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58화 (358/805)

358화

“뭐, 어쩔 수 없겠지.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어제, 바깥에 나가 있던 많은 단원과 기사들에게서 거의 동시에 수많은 연락이 들어왔다. 타이누 곳곳에서 일어난 의문의 사건과 관련한 보고였다.

첫 시작은 북문에 위치한 창고 밀집 지역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현장을 수습하기 위해 달려간 기사단이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누의 명소 곳곳이 보란 듯 훼손당했다. 대부분 타인 가와 관련이 있는 곳들이었다. 특히 타이누의 자랑이었던 핀나드 광장의 동상에는 타인 공작을 비난하는 욕설이 적혀 충격을 주었다.

본채에서 내내 빌름 남작의 상황을 살폈던 프루엘레는 그가 다급히 밖으로 나갔다가 몇 시간 뒤 혼이 나간 얼굴로 돌아왔다고 전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은 많은 이들이 보기 전에 다급히 폐쇄되었으며 도시의 경계를 지키던 성문 또한 문을 걸어 잠갔다.

도시는 깊은 공포와 혼란에 사로잡혔지만 빌름 남작은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런 공식 발표를 내놓지 않았다. 덕분에 저택의 분위기 또한 어제를 기점으로 심각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아마 지금쯤 타인 공작에게 좀 더 지원을 해 달라 말하고 있겠지만…….’

타인 공작에게는 이곳을 도울 만한 여력이 없다. 지원은 불발될 터였다.

키시아르와 마병단은 각성자와 관련된 사건에 우선 수사권이 있음에도 이 모든 일에서 배제당한 채 여태까지 그들의 속셈을 모르는 척해 왔다. 하지만 이번 일로 타인 공작과 빌름 남작도 자신들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테니, 곧 손을 내밀러 올 날이 머지않은 듯 느껴졌다.

그사이에 루산 사제가 돌보던 기억 잃은 이들 중에서 정신을 차린 사람이 두어 명 더 늘어났고, 이논은 나단 주커만이 돌아올 때마다 그의 방에 들이닥쳐 숨겨 놓은 페투아멧을 관찰하러 갔다.

나그란의 별이 머무르고 있을 장소를 찾고 있는 에버와 단원들이 아직 이렇다 할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키시아르는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그란의 별은 이쪽에서 찾지 않아도 곧 모습을 드러낼 이들이니 급하지 않았다. 그가 단원들에게 일을 맡기는 건 아직까지는 정말 필요하여 맡기는 일보다는 경험을 쌓게 해 주려는 측면이 컸다.

키시아르가 오늘은 느긋하게 차와 쿠키를 들며 오후를 보내자고 말했기에,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랐다. 그러나 숙소 앞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향하여 공손히 고개를 숙인 빌름 남작의 집사였다.

“펠레타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지?”

“오늘은 빌름 남작님의 20번째 결혼기념일로, 다소 특별한 저녁 시간이 마련되는 날입니다. 특별한 자리에 특별한 분들께서 방문하여 주신다면 더욱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이기에, 혹 자리를 빛내 주실 수 있으실지 부탁드리는 남작님의 전갈을 들고 왔습니다.”

집사는 남작이 공무에 바빠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에 깊은 사과의 뜻을 함께 전했다는 말을 하며 머리를 공손히 조아렸다. 여태 하인들만 보내던 빌름 남작이 짧은 전갈 따위를 전하기 위해 집사를 보낸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집사가 건넨 짧은 쪽지를 읽은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결혼기념일이라니 축하해 마땅한 일이군. 혹 프루엘레 공자도 오늘 자리에 참석하는가?”

“예. 빌름 가의 모든 분들과 프루엘레 1공자님께서 참석 의사를 밝혀 주셨습니다.”

“좋네. 그렇다면 나와 보좌도 함께 참석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남작님과 부인께서 크게 감격하실 것입니다.”

‘감격이라, 말은 잘하는군.’

어떻게든 핑계를 대어 정황을 살피려 하는 게 보여 우습지도 않았다. 집사는 마지막까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나서야 물러났다. 키시아르는 숙소로 들어서며 참았던 웃음을 흘렸다.

“너와 함께 가겠다고 하는데도 싫은 척 하나 못 할 만큼은 다급한가 보군. 아무래도 오늘의 즐거운 간식 시간은 뒤로 미뤄야겠는데.”

“식사 시간일 뿐인데 따로 준비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준비할 게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키시아르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어야지.”

***

“어서 오십시오, 펠레타 공작 전……하.”

저녁이 되어 불을 밝힌 본채 정문 앞에서 그들을 맞이한 집사가 처음으로 매끄러운 혀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조금 더듬었다. 유더는 그의 시선이 제게 향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한숨을 삼켰다.

“안내하지 않고 뭘 하나.”

