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순간 손끝이 움찔 멈추었다. 코를 자극하는 축축한 비린내는 단순히 습기가 많은 지하라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유더는 기절한 남자를 두고 소리 없이 일어나 기민한 움직임으로 시체 쪽에 가까이 다가갔다.
어른대는 불빛 아래 비친 모습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드레스와 예복 자락을 걸친 채 잘린 사지가 망가진 인형 더미처럼 쌓여 있는 아래로, 공포에 질려 입을 벌린 채 싸늘하게 식은 얼굴들이 보였다. 피에 젖고 머리칼이 헝클어져 엉망이었으나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옷을 갈아입은 뒤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던 빌름 남작의 둘째 동생 부부였다.
‘옷과 뼈까지 모두 동시에 베어낸 것 같고, 지독한 분노가 느껴지는군. 이 방식은… 대삼림에서 보았던 타이누의 기사들이 살해당한 방식과 거의 흡사해.’
유더의 머릿속에서 나한의 곁에 있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이름이… 에르시라고 했었던가.’
작은 불빛만으로 확실히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천장과 벽에는 혈흔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바닥만 흥건했다. 하지만 시체에서는 아직도 피가 조금씩 흐르는 중이었다.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면, 범인은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몰랐다.
‘다른 곳에서 죽인 뒤 여기로 옮겨 둔 건가.’
걸친 예복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어 불빛에 비친 시체를 조금 더 훑어본 뒤, 유더는 그들의 옷자락과 구두가 피 외의 것들로 이미 더럽혀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흙? 아니면 다른 오물?’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피자 술과 저장 음식을 가득 담아 둔 장 너머로 흐릿하게 작은 문이 보였다. 유더는 그곳을 향하여 조심히 앞으로 나아갔다. 문 바깥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다만 집 안이 아닌 정원 쪽으로 이어지는 통로인 듯했다. 감각을 곤두세워 살폈지만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인들이 물건을 들여올 때 쓰는 곳인가… 그래서 도망친 놈도 여기로 왔던 거군.’
유더는 바깥까지 나가지 않고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기절해 있는 남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줄 여유는 없었다. 뺨을 망설임 없이 두드리자 곧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눈꺼풀이 열렸다.
“으……. 으?!”
유더를 본 남자가 깜짝 놀라 묶인 손을 버둥거리며 반항하기 전, 유더는 재빨리 그의 멱살을 잡고 시체가 있는 쪽을 볼 수 있도록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불꽃 아래 비친 피와 시체를 본 남자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소리를 지르면 입을 막을 생각이었으나 다행히도 그러지는 않았다.
“빌름 남작의 동생 부부가 죽었다. 살해에 가담했나?”
“뭐? 아니야!”
“그러면 왜 여기에 잠입해 있었던 거지?”
위층에서 웅성대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곧 사람들이 들이닥칠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남자도 느꼈는지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나, 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온 거야.”
“사람?”
“우리 마을에서 쫓겨나 치안 관리단 감옥에서 사라진 사람들……!”
그 말에 유더가 눈을 크게 뜸과 동시에, 위층에서 ‘저기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 파악을 좀 더 해 두기 전에 결국 사람들이 내려온 것이다. 무기와 횃불을 들고 내려온 하인들이 피가 묻은 유더와 그 너머의 시체를 보고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시체다! 사람을 죽였어!”
“누가 남작님을 모셔 와!”
“꼼짝 마!”
유더는 자신들을 향해 겨누어진 무기를 보며 내심 혀를 찼다. 누가 보아도 오해를 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대화는 이쯤에서 끝날 모양이었다.
“……그래서.”
키시아르가 깊이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단지 그 장소를 제일 처음 발견했다는 이유만으로 내 보좌를 기어이 치안 관리단으로 보내고 싶다? 그게 체포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지?”
“전하. 제 동생 페이프와 부인 넬리사벨이 제 집에서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제 집, 그것도 지하실에서 말입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한 빌름 남작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검시한 이들은 사람의 몸을 그렇게 잘라내는 건 평범한 힘을 지닌 자가 할 수 없는 일이라 단언하더군요. 검기를 쓸 수 있는 기사가 아니라면 각성자의 짓이 틀림없다 했습니다. 현장에서 잡힌 각성자가 둘이라면 둘 모두 당연히 치안 관리단으로 보내 조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하인이 치안 관리단에 갔다 해서 내 보좌까지 따라가야 할 이유는 없지. 마병단원을 조사하고 처벌할 우선 권한은 단장인 나와 폐하께 있네. 나는 내 휘하의 단원을 결코 그곳으로 보낼 생각이 없어.”
“하지만……!”
