유더는 그를 향해 철창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마병단장 보좌 유더 아일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믿겠습니다. 제 이름은 로벨 젬슨입니다.”
로벨이 천천히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가는 놓았다. 그는 자신이 서부 출신이고, 각성한 이후 집을 나와 나그란의 별에 우연히 합류하게 되었다고 밝힌 뒤 가진 능력을 알려 주었다.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빨리 도망갈 수 있었던 게 그 능력 때문이었군.”
“뭐, 그렇죠. 물건도 가능합니다. 보잘것없지만요.”
제 정보를 드러낸 로벨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부어오른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보잘것없는 능력은 아니야. 발전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무서워질 수 있을 능력을 스스로만 별것 아니라고 여길 뿐이지.”
“…다들 우스운 능력이라고 하던데, 그렇게 말해 주는 분은 처음이네요.”
“그 능력으로 내 검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몬스터를 죽일 수 없었을 텐데 우습다고 할 수 없지.”
“그건……. 그렇죠.”
로벨도 페투아멧을 죽였던 때 만난 유더의 모습을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듯 멋쩍게 대답했다.
“절 기억하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도와준 이들을 기억하지 못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심지어 그때 로벨과 그의 동료들은 숲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초면의 마법사들까지 구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 해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때 보았던 당신의 모습… 이제 와서 말이지만 정말 굉장했어요. 저와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걸 봤기 때문에 나한의 이동 결정을 빠르게 받아들인 거예요. 그런 힘을 지닌 쪽에서 우리 말을 들어 준다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몬스터보다 더한 천재지변이 될 테니까요. 안전을 위해 택한 거죠.”
결국 일을 이렇게 만든 게 전부 제 탓이란 소리인가 싶었으나, 로벨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후회되네요. 역시 그 자식의 꿍꿍이가 뭔지 지켜보고 좀 더 신중하게 결정했어야 했는데…….”
후회해 보아야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려 본격적인 질문을 했다.
“그들이 왜 빌름 남작의 집까지 와서 시체를 놓고 갔는지에 대해 당신은 짚이는 게 없어?”
“……사실, 어제부터 주변에서 좋지 않은 낌새를 느끼기는 했었습니다.”
로벨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대답했다.
“전 이곳에 잠입하기 전, 동료들에게 나한 측에는 제 행방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하인이 된 뒤부터 하루에 한 번씩 지정된 곳에서 연락을 주고받았죠. 그런데 어제는… 동료들의 연락이 없더군요.”
로벨은 동료들이 바쁘거나, 혹은 다른 일 때문에 나타나지 못한 모양이라 짐작하여 빌름 남작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이후 계속해서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고 했다.
“저는 하인 일을 하면서 빌름 남작의 저택 구조를 어느 정도 익혔고, 만약을 위해 도망칠 길도 알아 두었습니다. 모든 동료들에게 그걸 알리지는 않았지만…….”
“그 정보가 나한 측으로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
“……네.”
“그렇다 해도 왜 남작의 동생 부부였고, 왜 오늘이었을까.”
“글쎄요… 하지만 제가 아는 녀석들은 딱히 대단한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아마 적당한 순간에 저택 주변을 어슬렁대다 그 부부가 눈에 띄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