“아, 예. 죄송합니다. 바로 안내하여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빌름 남작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한 저녁 식사는 이전에 만찬이 열렸던 홀에서 이루어졌다. 참석 인원은 그때보다 훨씬 적었지만 꾸며 둔 모양새는 오히려 더욱 화려하게 느껴졌다. 바로 어제 타이누 내에서 온갖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호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펠레타 공작 전하와 보좌 유더 아일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격식을 차린 하인의 안내에 이미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더욱 핼쑥해진 빌름 남작과 그의 깡마른 부인, 그리고 붉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반쯤 위로 넘겨 올린 프루엘레는 구면이었지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두 소녀와 빌름 남작과 몹시 닮은 남자 두 명,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부인들은 초면이었다.

인원은 각양각색이라도 표정은 모두 비슷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유더는 저보다 한 발짝 앞에 선 채 환하게 웃고 있는 키시아르를 슬쩍 바라보았다. 금발에 어울리는 푸른 예복에 띠를 두른 모습이 언제나처럼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해 보였으나, 오늘은 평소만큼 편하게 그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유더의 자리는 키시아르가 앉은 상석 바로 오른편이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곁에 있던 프루엘레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복을 입은 건 처음 보네, 아일 경.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잘 어울리는걸?”

“…과찬이십니다.”

이전에 참석했던 만찬 때는 모든 마병단원들이 예복 대신 마병단 단복을 입었다. 하지만 오늘의 유더는 키시아르가 타이누에서 강제로 사다 안겼던 예복을 걸친 채 자리에 참석한 상태였다.

키시아르가 엄숙한 얼굴로 선언했던 ‘지난번과 전혀 다른 모습’이 제 차림새를 뜻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유더는 저 대신 나단 주커만을 데려가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몇 시간 동안 강제로 그의 옷 입히는 인형처럼 움직이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선물받은 물건들을 이후 단 한 번도 쓰지 않고 포장된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동안 못내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모든 포장을 풀어 늘어놓은 뒤 수도 없이 대어 보고 나서 그가 택한 것은 짙은 남색 예복과 흰 망토였다. 은실로 가장자리에 우아한 무늬를 넣고 보석을 아낌없이 매단 예복은 유더가 태어나서 입어 본 모든 옷 중 가장 화려했다. 유드레인 아일 시절까지 합해도 그랬다.

거기에 그때 함께 샀던 장갑과 신발까지 더해지니 이건 숫제 걸어 다니는 보석 덩어리라도 된 기분이었다.

키시아르는 자신과 유더의 옷 색을 비슷하게 맞추어 입은 게 무척 즐거운 듯했으나 유더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자리에서는 그 화려한 옷이 그렇게까지 지나쳐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또다시 한숨을 삼키자마자 빌름 남작이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고 입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의 자리를… 빛내 주시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전하. 제 아내 엘리즈는 이전에 존안을 뵈었습니다만 두 딸 메거린과 멜린다, 그리고 두 동생들은 오늘 처음 보시겠군요. 이쪽은 둘째 동생 페이프와 부인 넬리사벨, 그리고 셋째 동생인 겔뤼안과 부인 가니에트입니다.”

“자네의 동생은 하나 더 있지 않았나? 이전에 물건을 사러 나갔을 때 어느 상단에 방문했다가 다른 동생을 만났던 기억이 나는데 말이네. 그는 오늘 오지 않았나 보군.”

“아, 글레힘을 만나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글레힘은… 죄송하지만, 어제 갑작스레 사고를 당하여 몸이 좋지 않은 탓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안타까운 일이군.”

키시아르가 짐짓 눈을 크게 뜨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글레힘 빌름이 당했다는 ‘사고’가 타이누 전체를 뒤집어 둔 사건들과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몹시 낮을 듯했다.

빌름 남작의 소개를 받은 이들이 모두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남작의 두 딸은 넋이 나간 듯 키시아르의 얼굴만을 보고 있었는데, 남작 부인이 입술을 깨물며 팔을 찔러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전에 열린 만찬에도 데려오지 않았던 귀한 딸들을 이번 식사 자리에 데려온 남작의 속내가 뻔히 보였지만, 상황이 이러니 그저 우습기만 했다.

‘상대에게 잘 보여야 할 듯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으니 딸들이라도 동원해 보겠다는 거겠지. 전형적이군.’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명목답게 유독 화려하게 꾸민 음식이 많았다. 식탁을 장식한 생화는 향기로웠고, 겉보기에는 모두가 화기애애해 보였다. 빌름 남작이 키시아르에게 별저에서의 생활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사이, 유더는 프루엘레와 대화를 나누었다.

“고양이는 방에 두고 오셨습니까?”

“그래. 저녁을 챙겨 주고 오기는 했지만 조금 걱정이야. 내가 없으면 잘 먹지 않거든.”

“1공자께서 이번에 귀여운 고양이를 데려왔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이는 빌름 남작의 둘째 동생과 함께 온 젊은 부인이었다.

“어떻게 생긴 고양이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프루엘레는 잠시 침묵하다, 웃는 얼굴로 노란 털에 초록 눈을 지닌 고양이라 설명해 주었다. 분명 입술 끝은 올리고 있으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관심은 조금도 꺼지지 않았다. 부인의 뒤를 이어 빌름 남작의 동생도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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