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뭐?”
“…….”
바라던 답을 들었을 텐데도 오히려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빌름 남작과, 유더의 의향을 파악하려는 듯 미소를 거둔 키시아르의 대조가 선명했다.
“내, 내가 분명 그 입을 다물고 있으라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공작 전하가 곁에 계심을 믿고 아주 방자하게 구는군!”
빌름 남작은 유더를 가둘 때 묶어 두지 않는 대신, 능력을 사용하거나 입을 여는 즉시 범인이라 자백하는 것으로 알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유더를 범인으로 몰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카드로 쓰기를 원했지만 괜히 손을 대어 쓸데없는 분노까지 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현재까지 키시아르의 뒤에 앉아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게 남작의 협박이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나누시는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남작님의 말씀대로 최대한 공정히 조사를 하는 편이 저의 결백을 더욱 확실히 증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발언 요청을 드렸을 뿐입니다.”
물론 빌름 남작은 공정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더는 당연히 그렇지 않느냐는 듯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입을 나불거렸다.
“남작님께서 방금 검시를 한 분들의 의견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 또한 그분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제가 돌아가신 분들을 보았을 때도 그것은 분명 일반인의 소행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
남작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 유더는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각성자가 일으킨 사건이라면 어찌 저희 마병단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타이누의 기사들이 대삼림에서 살해당했던 그때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없었습니다만, 이번은 다를 테니 제가 진범을 잡을 수 있도록 최대한 열심히 조사에 협조하며 노력해 보겠습니다.”
“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진범이라니!”
“……보좌가 잡은 하인은 범인이 아니라 생각하는가?”
남작의 말을 가로막으며 키시아르가 조용히 물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유는?”
“그가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따위 말을 믿으라고……. 이 상황이 장난인 줄 아는가! 사실 내 하인으로 위장해 들어온 각성자 놈과 자네가 한편이었다고 지금 실토하는 게지!”
남작이 무어라 소리치든 말든, 유더는 오직 키시아르의 반응에만 집중했다.
현장에서 잡혀 격리된 이후로 현재까지, 유더는 키시아르를 비롯한 다른 이들과 단둘이 남아 대화를 할 틈을 얻을 수 없었다. 키시아르 또한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와 내내 빌름 남작을 막아내느라 시간을 보냈으므로 남작이 이야기해 준 부분 이외에는 상황이 어땠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터였다.
어차피 범인은 각성자가 확실하다고 남작이 먼저 인정한 상황이다. 단지 그는 그 범인을 유더로 만들고 싶었을 테지만, 각성자 관련 범죄가 되어 버린 이상 조사할 권리는 마병단 쪽이 우선이었다.
남작의 눈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 보이는 그들이 한없이 우습게만 보였겠지만, 실상 이 자리에서 키시아르와 마병단이 그에게 몸을 숙여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유더를 보호하려 물러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나그란의 별이 대체 왜,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야. 거기에 살려서 정보를 들어야 할 놈도 있지. 빌름 남작 따위의 알력 다툼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유더는 키시아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그라면 분명 이 정도로도 제 뜻을 알아 주리라 믿었다.
“단장님. 제가 치안 관리단으로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유더가 이곳에 남아 조사를 받는다면 남자를 구할 가능성이 한없이 낮아진다.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조사를 받겠노라 나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남작이 진짜로 원하는 건 유더의 결백이 밝혀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가 유더를 치안 관리단에 보내야 한다고 내내 주장한 것도 키시아르를 물고 늘어지기 위해서였을 뿐 진심은 아니었다.
결국 이건 모두 제가 진짜 원하는 것을 숨긴 채 가면을 쓴 이들 간의 수 싸움일 따름이었다.
이 상황에서 키시아르가 빌름 남작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으면서 마병단이 당당히 나서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이쪽이다. 그 김에 잡혀간 사내를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유더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주친 붉은 눈이 몇 번인가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가늘게 찡그려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는 결국 한숨과 함께 눈꺼풀 아래로 사라지고 말았다.
“단장님.”
“…꼭 그렇게 해야겠나?”
많은 뜻을 내포한 질문이 돌아왔다. 드물게도 단단함이 느껴지지 않는 작은 목소리였다. 순간 제 판단이 옳음을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가슴 안쪽 어딘가에서 파문이 일었으나, 유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키시아르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방탕한 공작이 아닌 냉철한 단장의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빌름 남작을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다른 사람처럼 바뀐 분위기에 남작이 당황하기도 전, 거대한 힘을 내포한 목소리가 차가운 물줄기처럼 머리를 때렸다.
“보좌 유더 아일을 자네의 말대로 공정한 조사를 위하여 치안 관리단에 협조차 보내도록 하겠다. 이것이 얼마나 큰 양보인지는 자네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예?”