“그리 조사를 해야겠다면 조사할 이들을 저택으로 부르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그거라면 얼마든지 협조할 수 있는데 말이네.”
“전하. 그렇게 감싸실수록 일은 더욱 복잡해질 뿐임을 알아 주십시오!”
결국 빌름 남작이 크게 소리를 쳤다. 유더는 피가 말라붙은 예복을 아직 벗지 못한 채 키시아르의 뒤에 앉아 있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대치에 머리가 슬쩍 지끈거렸다.
빌름 남작의 동생 부부가 시체로 발견된 뒤, 저택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유더는 제가 붙잡은 남자와 즉시 격리되어 방에 갇혔고, 남작은 두 사람 모두를 당장 치안 관리단으로 보내려 했다. 그가 유더까지 보낼 수 없었던 것은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달려온 키시아르와 프루엘레 덕분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로 인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시작되었으니 다행스럽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유더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상당히 귀족적이고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남작은 끔찍한 시체를 보고 구역질을 하기는 했을지언정 동생 부부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그리 슬퍼하지 않았다. 그가 유더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유더가 진짜 범인이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키시아르에게 뭔가를 얻어내고 싶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여기서 선기를 잡으면 마병단의 협조도 공짜로 얻어내고, 펠레타 공작보다 위에 서서 여태까지 당하기만 했던 모든 것들을 뒤집을 수 있다 생각하고 있겠지.’
물론 진짜 범인은 하인이리라 생각 중일 테니 그에게는 제대로 된 조사든, 무엇이든 하지 않고 무조건 빠르게 죽이려 들 것이다. 각성자의 힘으로 빠져나가면 곤란해질 테니 능력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려 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분명 범인이 아니야.’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눴던 건 마지막 몇 마디뿐이고 기억에 남는 건 그저 페투아멧 유인 작전 때 보았던 얼굴뿐이지만, 경험과 직감이 그가 범인과 연관이 없음을 강하게 주장했다.
각성자 마을에서 쫓겨난 이들을 찾아 여기까지 올 만한 사람이라면 그 마을에 있었을 온건파 각성자들 뿐이었다. 그들은 나한 측과 대립하고 있을 테니 나한의 동료인 에르시의 방식으로 살해당한 시체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적었다. 쫓겨나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은 마티는 온건파 각성자들도 자신들을 배신했을지 모른다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그 남자에게 좀 더 정보를 들어 보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기 그지없었다.
‘남작이 그를 죽이기 전에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늦지 않고 최대한 빨리 빼내 오려면…….’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아직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빌름 남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키시아르의 말에 따라 조사할 기사들을 이곳으로 부를 테니 그들이 오면 반드시 협조를 해 주어야 할 것이라 큰소리를 치고 있는 중이었다.
“기사들을 이곳으로 불러 조사하면 협조해 주시겠다는 말을 잊지 않으시리라 믿겠습니다.”
“얌전히 조사만 한다면야 잊어버릴 이유가 없겠지?”
키시아르의 비꼬는 듯한 부드러운 대꾸에 남작이 콧등을 사정없이 찡그리며 문밖에 있던 집사를 불러들였다.
“제이머 필 기사단장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남작님께서 어제 명하신 이후부터 줄곧 글레힘 님의 집 앞을 지키고 계십니다만, 곧 이번 일의 조사를 위하여 치안 관리단으로 돌아가실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거긴 이제 되었다. 글레힘과 관리단 쪽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당장 이곳으로 오라 전해라!”
“예? 하지만…….”
“어서!”
씩씩대며 화를 내는 남작의 기세에 눌린 집사가 알겠다고 답하고는 서둘러 사라졌다.
“기사들이 자네의 동생을 지키고 있다니, 단순히 아픈 게 아니었던가?”
“……요즘 글레힘의 집 주변에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하여 형님 된 마음에 걱정이 되어 기사단장에게 부탁해 두었던 것뿐입니다.”
“그래? 기사단장이 그런 일도 하다니, 정말 친한 모양이야.”
키시아르의 대답에 남작이 또다시 이를 악물었다가는 힘을 뺐다.
“요즘 타이누의 사정이 제법 어지러워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시느라 바깥 사정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으셨겠지만 말입니다.”
“그랬지. 나는 줄곧 보좌와 이곳에서 놀았으니까.”
키시아르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당당히 대답하자 빌름 남작이 잠시 말을 잃었다가는 하 하고 숨을 터트렸다.
그 순간 유더의 머릿속에 제법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자를 만나고 싶다면 내가 그쪽으로 가면 되는 문제 아닌가?’
“말씀을 나누시는 도중 죄송합니다만, 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유더는 빌름 남작이 또다시 무어라 한소리를 하기 전, 재빨리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치안 관리단에 가서 조사를 받아도 상관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