“또한 사건 정황이 각성자와 밀접히 관련되었음을 확인받은 바, 이제부터의 모든 조사에는 마병단이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임을 밝혀 두겠다.”
“…아니, 전하. 잠시만.”
“우선 현장 조사부터 우리가 다시 시작하겠네. 진범이 따로 있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테니까.”
“저, 전하!”
“타이누의 기사단장 제이머 필에게도 전하게. 이곳이 아니라 치안 관리단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키시아르는 유더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유더 아일의 조사를 위해 마병단 측에서는 부단장 에버 벡과 에문 필랑, 핀 엘더를 함께 파견하지. 모든 조사는 타이누 기사단과 마병단의 협조 아래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각성자에 관한 조사 및 의견은 마병단의 판단을 우선한다. 이에 거부하는 자는 황명을 거역한 것으로 판단한다.”
선고를 내리듯 퍼부어지는 말에 당황하여 말을 잃은 빌름 남작은 그들이 나간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전하!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여태까지 모두 파악했다 생각했던 상대가,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승리의 깃발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시체를 보시면 바로 누구의 짓인지 아실 겁니다.”
유더는 등 뒤에서 빌름 남작이 쫓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어떻게 들어왔다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왜’ 저질렀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라.”
키시아르가 유더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 부분은 한쪽에서만 조사하는 것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저대로 그곳에서 알아보겠습니다.”
“프루엘레의 말로는 잡은 자가 구면이라고 했다던데.”
“기억을 잃은 자들을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부분도 부디…….”
“전하!”
유더는 지척에 다다른 빌름 남작의 발소리를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부탁드립니다. 저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키시아르가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숙였다. 유더는 내려오는 입술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쉬라고 데려왔더니, 그 쉴 곳이 감옥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떨어지는 입맞춤 사이로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옷은 갈아입히고 보내고 싶었는데, 속이 쓰리군.”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아서 쓰린 거야.”
슬쩍 눈을 돌리자 등 뒤에서 빌름 남작이 입을 벌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유더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무심히 스쳐 아래로 내려갔다.
***
“이 사람도 조사를 하라고? 그 살인사건 건으로? 하지만 범인은 이미 잡았잖…….”
“조용히 해. 아무튼 필 단장님이 아직 오지 않으셨으니까…….”
빌름 남작의 저택에서 치안 관리단으로 온 유더를 맞이한 기사들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범인을 잡아 둔 상황에서 갑작스레 또 다른 용의자가 추가된 상황이니 당혹스러울 터였다.
그러나 그 용의자의 정체가 바로 얼마 전 펠레타 공작과 함께 치안 관리단에 왔던 건방진 마병단원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몇몇 이들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비웃으며 유더를 겁주려 했다.
“서부의 영웅이네, 대삼림을 구했네 마네 하던 마병단도 별것 없군.”
“사실 진짜 범인은 저 녀석이었는데 하인에게 뒤집어 씌우려다 들킨 거겠지. 이전에 감히 이곳에서 능력을 쓰네 마네 하며 건방지게 굴 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지금 뭐라고 했어요?”
유더와 함께 이곳까지 온 에버가 싸늘하게 반문하자 기사들은 곧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낮게 웃는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짜증나 죽겠네. 좀 패 주고 올게.”
“굳이 그럴 필요 없어, 핀.”
유더는 막 주먹을 울룩불룩하게 키우려 하던 핀을 조용히 말렸다.
“어차피 조사는 기사단장이 도착한 이후에 너희와 함께 시작해야 해. 그때까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저러는 것뿐이야.”
“하지만.”
“쓰레기를 치우는 건 일을 다 끝낸 다음에 하는 게 제대로 된 순서잖아.”
“픕.”
조용히 중얼거리자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에문이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눈가를 씰룩거렸다.
“…유더는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요?”
기가 막힌 에버가 찡그린 채 중얼거렸지만 어투는 한결 가라앉은 상태였다. 조사를 위해서는 냉정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유더는 저를 데리러 온 병사들의 팔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다녀올 테니, 조사 쪽은 잘 부탁합니다.”
“……이런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지만, 우리가 잘해야 유더가 빨리 나오겠죠. 노력할게요.”
합동 조사를 위해서는 기사단장과 마병단 간의 대화가 다소 필요했기에, 유더는 그동안 감옥에서 잠시 대기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유더가 바랐던 목적지이기도 했다.
‘보통 같은 사건의 연관자는 같은 구역에 집어넣지.’
어두운 계단을 따라 한참을 들어간 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자 철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웅크려 있던 선객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몇 시간 사이 얼굴이 심하게 상한 각성자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유더를 올려다보았다.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